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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예체능계열 > 음악
· ISBN : 9788968491788
· 쪽수 : 242쪽
· 출판일 : 2015-01-26
책 소개
목차
한국 농악의 역사와 특징
제1장 농악의 역사와 현황 12
제2장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 농악의 특징과 의의 43
호남좌도농악의 갈래와 특성
제3장 호남좌도농악의 갈래론 62
제4장 호남좌도농악 음악가집단의 성격과 음악문화의 특성 90
호남좌도농악의 음악적 특징
제5장 언어학 모델에 의한 삼채 가락 분석 110
제6장 구례잔수농악 12채굿의 음악적 분석 124
제7장 호남좌도농악 호호굿 가락의 음악적 분석 141
제8장 농악의 무용동작과 음악가락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분석 155
제9장 금산농악 마치굿의 음악적 분석 171
호남좌도농악의 미래
제10장 구례잔수농악의 음악적 특징 182
제11장 호남여성농악의 활성화 방안 197
참고문헌 208
부록: 무형문화재 지정 농악 해설 214
영문초록 233
저자소개
책속에서
한국 농악의 역사와 특징
제1장 농악의 역사와 현황
농악(農樂)은 풍농을 기원하고 일 년의 액운을 막기 위해 제의를 행하고 고된 농사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연행하는 광범위한 문화행위를 포괄한다. 농악은 주로 풍물(굿), 풍장(굿), 두레(굿), 매구(‘山굿’)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단순히 ‘굿’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연행 주체나 목적에 따라 마을굿, 당산굿, 걸립굿, 판굿, 지신밟기, 마당밟이(뜰밟이), 난장굿 등이라고도 하며, 연행 시기에 따라 대보름굿, 백중굿, 호미씻이 등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농악을 ‘굿’이라고 부르고 세시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은 농악이 단순한 연희 혹은 놀이가 아니라 종교적 제의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농악은 주로 연말부터 정월 대보름에 연행한다. 특히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농악을 연행하는 지역이 많다. 이 외에도 농사를 마치는 시기에는 풍년을 감사하는 농악을 연행한다. 이렇게 농악은 벽사진경과 감사제라는 민중의 민간신앙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또한 농사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공동체적 신명으로 푸는 것도 농악의 중요한 기능이다. 이외에 사당패 등의 전문적 유랑연희집단들이 경제적 목적으로 농악을 공연하는 경우도 있다.
농악은 농민들이 제의 또는 노동의 일환으로 풍물을 치는 문화연행(cultural performance)이다. 문화연행은 전통적인 문화유산이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매체를 통해 조직되고 전승되는 현장이다(Singer 1958: 143). 농악을 문화연행이라 함은 농악이 1) 일정한 연행 시간 동안에 2) 연행의 시작과 종결이 뚜렷하고 3) 연행자와 관객이 존재하고, 4) 연행 공간과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농악은 우리나라의 문화구조(cultural structure)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규범적인 전거이자 문화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창(窓)”이다.
농악은 예전에는 주로 ‘굿’ 또는 이와 관련된 용어로 지칭했다. 이렇게 민중들의 생활의 현장용어로서 내관적(etic) 용어이던 ‘굿’을 나는 ‘농악(農樂)’이라는 학술용어이자 외관적(emic) 용어로 지칭하고자 한다. ‘굿’이라는 용어는 무당이 행하는 종교의례도 포함하는 것으로서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종교성을 띠는 의례를 일컫는 넓은 의미를 갖지만, 통상적으로 ‘무당굿’을 일컫는 학술용어로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이 연주하는 음악/무용’을 가리키는 협의의 학술용어로는 ‘농악’이라는 용어를 기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농악이 연행되는 문화적 맥락에 따라서는 ‘굿’ 또는 ‘굿가락’과 같이 현장용어를 쓰기도 한다.
1. 농악의 역사
1) 농악의 기원
농악의 기원에 대해 학계에서 자주 인용하는 기록이 중국인 진수(陳壽:233-297)가 3세기 무렵의 한반도 문화를 기록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한민족의 고대국가였던 부여(夫餘)ㆍ고구려ㆍ예(濊)ㆍ진한(辰韓) 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祭天)의식에 악가무(樂歌舞)가 어우러지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부여: 은력(殷歷) 정월에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국민들이 큰 모임(國中大會)을 열어 며칠씩 음식과 노래와 춤을 계속하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하였다. 이 때 미결된 옥사(獄事)들을 판결하여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군사(軍事)가 있을 때에도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소를 잡고 그 발톱을 봄으로써 길흉을 점쳤다.
고구려: 그들의 풍속에 음식 먹을 때엔 몹시 존절하나 주택은 유달리 치장하여 정침(正寢)의 좌우에는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하고,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을 받들었다. … 시월에는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온 나라가 대회를 열고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하였다. … 나라 동쪽에는 큰 동굴이 있는데 그 이름을 수혈(隧穴)이라 하였다. 시월 큰 모임에는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으로 돌아와서 높은 곳에 모시고 제사했는데 신좌(神座)에는 목수(木隧)를 모시었다.
예: 언제나 시월절(十月節)에는 천신에게 제사했는데 밤낮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니 그 이름을 무천(舞天)이라 하였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제사하였다.
진한: 오월에 씨 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했는데 군중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밤낮을 헤아리지 아니했다. 춤출 때엔 수 십 인이 함께 일어서서 서로 따르면서 땅을 디디며 손발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며 서로 장단을 맞추는 것이 탁무(鐸舞)와 비슷했다.
시월에 농사가 끝나면 또 이렇게 하였으며, 귀신을 믿되 나라마다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케 하고 그 이름을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또 모든 나라에 각기 별읍(別邑)을 두어 이름을 소도(蘇塗)라 하며, 긴 장대에다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받들었다. 모든 망명인이 이에 이르면 이를 반환시키지 아니했다.
위의 기록은 사실 농악뿐만 아니라 굿이나 민요 등 민족예술의 기원이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당시의 연행이 오늘날의 연행과 비슷한 형태였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 기록에서 당시 각종 타악기를 연주하고 가무를 연행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의식이 현재의 농악 의식과 같은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농악의 기원에 관해 농업노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이는 농사일을 할 때 농악패가 고된 노동의 어려움을 달래고 노동의 템포를 맞추기 위해 농악을 연행하는 두레굿으로 전승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도판 1-1>). 그러나 두레굿 형태의 농악이 발전한 것은 아마도 조선 후기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된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규모의 집단노동이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의 신명을 돋우기 위한 두레패의 음악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노동 현장뿐만 아니라 각종 의식이나 놀이에 두루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농업노동과 관련된 두레굿은 조선 후기 이후에 발전된 형태이기 때문에 농악의 궁극적인 기원을 두레굿에서 찾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이전부터 있었던 농악의 연행방식이 조선 후기에 농민들의 농업노동에 수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한편 농악의 기원에 관해 군대기원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 농악에는 군대와 관련된 용어와 연행이 많다. 농악패는 여러 모양의 진(陳)을 짜면서 연행하는데, 이것이 군대의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농악패의 기수가 드는 깃발도 군대의 깃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예전에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傳令)이 들고 다니던 영기(令旗)는 농악패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의물이다(<도판 1-2, 1-3, 1-4>). 농악패의 복장도 군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상모 또는 벙거지라고도 부르는 전립(戰笠)은 전통사회에서 군인이 쓰던 것이다(<도판 1-3, 1-4>). 또한 농악패의 악기도 군대와 관련된 것이다. 예전에 징은 군대가 전진할 때, 북은 후퇴할 때 알리는 악기였다. 농악패의 관악기인 나발은 군대의 신호용(signal) 악기로 쓰이던 것으로서 멀리까지 소리를 내서 사람을 모으거나 명령을 전달하는 악기로 연주하던 것이다. 새납도 예전에는 주로 군영에서 연주하던 악기로서 군대의 행진음악이었던 대취타(大吹打)에서 유일한 선율악기로 쓰인다. 나발과 새납은 1795년 정조대왕의 화성행궁을 기록한 『원항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행진이나(<도판 1-3>) 김홍도(金弘道, 1745-?)가 그린 <평생도>(<도판 1-4>) 등 18세기에 그려진 많은 도상자료에서 군영악기로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농악패에 남아있는 전통사회의 군대의 흔적은 농악패가 조선시대 군대의 음악문화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군대와 관련된 이들 악기들은 대개 고려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와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군영악대의 편제가 갖춰지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농악이 군대와 관련해 시작되었다면 군영악대의 악기편성은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에 형성된 것이고, 이것이 어느 시기에 농촌사회에 수용되어 농악이 발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언제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 역사 기록 속의 농악
조선 중기 이후 각종 기록에는 농악 연행과 관련된 각종 용어가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농악의 전통용어인 매귀, 걸립, 걸공 등의 용어를 한자로 기록했다.
<사료 1-1>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는데 이를 매귀유(埋鬼遊)라 한다.
埋鬼遊 每年正月望日 閭里之人建旗擊鼓 謂之埋鬼遊.
(『여지도서』(1757~65), 하권 「유보편」 경상도 항)
<사료 1-2>
매귀희(魅鬼戱)가 마을을 돌면서 쌀과 돈을 찾아 구하러 다니는 것을 또한 걸공(乞供)이라 부른다.
乞供: 魅鬼戱之流行村落 求索米錢者 亦名曰乞供.
(이옥, 『봉성문여』(1810?))
<사료 1-3>
흥국사 승려들이 걸공희(乞功戱)를 일삼았다.
興國寺僧徒乞功戱述卽事.
(오횡묵, 『여수총쇄록(麗水叢?錄)』)
<사료 1-1>은 국가에서 만든 지리지인 『여지도서(與地圖書)』(1757~65) 하권 「유보편」 경상도 항에 전하는 기록이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거행하는 축원농악을 ‘매귀를 하면서 노는 행위’라는 의미로 매귀유(埋鬼遊)라 했다. <사료 1-2>는 이옥(李鈺, 1760~1812)이 영남지방을 여행하고 적은 견문기(見聞記)인 『봉성문여(鳳城文餘)』(1810?)에 전하는 기록이다. 농악패를 ‘매귀로 노는 집단’이라는 의미로 매귀희(魅鬼戱)라 했고, 이들의 걸립행위를 걸공(乞供)이라 했다. <사료 1-3>은 고종 때 초대 여수군수를 지낸 오횡묵(吳宖默, 1834~ ?)이 1897년 5월부터 여수군수로 있으면서 적은 지방행정에 관한 기록인 『여수총쇄록(麗水叢?錄)』에 전하는 기록이다. 흥국사의 승려들의 걸립행위를 ‘걸공 놀이’라는 의미로 걸공희(乞功戱)라 했다. 이처럼 18세기 중반 무렵에는 축원농악이나 걸립농악이 존재했고, 이를 양반들은 ‘매귀’ 또는 ‘걸공’이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불교와 관련된 걸립은 18세기 이후의 풍속화에도 묘사되었다. 신윤복(申潤福, 1758~?)의 풍속화인 <노상탁발>에는 큰 법고를 길가에 세워두고 탁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도판 1-5>), 김준근(金俊根, ?~?)이 19세기 말에 그린 그림을 모은 『기산풍속도첩』에 실린 <굿중패>는 농악대와 무동을 갖춘 걸립승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도판 1-6>).
한편 ‘농악’이라는 용어는 1890년대의 각종 사료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양반들이 농민의 음악을 ‘농악(農樂)’이라는 한자로 적은 것은 이 용어가 일제강점기에 처음 쓰였다는 기존의 주장(김양기 1985: 89, 김원호 1999: 248)을 뒤엎는 것이다. 즉, ‘농악’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썼던 한자 용어이고, 이는 지금도 강원도에 남아있는 ‘농락(農樂)’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