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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한국문학론 > 한국작가론
· ISBN : 9788964362082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21-11-15
책 소개
목차
서문
추천사
1부 떠오르는 태양
종로2가 김수영 생가 / 종로6가 집 / 조양유치원 / 계명서당 / 어의동보통학교 /
동묘 / 적십자병원, 순화병원 / 선린상업학교 / 용두동 집 / 현저동 집
2부 자유의지를 따라
일본 도쿄 / 진명고등여학교 /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 만주 길림 / 마리서사 /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 한청빌딩 / 충무로4가 집 / 전전 명동 / 성북구 돈암동 신혼집
3부 생환 기적
일신국민학교 / 전곡과 연천 / 개천, 북원, 순천, 평양 / 해군본부, 중부서 /
이태원 육군형무소, 인천 포로수용소 / 부산 서전병원,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거제도 포로수용소 /
경기공립여중학교 / 영희국민학교 / 경기도 화성군 사랑리 / 영등포 집 Ⅰ / 국립온양구호병원
4부 낡아도 좋은 것들
영등포 집 Ⅱ / 부산 초량동 판잣집 / 신당동 집 Ⅰ / 미도파백화점 / 전후 명동 /
현대문학사 / 종삼 / 군산 전원다방과 군산YMCA / 을지로사거리와 남대문통 상업은행 /
성북동 집 / 본가 성북동 집 / 구수동 집 / 마포 종점 / 망우리 박인환 시인 묘
5부 온몸으로 온몸을
공보관 공보실 / 도봉동 집 Ⅰ / 동아일보사 / 민족일보사 / 도봉동 집 Ⅱ / 예총회관 /
신구문화사 / 민음사 / 창작과비평사 / 강릉 자혜병원 / 신당동 집 Ⅱ / 조선일보사 /
서빙고 대공분실 / 부산 미화당백화점 / 경주 불국사 청마 시비 / 광화문 발렌타인 /
예총회관 광장 / 김수영 시인 묘 / 김수영 문학관
부록
김수영 시비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 때문에 인생이 꼬일 때가 있다. 김수영에게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와 6·25전쟁으로 피난 갈 때가 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할 때 갑자기 찾아온 전염병만 아니었다면 옆집에 살았던 절친 고광호처럼 경기중, 경기고보, 그리고 일본 유학이라는 당시의 엘리트 코스를 정상적으로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는 김수영에게 정상 진로에서 이탈하여 야간 상업학교까지 다니게 하는 굴절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김수영 인생에서 최대의 인생 굴곡을 겪게 만든 6·25전쟁 때, 계획대로 막내 이모 트럭을 타고 피난을 갔다면 김수영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상적 우등생 코스를 밟았거나 조지훈, 서정주처럼 피난에 성공했다면 김수영은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빛나는 보통학교 시절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톨박이로 지낸 야간 상업학교 시절. 명과 암으로 극명하게 갈라지는 학창 시절, 그 극적인 대비가 안겨 준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다양한 마음의 갈피는 김수영의 마음 앨범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6·25전쟁 때 피난 가지 못하면서 겪은 포로 생활과, 포로 생활에 이어진 아내와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선린상업학교 선배의 동거가 안겨 준 김수영의 표현대로 ‘억만 개의 모욕’은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더 이 상 비참할 수 없는 나락으로 한 시인을 추락하게 만든 굴곡이었다.
김수영과 김현경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세 곳에서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먼저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에는 두 사람이 1944년 2월 진명여고 앞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김현경이 졸업반 친구들과 함께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나오다가 학교 수위로부터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교문 앞에 나가니 김수영이 서 있었고, 학교 앞 식당으로 가서 김수영이 김현경에게 이종구가 체포되어 강제 입대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고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기술하고 있다. <중략> 여기서도 『가정조선』(1985년 5월호)에서처럼 김수영과 처음 만났을 때가 ‘진명여고 2학년 때’라고 말하고 있다. ‘진명여고 2학년’이 ‘진명고등여학교 2학년’을 의미한다면 1941년이 되어 김수영이 일본 유학 가기 전이니까 아예 말이 성립되지 않고, ‘진명여고 2학년’이 ‘진명고등여학교 3학년’을 의미하면 1942년이 되고, ‘라일락 필 때 5월’이라고 했으니까 1942년 5월이라면 위에서 서술한 대로 김수영이 일본 유학 간 지 3개월밖에 안 된 시점인데, 더구나 연인 고인숙을 찾아 은행에 취직하기를 바라는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어렵게 간 일본인데 이종구와 함께 서울에 3개월 만에 다시 온다는 것은 상황상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상황과 본가 가족의 증언 등을 종합해 보면 김수영과 김현경의 첫 만남에 대한 서술은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 서술이 실제 상황에 가장 부합한다고 판단된다.
막내 남동생은 1951년 1·4후퇴 당시 경기도 화성군 사랑리로 피난 가서 김현경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고모 집에서 김현경을 보았던 김수명을 빼고 다른 식구들도 전부 사랑리 피난지에서 김현경을 처음 본 것이다. 김수영은 같은 식구라기보다는 집안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요즈음 감각으로도 초현대적이랄 수 있는 방식으로 둘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절차도 없었고, 결혼반지도 필요 없었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식을 치르지도 않았다. 둘의 감정이 맞으면 그만이었고, 둘이 좋으면 그만이었다. 일체의 관습적인 형식을 배제한 측면에서 둘은 모더니스트로서 첨단을 걸었다. 마치 21세기 서구 젊은이들이 서로 좋으면 동거부터 시작하는 방식을 집안끼리 결혼하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1949년에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