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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63579870
· 쪽수 : 448쪽
· 출판일 : 2023-12-27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 1976년 1월
1. 좌절
2. 대한독립만세
3. 이별
4. 끌려가는 노예들
5. 화서
6. 기미년
7. 결혼
8. 산루금광
9. 패싸움
10. 다케다의 죽음
11. 설국
12. 종소리
13. 천사 다마코
14. 허무한 죽음들
15. 도박
16. 탈출
17. 열병
18. 통나무 귀틀집
19. 아이누 모시리
20. 잘 있거라, 평온한 대지여
21. 재회
22. 떠도는 사람들
23. 종전
24. 다시 찾은 종
25. 머나먼 귀향길
에필로그 - 답사길 반만 리
저자소개
책속에서
아무래도 동네 목욕탕에 가야겠구나 싶어 갈아입을 속옷을 찾으려고 서랍장을 여기저기 뒤적이는데, 깊숙한 곳에 두툼한 원고 뭉치 서너 권이 검은 철끈으로 묶이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게 뭐지?’
붉은 칸이 쳐진 200자 원고지에는 일제강점기 열네 살 징용자로 끌려간 아버지의 육필수기가 쓰여 있었다. 맞춤법이나 문장이 한 세대를 지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읽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나는 원고 뭉치를 들고 일어서서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다 문장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허리가 아팠으나 원고지에 눈을 떼지 못한 나는 이불을 들추고 아랫목에 앉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들 시절을 잘못 타고나서 쌩으루다 고상이여, 씨부럴노므 시상 확 뒤집어지야 헐 판인디!”
분개한 마음에 모두 침묵에 빠져들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든 악마적 속성이 잠재되어 있다. 이들을 여기까지 내몬 일제의 앞잡이들은 어떻게 그리 야차같이 동족의 피눈물을 빼먹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평소에는 선량한 가장이었고 이웃과 더불어 정을 나누던 사람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거대한 악이 권세를 휘두르자 자신만 살겠다고 마음속의 악마를 불러낸 자들이었다. 마치 여름날 기어 나와 살갗의 가장 약한 부분에 빨판을 꽂고 피를 빨아대는 각다귀처럼 먹고살아야 한다는 우활(迂闊)한 명분 뒤에 숨어 동족의 숨통을 조이는, 그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련한 족속들이었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귀축영미(鬼畜英美)라는 공동의 적을 설정하고 거짓 신을 내세워 전 국민을 황국신민으로 일체화하면서 그 밖의 어떤 비판과 도전도 철저하게 탄압하고 봉쇄했다. 이제 개인의 사랑, 행복, 불행과 슬픔 조차도 공공의 적이 돼버렸다. 천황이라는 바알(Baal) 앞에 신의 자비와 긍휼이 사라진 제국. 신이 사랑한 사람들은 간데없고 전쟁의 화염을 부채질하는 사탄이 선량한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세상. 그것은 너무도 부자연스러운 억지여서 그들에게 통찰력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제국은 아침 안개처럼 스러지고 말 것을 내다봐야 마땅했다.
배가 내해를 벗어나 큰 물결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왔다. 성난 파도가 거슬러 오는 곤고마루를 향해 날을 세우고 온몸으로 솟구쳐 올라 무망한 타격을 쉴 새 없이 되풀이하지만, 거대한 철선의 침로를 1도도 바꾸지 못했다.
‘정녕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로구나.’
재호는 큰 파도가 몰려와 뱃전을 때리면서 텅텅 부딪는 소리가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통곡하는 몸 안의 울음소리로 들렸다. 누워 바라보는 선실의 하얀 천정으로 요시다에게 이끌려 그곳에 이르는 동안 탈주의 기회를 놓쳐버린 아쉬운 순간들과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형과 형수의 먼 그림자 같은 모습들이 활동 영화처럼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