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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65744429
· 쪽수 : 348쪽
· 출판일 : 2014-04-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여름 우박|텅 빈 건물에서 혼자 살기|전봇대와 떡볶이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도시의 끝 다리 난간|가을 부근|하나님은 왜 사람을 먹어야 사는 동물로 만든 것일까|눈 내리는 날|가죽 팔기|봄을 기다리면서|우리는 별에서 왔다|바다여 바다여|들개 병들다|꿈속에서도 눈은 내리고|마침내 남아 있는 것
작가가 말하는 작품세계|작가약력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럼 우리 앞 뒤 글자를 바꾸어서 한번 말해 봅시다. 이를테면 충고는 고충이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충고는 고충일까. 듣는 쪽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완전히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유혹하는 대로 그의 언어 잡화상 속으로 끌려들어가 뒤죽박죽이 된 언어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려보기 시작했다. 기역으로 시작되는 판매대에 나는 서 있었다. 거기서 나는 충고와 고충의 경우처럼 글자를 바꿔놓아도 말이 되는 단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군대는 대군이다, 말이 되나요?”
“됩니다. 그럼 이제 또 제가 말해야 할 차롄가요. 그러나 아가씨, 우리 그냥 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벌칙을 정합시다. 상대편이 말하고 나서 일 분이 경과해도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내었을 경우 오백 시시의 반을 벌주로 단숨에 마신다든가 하는.”
나는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조금 전에 군대는 대군이다를 생각하는 데 나는 약 이십 초를 허비했다. 어쩌면 그보다 빨리 생각해 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여름 우박' 중에서
밖에 나오니 햇빛이 눈부셨다. 모든 수목들이 햇빛 속에서 푸르고 건강하게 자라 오르고 있었다. 잔디밭에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있었다. 나와는 모든 것이 거리가 먼 풍경 같았다. 이제는 끝났다…….
너무도 어렵게 들어와서 너무도 어렵게 다니다가 너무도 쉽게 끝나버린 것 같았다. 문득 눈시울이 젖어와서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구어버렸다.
몹시 배가 고팠다. 나는 이틀 동안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아까부터 창자는 보채고 있었다. 배고프다, 밥 좀 주라, 배고프다, 밥 좀 주라, 보채면서 나를 자꾸만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참아야지. 창자야 너도 자존심이 있지. 배고픔 정도는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는 거듭거듭 타이르면서 천천히 교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엇을 팔아야 하나…….
─'텅 빈 건물에서 혼자 살기' 중에서
나는 그 그림들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80호 정도의 대형 캔버스 앞에서 아, 하는 탄성을 나도 모르게 뱉어내고야 말았다. 내 예감은 적중했던 것이다. 완전히 몰락해 있는 어느 폐가에 수없이 많은 들개떼들이 몰려와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틀을 붙잡고 기어오르는 놈,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는 놈, 지붕 위에 버티고 서 있는 놈, 현관 앞에 누워 있는 놈…….
하여튼 어디에서든 들개들은 눈에 띄었다. 그것들은 모두 굶주려 있는 것 같았다. 한결같이 늑골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역시 사람의 그림자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림을 보는 사람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다. 어떤 흉계 같은 것이 틀림없이 그 그림 속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가을 부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