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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설교/성경연구
· ISBN : 9788964470541
· 쪽수 : 710쪽
· 출판일 : 2024-11-11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편집자 머리말
대림절과 성탄절
대림절 첫째 주일: 눅 21:25-26
대림절 둘째 주일: 눅 3:1-6
대림절 셋째 주일: 눅 3:7-18
대림절 넷째 주일: 눅 1:37-45(46-55)
성탄절 후 첫째 주일: 눅 2:41-52
성탄절 후 둘째 주일: 요 1:(1-9), 10-18
주현절(현현절)
주님의 수세주일: 눅 3:15-17, 21-22
주현절 후 둘째 주일: 요 2:1-11
주현절 후 셋째 주일: 눅 4:14-21
주현절 후 넷째 주일: 눅 4:21-30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눅 5:1-11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 눅 6:17-26
산상변모주일: 눅 9:28-36(37-43)
사순절
사순절 첫째 주일: 눅 4:1-13
사순절 둘째 주일: 눅 13:31-35
사순절 셋째 주일: 눅 13:1-9
사순절 넷째 주일: 눅 15:1-3, 11b-32
사순절 다섯째 주일: 요 12:1-8
사순절 여섯째 주일(고난주일): 눅 22:14-23:56
사순절 여섯째 주일(종려주일): 눅 19:28-40
부활절
부활절 요 20:1-18
부활절 둘째 주일: 요 20:19-31
부활절 셋째 주일: 요 21:1-19
부활절 넷째 주일: 요 10:22-30
부활절 다섯째 주일: 요 13:31-35
부활절 여섯째 주일: 요 14:23-29
부활절 일곱째 주일: 요 17:20-26
성령강림절
성령강림절 요 14:8-17(25-27)
삼위일체주일: 요 16:12-15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눅 8:26-39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눅 9:51-62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 눅 10:1-11, 16-20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눅 10:25-37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눅 10:38-42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눅 11:1-13
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 눅 12:13-21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눅 12:32-40
성령강림절 후 열째 주일: 눅 12:49-56
성령강림절 후 열한째 주일: 눅 13:10-17
성령강림절 후 열두째 주일: 눅 14:1, 7-14
성령강림절 후 열셋째 주일: 눅 14:25-33
성령강림절 후 열넷째 주일: 눅 15:1-10
성령강림절 후 열다섯째 주일: 눅 16:1-13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째 주일: 눅 16:19-31
성령강림절 후 열일곱째 주일: 눅 17:5-10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 눅 17:11-19
성령강림절 후 열아홉째 주일: 눅 18:1-8
성령강림절 후 스무째 주일: 눅 18:9-14
성령강림절 후 스물한째 주일: 눅 19:1-10
성령강림절 후 스물두째 주일: 눅 20:27-38
성령강림절 후 스물셋째 주일: 눅 21:5-19
성령강림절 후 스물넷째 주일: 눅 23:33-43
옮긴이 노트
지은이 프로필
성서정과 교회력(2025년, 2028년)
<말씀의 잔치> 시리즈 해제
저자소개
책속에서
요즈음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 속에서도 내적으로는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고, 외적으로는 한국 사회에 다양한 기여를 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교회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성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교회의 성장도 멈춘 지 오래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교회와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기는 한마디로 ‘강단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주 수만 편 외쳐지는 강단의 설교가 성서 본문과는 동떨어지고 시대적 의미를 갖지 않은 죽은 말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강단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설교에 있어서 익숙한 말씀만 전하는 ‘말씀의 편식 현상’과 신학적 편향성을 지양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매주 세계 교회가 함께 정하는 성서정과(聖書程課, Lectionary)에 따라 성경의 다양한 본문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추천의 글> 중에서
일반 교인들이 성서를 읽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잘 알려진 지침이 있다. 예를 들어 “성서를 읽을 때 항상 약속을 찾아보라”든가 “성서를 연애편지처럼 읽어라” 등이다. 그렇다면 대림절 본문을 읽을 때 도움이 되는 지침도 있지 않을까? “본문을 항상 성탄절과 연관시켜라”는 어떤가? 대림절 본문은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이는 당연히 도움이 되는 지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침은 전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절반의 도움만 준다. 이 지침은 독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독자를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성서 안에는 이번 주일 본문처럼 상식적인 지침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본문도 있다. 오늘의 본문은 21장 전체를 덮고 있는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주제에 깊게 영향을 받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연애편지를 운운할 정도의 낭만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일종의 ‘약속’이 나오는데, 이 약속은 묵시론적인 특징을 지닌 강력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 소개되고 난 후,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야 드러나게 된다.
<대림절 첫째 주일> 중에서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29). 예수의 영광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면서 그의 신성이 강조된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유일한 요점은 아니지만 중요한 요점 중 하나이다. 그러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 사실을 놓쳤다. 그들은 이미 이전에 한 번 예수에 대한 이해에 실패했다. 예수가 장차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사흘 만에 일어나리라는 선언을 이해하지 못했고(22), 지금 이들은 산에서 졸고 있다(마치 겟세마네의 장면을 예견하듯).
<산상변모주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