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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2606829
· 쪽수 : 304쪽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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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다른 거 바라는 것 없다. 내가 이제 네 몸을 고칠 수 있으니 그저 오래오래 살아줘라. 오래오래 살아서 한집에서 한솥밥 먹으면서 살아보자. 그 이외에는 내 절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소리를 내야만했다. 고맙다는 말이라든가 혹은 잘 살아보자는 말을 꺼내려 했다. 말할 시간을 놓칠까 서둘러 큰 숨과 함께 말하려 했다. 그는 기다려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녀는 보기 좋게 때를 놓쳤다.
“내 너에게 순정을 바칠 것이다.”
그의 말이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나보다. 아득한 정신이 서슴없이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까와 같은 다짐도 없이 태연하게 단단한 음성을 전했다.
“오라비. 내 모든 순정을 오라비를 위해 바치겄소.”
사랑한다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거대한 의미의 단어. 바로 순정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
소록도를 들어온 사람들은 시간이 있을 때면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 했다.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 각자 달랐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같이 가족이 있었다. 정이 넘치는 동네에서 살았다. 그리고 한센병에 걸렸다. 한센병이 걸리고 난 뒤 이야기는 어찌된 영문인지 공통점을 떠나 무슨 판박이마냥 똑같았다. 몇 대에 걸쳐 동고동락한 이웃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가족들도 다를 바 없었다. 살았던 집들은 불태워졌다. 아주 가끔 운이 좋은 사람들은 정상인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왔다. 더 운이 좋은 사람들은 아내나 서방이 따라와 살아주기도 했다. 사실 한센병에 걸린 가족을 따라 나서는 행동은 가족들이 원한 일이 아니었다. 환자에게는 운이 좋을지 몰라도 정상인인 가족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한센병에 걸린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쫓겨나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가기 싫어도 따라가야 하는 선택은 강요였다.
서수철이 떠올랐다. 그저 그를 구하기 위해 돈을 벌고 싶었다. 아니, 사실 그가 왜 끌려가야하는지도 타당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총칼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쓰이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다는데, 더군다나 조선을 침범한 놈들이 달라하는데 태연하게 쇠그릇을 주는 일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일 남자들이 가족을 지키려는 데 침범을 해서 죽이려는 일본의 행동을 최소한의 양심으로 막고 싶었을 뿐이다. 죄악을 저지르지 못한 아비일 뿐이었다. 악마가 아니라서 그리 행동한 것뿐이었다. 누군가를 살리고픈 사람다운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구타당하는 모습에 분노해서 몇몇의 악마들을 붙들고 말리는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당한 행위가 죽을죄가 되어버렸다. 내 나라를 침범한 일본을 위해 총칼을 들어야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혼자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장에 들어가려했다. 공장이라고, 분명 공장이라고 말했다. 동네 이장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만나온 사람들 전부 다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 함께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처자들도 하나같이 공장에서 일을 한다는 말만을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이 처녀였다. 이런 끔찍한 일을 알고 떠나온 처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