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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과 윤리

기독교 영성과 윤리

(초대교부로부터 마틴 루터까지)

유경동 (지은이)
한국문화사
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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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과 윤리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기독교 영성과 윤리 (초대교부로부터 마틴 루터까지)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68171758
· 쪽수 : 536쪽
· 출판일 : 2014-10-30

책 소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그 의미가 드러나며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으로 충만할 때 영성으로 변한다. 영성은 신학이 말씀에 집중하게 하며, 크리스천의 안과 밖, 그리고 위와 아래 전체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게 한다.

목차

서문

01 영성
1. 영성
2. 부흥
3. 삼위일체
4. 삼위일체의 윤리

02 영성과 하나님
1. 하나님
2. 예수 그리스도
3. 성육신
4. 성령

03 삼위일체의 영성
1. 하나님의 거룩하심
2.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의 신비
3. 하나님의 구원
4. 삼위일체와 새 창조

04 인간의 죄와 타락에 대한 영성
1. 죄
2. 신정론
3. 죄악의 내용
4. 원죄와 자유의지, 그리고 타락

05 고통과 용서에 대한 영성
1. 고난과 고통은 무엇인가?
2. 고난과 고통을 넘어
3. 용서와 은총
4. 죄악에서 돌아서기

06 사랑의 영성
1. 사랑
2. 하나님의 사랑
3. 하나님의 선물
4. 사랑하기

07 평화의 영성
1. 성경의 평화
2. 하나님의 평화
3. 세상의 평화
4. 평화의 영성

08 기도의 영성
1. 위를 향한 기도
2. 아래를 향한 기도
3. 안을 향한 기도
4. 밖을 향한 기도

09 믿음과 헌신의 영성
1. 하나님과의 교제
2. 믿음의 중심: 십자가와 성경
3. 순종과 헌신
4. 변화

10 교회와 가정의 영성
1. 교회의 역사
2. 교회의 영성
3. 종말론적 공동체
4. 가정과 노동

11 부활과 영생의 영성
1. 부활의 영성
2. 부활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
3. 부활
4. 하나님의 최후 선물 영생

결론
1. ‘용서받은 의인’에서 ‘용서받은 죄인’으로
2. 죄의 윤리
3. 내적 혁명
4. 영성이 답이다.

영성인물 소개

・ 참고문헌
・ 초대 기독교 영성인물
・ 찾아보기

저자소개

유경동 (지은이)    정보 더보기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지도교수로 목회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선교가 미래 청년 사역에 핵심적인 사명이 있음을 절감하고 현역 군종목사와 협력하여 문서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CBS 라디오와 TV에서 ‘굿뉴스’ 진행을 맡았으며, 기독교와 세계관 분야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01 영성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진리의 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과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올바른 영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영성

기독교 영성spirituality은 시대, 인물, 그리고 장소 등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엄두섭은 기독교 영성이 ‘기독교 윤리학’, ‘영신생활’, ‘신심생활’, ‘완덕의 길’, ‘초자연적 생활’, ‘내적 생활’, ‘성인학’ 등과 연관있다고 한다. 성공회 신비가 윌리엄 로William Law는 이 기독교 영성을 ‘헌신devotion’이라 했으며, 요한 웨슬리는 ‘완전perfection’이라 불렀다. 복음주의자들은 ‘경건Pie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18세기와 19세기에는 기독교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과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이것을 통틀어 영성신학이라고 부른다.
영성신학에서는 영성을 ‘객관적 영성’과 ‘주관적 영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전자는 소위 신론이나 기독론 등의 신학적인 연구와 관련되어 있다면,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신앙생활을 위한 윤리적인 덕목이나 성화 문제 등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영성운동을 엄두섭은 네 시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들의 영성은 눈물과 연관이 있어서 언제나 무릎에 수건을 놓고 지낼 정도였고, 성 안토니, 성 마카리오가 대표적인 신부들이다. 둘째는 이탈리아 영성을 말할 수 있는데, 성 베네딕트나 성 프란시스가 주축을 이루며, 주로 동굴 속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예수의 희생적 사랑을 구하는 영성이며, 베네딕트는 1500년 동안, 그리고 프란시스는 8백년 가까이 전 세계에 영성의 물결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독일의 라인강변의 영성을 대표하는 에크하르트는 인간의 내면생활의 깊이를 파고 들어갈 때, 그 깊이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내면에 심소心素가 있으며, 그 심소의 정점에서 신적인 불꽃이 탈 때,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정렬의 나라 스페인의 영성은 고난에 대하여 갈망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고난을 주의 뜻으로 이해하였으며, 예수가 고난을 당한 것처럼 더 많은 고난을 통하여 영성이 깊어진다고 보았다.
필자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이해를 전제로 기존 여러 학자의 연구물들을 검토한 결과, ‘영성’에 관한 다양한 현대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보았다.
첫째, ‘영성’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신앙적이며 존재론적 표현’이다. ‘영성’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에서 왔는데, 이 ‘루아흐’는 일반적으로 ‘영’으로 번역되지만, ‘숨’이나 ‘바람’이라는 뜻으로도 설명되어질 수 있으며, 신앙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단순한 어떤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표현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둘째, ‘영성’에 있어서 신앙적 내용의 중심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이라는 주제가 부각되는 이유는 말씀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원천을 재확인하고 생동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불 수 있다. 즉,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정의한다면, 영성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닮아 가는 영적 지향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나타나는 영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여야만 파악할 수 있다.
셋째, ‘영성’이 인격적 관계라고 할 때, 세 가지 차원에서 형성이 된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관계’와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즉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하여 ‘영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첫째는 신론으로, 둘째는 기독론으로, 그리고 셋째는 인간론을 통하여 영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영성’은 ‘회심과 변화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 전 존재의 삶’을 포함한다. 즉. 어떤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개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이 보다 숭고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열망, 그리고 현재를 넘어 미래를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와 깊게 연관이 된다. “이러한 기독교 영성은 심리학적인 건강을 추구하는 내성적內省的인 추구 그 이상의 것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연합하는 것이다.”
다섯째, ‘영성’은 ‘하나님의 실재’이면서 동시에 그 실재를 통한 ‘인간의 회심과정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때 영성은 외양적인 경건의 형식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에 의하여 변화되는 인간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 모습은 사회 속에서 윤리와 도덕적 성숙을 지향하는 변화된 인간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의 경우, 회심 전과 회심 후의 영적 상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여섯째, ‘영성’을 통한 회심의 과정을 말할 때, 반드시 ‘죄’에 대한 고백과 변화가 요청된다. 따라서 영성의 기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죄에 대한 인간의 자각과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죄의 회심’은 ‘영적 각성’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경우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적인 문제로 파악하는 이러한 관점은 영성이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일곱째, ‘영성’은 인간의 회심에 따른 도덕적 변화의 전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다분히 ‘교육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여기서 교육적인 요소란 인지-정서적 차원에서의 인간 발달 과정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단지 도덕적, 또는 모범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장 깊은 애정을 수반하는 호소이기 때문이다. 이 도덕적 감화는 인간의 주관성과 인간의 성장 가능성, 그리고 인간 상호 관계에서의 역할을 초월하는 역동성에 강조점을 둔다. 이러한 교육적인 요소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의 역할인데, 교회는 성서연구와 기도, 예배, 교육, 사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세상에서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여덟째, ‘영성’을 하나님의 실재를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실재는 단지 관념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주 전체와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영성’을 위의 인지-정서적 차원과 연관시켜 볼 때, 신과 인간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명상과 같은 수련과 자발적인 수행, 또는 공동체 훈련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피조세계인 자연과 우주와의 연관이 중요시 된다. 따라서 기독교적 영성은 “하늘과 땅, 성聖과 속俗, 정신과 물질, 내세와 현세,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 같은 낡은 사고에 기초한 영성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실재적이고도 실효성 있는 이해 전반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와 그가 지으신 ‘세계 한가운데서amid the created world’의 실존적인 삶 그 자체다.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며 사는 것,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변형되어 가는 인간 정신 일체를 포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영성의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며 다양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영성은 하나님의 실재이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공동체의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윤리적의 행위와 책임을 영성은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기독교의 부흥에서 강조하는 영성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2. 부흥

‘영성’에 관한 주제와 더불어 우리에게 중요하게 부각되는 또 다른 주제는 ‘부흥’이다. ‘부흥revival’의 기본적인 의미는 라틴어 “다시re- 살아나다-vivere.”라는 어원을 가지며, “어떤 것을 그것의 본래의 본질이나 목적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이해와 맞물려 해석되었다. 따라서 교회에서 부흥은 언제나 ‘역사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로 간주된다. 부흥의 의미는 성서적 관점, 교회사적 관점, 교회성장의 관점, 그리고 영적부흥의 네 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다.
먼저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구약에서 ‘부흥revival’을 뜻하는 단어는 사역동사로 ‘재생시킨다’, ‘살게 하다’, ‘생명을 주다’, ‘육성하다’, ‘소성시키다’, ‘회복시키다’, ‘구원하다’, ‘완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단어가 구약에 250회 이상 나오고, 신약에서는 ‘다시again’의 의미가 첨가되기도 한다. 결국 구약에서 부흥의 의미는 ‘다시 살아나다’, ‘절망 가운데 빠졌던 사람이 다시 새 힘을 얻다’, ‘생명력을 다시 일으키다’는 뜻(합3:2, 시85:6, 사57:15)으로 신약에서는 ‘부흥’이란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의미상으로 볼 때, 진정한 부흥이란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이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엡5:14, 롬13:11)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교회사적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 따라 부흥의 의미가 다양하게 정의됨을 알 수 있다. 대개 북아메리카에서는 부흥을 기간period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종교를 회복시키기 위해 놀랄 만한 방법으로 행사하시는 어떤 특별한 기간’으로 보기도 하였으며,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한편, 던컨 캠벨Duncan Cambell은 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한 공동체로서 부흥을 정의하기도 했다.
세 번째로 교회성장의 관점에서 부흥은 부흥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부흥운동은 “종교적 예배와 실천의 한 형태로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대중의 종교적 열정의 촉발에 중심을 두는 운동”이며, “집중적인 설교와 기도회에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흥은 영적인 각성이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복종하는 삶의 회복이다.”
마지막으로 영적부흥의 관점에서 보면, 부흥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사역과 연관된다. 이 마지막 관점은 사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관점을 모두 종합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를 성서로 해석하고, 교회 역사적 맥락에서 재구성되며, 나아가 교회성장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중심으로 해석되는 모든 것들의 기저에는 영적 부흥이라는 공통된 목적이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부흥은 하나님이 그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 영적 생기를 불어넣어 충만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특별한 주권적 사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부흥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체험이 동반된다. 브라이언 밀즈Brian Mills는 에드윈 오르Edwin Orr 박사를 인용하면서, 영적 부흥이 주는 삶의 변화를 설명한다. 즉, 부흥은 성령 충만의 역사를 통해, 교회가 성장하고, 대중이 각성하며, 기독교 신앙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전파되며, 나아가 사회운동으로 확장된다는 뜻이다.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긍극적으로 영적각성과 부흥에 이를 수 있다. 이제 신학적 근거가 되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살펴보자.


3. 삼위일체

영성을 기독교윤리의 학문적 관점에서 다루는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영성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의 이론적 기초는 ‘기독교 신학’과 그를 적용하는 원리인 ‘윤리’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필자가 ‘영성’의 윤리적 주제와 연관하여 중시하는 이 신학과 윤리 양 축이 모두 ‘관계성’을 전제하는데, 기독교 신학은 먼저 삼위일체와 같이, ‘신의 존재와 연관된 관계성’을 통하여, 그리고 점진적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결국, 윤리는 그 이름 그대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그 행동 원리를 세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 자체가 관계적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를 말할 때에 의무론적 윤리만을 집중한다면, 윤리의 본래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칸트의 정언 명법의 의무론은 본래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만약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논리를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해야만 한다!”는 의무론의 논설은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보편성이 제한된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는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과 그 적용의 한계가 생기는 특수성 사이에서 ‘범주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일원론과 이원론의 입장을 가지고 세상의 문제를 설명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일원론은 분명한 목적과 의무를 강조하는 반면에, 이원론은 목적의 불가능성, 즉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음에 대한 대안으로 현실주의와 같은 관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일원론, 또는 이원론의 관점은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윤리적으로 보면 그 답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원론의 경우, 세상을 신의 주권 아래 있는 세계관을 통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하지만,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이나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생기면, 결국 보다 심오한 그 무엇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함으로써 자칫하면 운명론에 빠지게 된다. 한편, 이원론은 이 세계와 초월의 영역인 저 세상을 구분함으로써,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기면, 이 땅에서는 그 답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문제를 방기하게 되며, 결국 문제의 해결을 저 초월의 영역으로 돌려버린다.
이와 같이 운명론이나 초월의 영역으로 신앙의 문제를 돌리게 되면, 결국 마지막 남는 과제는 ‘이 모든 사안이 인간이 해결해야만 하는 것’으로 귀착되게 된다. 겉으로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숙명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결국 마지막 남는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 되며, 한편 궁극적인 해답을 초월의 영역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만, 그 과정에 인간은 마지막 보루인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물론 신앙이라는 믿음체계는 ‘운명론’이나 ‘초월’의 경우에 있어서 다 작용한다. 차이는 운명론의 경우, 자칫 현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왜곡된 현실 자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반대로 초월의 경우, 임시적인 인간의 양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절대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을 기독교계시의 절대성을 강조한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의 ‘급진적 유일신론’이나 본회퍼와 같은 ‘제자도’의 신학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크게 보면 이원론이나 일원론 모두 이 땅의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은 제시하고 있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원론과 이원론의 한계, 즉 마지막 남는 과제가 인간적인 것으로 변질하게 되는 인간의 문제는 종종 모호한 입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의 문제는 삶, 범주, 또는 상황context, praxis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절대 배제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땅의 문제는 단순히 “무엇이 올바른가?”라는 정의definition의 문제가 아니라, 범주를 생략하지 않고,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 과정process에 대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 안에서, 삶의 범주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우리가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속적 과정으로서의 지금 발생하고 있는 ‘현실reality’이다. 이 현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생존하는 현재의 세계관에서 느끼는 ‘자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으며,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해석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은 자체가 그 방향을 스스로 정향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현실 자체가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자연론적 세계관은 현실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명론적인 한계를 내포하며,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미래의 세계관을 종말론적으로 받아들이면, 지금 현실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현실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지금 나의 ‘현실’을 이해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이것은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관이 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가능해질 때, ‘나’의 현실과 ‘나’라는 개체의 현실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할 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현실’은 윤리적으로 볼 때, 바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며, 나의 존재를 규정해주는 사실들인 ‘개체성’의 또 다른 개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적인 개념을 신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하여 볼 때, 하나님의 현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연관된다. 바로 이 문제를 성서는 창세기부터 일관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성서 전체에 걸쳐 신과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다. 특별히 성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현실을 다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현실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동시에 삶의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역사 속에 속해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는 모호하게 내버려둔 채 모든 문제를 과거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초월의 영역으로 돌리려 한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라는 하나님의 현실은 ‘역사 속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즉 구체적인 하나님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신학적 인식이나 신앙의 표현은 적합성을 가지지 못하며, 자신의 현실 또한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하나님이해가 전제된 신학과 더불어, 현실의 맥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신학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현실’을 따라야 한다. 이 하나님의 현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종말론적 지평의 확장으로서 ‘성령’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결국 보편적이고 통전적이며, 동시에 배타성과 특수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독교 윤리의 지평은 철저히 삼위일체의 관계성을 통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진리의 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에 대하여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삼위일체 관계성은 특히 인류 역사를 주장해 온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과 관계 맺고,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삶의 범주 안에서 일어난 ‘현실’로 여전히 우리에게 진리가 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현실’은 먼저 삼위일체 신학이 형성된 역사와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신학이 어떻게 기독교 윤리와 관계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삼위일체는 2~5세기 무렵에 정통교회의 교리로 확립된다. 현재의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신경(325)을 거쳐, 콘스탄티노플 신경(381)을 통해 확정되었다.
사도 요한의 죽음 이후를 교회사적으로 속사도 시대 또는 교부시대라고 일컫는데, 교부시대 초반부터 하나님을 언급하는 데에 삼위일체라는 용어trias가 사용되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 교회의 주교였던 데오빌로Theophilus였으며, 프랑스 리옹의 대주교 이레니우스Irenaeus는 190년경에 ‘한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 것으로 표현하였다.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공헌한 사람은 AD 3세기 초반의 터툴리안Turtullian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아들, 그리고 성령은 환경에 따라서 서로 다른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양태론이 이단적 신론임을 비판하면서, 최초로 라틴어 ‘trinitas’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하나님을 표현할 때,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라는 말을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 존재인 하나님에 내재된 삼위를 구별하기 위해, 라틴어 ‘persona’라는 개념을 적용하였다. 나아가 하나님의 단일성,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substantia’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삼위일체 신앙을 반대하는 여러 신앙운동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4세기 초반에 있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아리우스Arius 논쟁이 대표적이다. 아타시우스는 하나님은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데, 이 삼위는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고 강조하였다. 성부가 한 위로 계시고, 성자가 다른 위로 계시고, 성령이 또 다른 위로 계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한다.”고 그는 믿었다.
반면, 아리우스는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시작점이 없는 영원한 신’임을 주장하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된 피조물로 간주했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 삼위가 동일본질로 이해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물론 이 시기는 이미 삼위일체 교리가 정통으로 정립되어 가는 과정이었지만, 사실 역사 속에 성육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는 유일신론 신앙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 신앙에 큰 골칫거리였고, 당시 아리우스의 논리가 상당히 많은 부분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결국,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전통적 교회를 대변하는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사이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소집한다. 이 니케아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homoiousios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homoousios임’을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논지를 중지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사 본질에 불과하다면, 예수 또한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마저 구원 받아야 할 존재라면, 예수를 통해 구원받는 우리의 구원의 의미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에 의한 구원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과, 정통교회의 입장이 교회 전체의 입장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을 배경으로 몇 핵심적인 사안에 대하여 계속 살펴보기로 하자.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삼위일체’는 ‘삼위三位, three persons’와 ‘일체’라는 두 단어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삼위란 세 위격을 뜻하는데, 한자의 위位자는 人[사람]과 立[서다]이 결합된 말로, 위격person이라는 말 그 자체가 인격적인 개념이다. 위격person은 지정의知情意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인격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다. 그리고 일체一體는 하나의 통일체unity이자, 하나의 본체entity, 하나의 존재being를 의미한다.
종합하면, 삼위일체는 하나의 통일체 위에 존재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규정하거나 적용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정의하기 이전에, 기존의 잘못된 삼위일체 이해를 먼저 살펴보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된다.
먼저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나타난 잘못된 신론들에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표적으로 양태론modalism과 삼신론tritheism이 있으며, 이 두 사상은 소위 이단적 사상이라 규정될 수 있다. 양태론과 삼신론은 각각이 강조하는 중심이 다른데, 양태론은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삼신론은 세 위격의 구별성을 강조한다.
양태론자들은 하나님은 한 분으로 존재하면서, 세 가지 구별된 역할만을 가진다는 의미에서의 삼위일체를 믿는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성자 예수가 성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모순이다. 역할이라는 것은 비인격적인데 반해, 기도는 인격적 행위이며, 한 인격적 존재가 다른 인격적 존재에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인격이 자신의 인격에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 밤중에 달을 볼 때에, 하나님을 달이라고 한다면, 이 달이 호수에 비쳐진 달이 예수, 우리의 눈에 비쳐진 달이 성령이라는 것이 곧 양태론의 말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위격은 하나님이라는 본질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참 본질은 세 위격 모두가 각각 인격적 존재이면서, 그것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똑같은 하나의 존재라는 데에 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자리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과 이름을 가진다. 한 사람은 다양한 역할에 따라 입장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나님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양태론에 빠지는 것이다. 양태론은 실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양태론은 본체에 대한 개념은 정확할 수 있지만, 삼위의 구체적 위격의 문제에 대하여는 불분명하다. 양태론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주장은 확실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단지 본질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삼신론은 성부와 성자, 성령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세 신들로 구분한다. 즉, “성부도 하나님, 성자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시기에, 한 분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세 분의 하나님‘들’이 개별적인 존재로 분리되어 계신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제 1 텍스트인 성서는 일관되게 하나님이 한 분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삼신론은 성서의 증언과 대치된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유일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에, 삼위의 인격적 관계를 삼신three gods으로 나눌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래 삼위일체 개념은 각 위격이 인격적으로 존재하되, 이것이 통일적으로 연합됨을 말한다. 사실 기독교의 진정한 삼위일체 개념은 양태론과 삼신론 사이에 존재한다. 양태론이 삼위의 관계성을 너무 희미하게 만들었다면, 삼신론은 너무 삼위의 관계에 집중하여, 통일체로서의 존재를 거부한다. 진정한 삼위일체는 삼위의 관계성과 더불어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하나님 양 극단의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 구성된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의 통일체이다. 종종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삼위를 분리하여, 마치 세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각 위격을 따로 부를 때에는 사실상 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세 위격이 한 인격적 통일체이고 우리 입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되지만, 우리의 기도는 이 삼위 전체를 아우르는 본체를 향해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가 이같이 세 위격을 부를 때에, 삼위의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 위격마다 독특한 사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 위격은 분명히 서로 다른데, 이것이 한 하나님 안에 통일적이다. 대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름’은 ‘차별’로 바뀌고 곧 ‘폭력’이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세 위격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서로를 구분 짓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로 남아있다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으며, 삼위일체 관계성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이 점이 바로 기독교 윤리가 중시하여야 할 점인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신의 각 위격을 ‘person격’으로 해석했다. 반면에 칼 바르트는 ‘person’이 아니라 ‘mode’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설명한다. 초기 교부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셋 됨’을 제거하려는 단일신론자로 불린 군주론자들을 거부했다. 초대 기독교 이단 중 하나인 단일신론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차이점을 거부한다.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세 위격이 다르게 역사하신 차이점이 무시된다. 단일신론은 ‘Threeness’을 제거하고, 군주적monarchian인 이해를 정립함으로써, 하나님을 군주적인 존재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 논쟁은 기독교 초기의 상황처럼 해석에 따른 긴장감은 없다. 19세기 개신교에 있어서, 부분적으로는 슐라이어마허가 삼위일체교리를 자신의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에서 부록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성서 비평학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인해, 삼위일체교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삼위일체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세 가지 현시viewing일 뿐이며, 하나님은 이 세 가지 양상에 한해서 신앙인들에게 이해되며, 아울러 삼위일체 교리는 창조자이며 구원자, 그리고 성결자로인 하나님의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특별히 위에 잠깐 언급한 칼 바르트가 자신의 저서인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제1권에서 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의한 이후로, 이 의미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와 평가가 제기되어왔다. 현대 삼위일체에 대하여 제기되는 논의는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논쟁점들, 즉, 예를 들어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된 표면적인 이유가 되었던 “성령은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현된다.”는 주장에 대한 논쟁보다는 삼위일체 교리의 기본적인 의도와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충만함에 대한 근본적이며 구별적인 설명으로서 다시금 널리 인정되고 있다. 하나님의 현시는 근본적으로 삼중성을 내포하는데, 이것이 성부와 성자, 성령이라는 용어로 표시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대면한다. 하나님은 성자로서, 또는 영원한 말씀인 ‘진리’로 존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성부로서 이해되는데, 성부는 성자를 보내며, 성자는 성부를 가리킨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령으로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신앙으로 개방하도록 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전全 과정에 존재하는 분은 바로 같은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하나이며 동일하신 하나님을 지칭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드러내시는 특별한 형상과 내용을 가리키지 않고서는, 그리고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특별히 현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는 영역은 다음과 같다. ①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라는 신적인 행위의 구조 안에, 또는 성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관계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규명, ② 전통적인 표현에 대한 현재 가장 적절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특별히 ‘위격person’을 뜻하는 ‘persona’와 ‘hypostasis’라는 용어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개신교의 칼 바르트Karl Barth나 로마 가톨릭의 칼 라너Karl Rahner와 같은 일부 학자들에게 있어서 위격성의 현재적 개념은 ‘persona’의 옛 의미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상적인 어법에 있어서 세 위격person이라 말하는 것은 세 가지 의식consciousness 또는 주관성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하나님의 세 가지 인격과 신적인 지위를 의미하는 이러한 해석은 자칫 삼신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확증하려는 것이지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내적 충만함이나 복잡성을 지칭하며, 하나님을 부분으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며 충만한 연합체로서 유일성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르트의 경우처럼, 위격성이나 진정한 의식 내의 유일자와 존재의 양태에 있어서의 삼중성, 또는 칼 라너의 해석처럼, 존재의 특정한 방식 내에 존재하는 유일자, 즉 하나님의 존재 방식으로서 설명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어거스틴 이후로, 삼위일체에 대한 심리학적 유비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서구 전통에 더 일치하는 것 같다. 라너와 바르트는 모두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 주체라는 점을 고수하면서도 그 둘 모두 하나님 내의 인격적 관계성을 나타내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전통적 언어의 의도와 일치하며, 위격성은 상호주체적 관계성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현실성과 개별적 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실제로 하나로서 묘사될 수 있는 행위와 의식의 세 위격들, 또는 세 주체들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은 성육화된 성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를 두려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Pannenberg와 위르겐 몰트만Moltmann이 그러한 개념을 주장하는데, 몰트만은 삼신론과 유일신론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지으려고 하고, 그에게 있어서 유일신론은 근본적으로 군주적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웰치Claude Welch의 삼위일체에 관한 해석을 소개하였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나 논쟁을 간략히 정리한 이유는 새삼 그 이론을 다시 살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삼위일체 안에 형성된 ‘하나님의 현실’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기 위함이다. ‘삼위일체’는 자신에게 필요한 이론을 임의로 재단할 수 있는 어떤 요술지팡이가 아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사변에 깊이 파고들어가려고 하다보면, 이성과 지성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신학이 너무 사색적이며 사변적인 사고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본질이시면서 세 위격을 가지시지만, 하나의 존재, 하나의 실체이면서 세 현존이시다.”는 결론으로 통일된다. 하나의 실체라는 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은 동일하지만, 세 위격, 세 존재라는 것은 서로의 관계성을 통하여 각 위격 사이의 구별이 있으며, 그 위격 사이의 지위와 과제에 구별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세 위격은 차이가 있음에도 동일하다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에서 각 위격의 구별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러한 ‘차이’가 아니며, 전적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현존’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위격의 ‘구별’은 인간에게 ‘차별’이나 ‘다름’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신에게서는 그러한 구별이 없이 인간에게 ‘한 하나님’으로 여전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나타내는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하여서도 그 의미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존재성과 인간의 관계방식이 곧 기독교인의 표준canon이며, 그것이 곧 윤리이자 에토스ethos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을 전제한다고 할 때,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 인간과 관계된 사회적 조건들과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과 맺는 관계방식을 통하여 그 본래성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창조는 성부의 독특한 사역이다. 성자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셔서 사역을 감당하는 존재로서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이 땅에 나타나셔서incarnation, 온 존재를 위한 구원 및 대속의 사역에 있었다. 그리고 성자가 완성하신 구속 사역을 죄인들과 피조물에게 적용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역사 속에서, 이 세 위격의 특정한 사역이 존재하였다. 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가지 독특한 사역을 한 하나님에게 돌릴 수 있는가?”의 문제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사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기독교 윤리학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성령을 통해 모든 존재에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삼위일체의 기독교 윤리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방식’에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관계 방식은 인간의 관계 방식과 다르다. 이 관계방식은 철저히 자기 비움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다시 성령과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이 세 위격 사이의 관계성은 서로의 절대성을 고집하지 않으며, 서로 상호의 주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또 다른 위격을 위하여 비우는 관계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 독생자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은 다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진리의 영으로 이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는 절대 자기 비움과 같은 관계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질적으로 다르다. 자신과 자기집단의 가치와 원리를 절대시하여 여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은 자아의 나르시즘에서 헤어 나올 수 없으며, 자신의 절대성은 오히려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따라서 올바른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통하여 인간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자기 비움self-emptying의 관계성을 통하여 바람직한 윤리를 회복하여야만 하는 사명을 가지는 것이다.
필자는 삼위일체의 관계방식을 기독교 윤리학과 연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방식, 즉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존재하는 ‘타자성’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본다. 이 타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만이 인간의 전 존재에 새로운 전환이 일어난다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자’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고백을 통하여 새로 거듭나는 경험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신을 관념상의 지고하거나 초월적인 존재로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의 타자성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이 삼위일체는 신으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관계하는 존재방식이며, 동시에 그 위격을 통하여 인간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과 공동체가 지향하여야 할 공동체적인 ‘사랑’의 특성을 드러내 보이셨다.
삼위일체를 통한 하나님의 현존 방식은 인간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진리’과정이며, 동시에 사랑의 ‘과정’으로서 여전히 지금도 우리에게 새로운 진리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실재인 것이다. ‘하나님의 현실’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소통’하시기를 원하시며, 계속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에 근거한 기독교 윤리학은 그동안 목적론이나 의무론에 치우친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는 보다 바람직한 이론적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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