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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

한국 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

이강래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20-02-20
  |  
35,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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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

책 정보

· 제목 : 한국 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역사학
· ISBN : 9788968496912
· 쪽수 : 528쪽

책 소개

한국 고대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주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하고 설명했는가를 탐색한 글들로 구성된 책이다.

목차

서장. 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삼국사기』 정보의 설명력을 토대로-
1. 경험과 인식의 거리 / 12
2. 정보와 설명의 층위 / 20
3. 편찬자의 인식 기반 / 28
4. 경험자의 설명 방식 / 36

1부 고대의 경험과 설명

1장. 경험 주체의 설명 방식에 대한 탐색
1. 기록의 층위 / 46
2. 표상된 역사 / 52
3. 경험과 기억 / 59
4. 정보와 설명 / 65

2장. 경험과 역사-고구려 멸망에 관한 고대적 사유를 단서로-
1. 경험 주체의 기억 / 72
2. 기록 주체의 선택 / 79
3. 인식 주체의 설명 / 87
4. 집단 전승의 동력 / 95

3장. 7세기 고구려 인식과 정통성의 문제
1. 논의의 전제 / 104
2. 7세기 고구려의 현상과 인식 / 110
3. 왕조의 멸망과 정통성의 문제 / 133
4. 명분과 실제 / 155

4장. 『삼국사기』의 ‘고구려 멸망’ 관련 사론의 맥락
1. 논의의 대상과 전제 / 160
2. 나라다운 나라의 조건 / 161
3. ‘大臣’과 ‘事君’의 문제 / 167
4. ‘才士’와 ‘大逆’의 분별 / 173
5. 문헌 정보의 속성과 한계 / 179
6. 고구려사 평의의 현재성 / 185

5장. 한국 고대 혼인에 보이는 財貨의 성격
1. 문제의 소재 : 신붓값과 지참금 / 192
2. 자료의 검토 : 동이전의 유기성 / 201
3. 혼인의 본질 : 사회경제적 토대 / 213
4. 재화의 성격 : 고구려사의 맥락 / 224

2부 고대의 정보와 인식

6장. 『삼국지』 동이전과 한국 고대사
1. 『삼국지』 동이전의 세계 / 238
2. 『삼국지』 동이전의 수용 방식 / 241
3. 『삼국지』와 『삼국사기』 / 246
4. 통합적 시각의 공유를 위하여 / 265

7장. 삼한의 인식 문제와 한국 고대사
1. 삼한 인식의 연원 / 268
2. 삼한 인식의 전제 / 274
3. 삼한 삼국 연계 인식 / 292
4. 삼한 인식과 발해사 / 309

8장. 한ㆍ중 사서에 보이는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 기록
1. 검토의 시각 / 324
2. 사실의 비교 / 334
3. 인식의 비교 / 365
4. 전승과 기억 / 386

9장. 7세기 이후 중국 사서의 한국 古代史像-통일기 신라를 중심으로-
1. 논의의 전제 / 394
2. 7세기 이후 중국 사서의 추이 / 397
3. 7세기의 한국 고대사상 / 409
4. 통일기의 신라사회상 / 422

10장. 백제사에 대한 후대의 인식
1. 백제 인식의 자료와 전제 / 442
2. 고려 전기의 백제 인식 / 451
3. 고려 후기의 백제 인식 / 467
4. 조선 전기의 백제 인식 / 484

참고문헌 / 504
찾아보기 / 520

저자소개

이강래 (옮긴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 한국 고대사 관련 기본 자료들의 성격과 형성 과정, 그리고 그를 통해 본 한국 고대 구성원들의 사유 방식 등, 주로 사학사적 맥락과 지성사적 관점에서 문헌 연구에 집중해 왔다. 대표적 저술로는 『삼국사기 전거론』(1996), 『삼국사기 형성론』(2007), 『삼국사기 인식론』(2011) 등 『삼국사기』에 대한 점층적 연구 성과 3부작과, 역주서 『삼국사기』Ⅰ・Ⅱ(1998) 및 교감서 『原本 三國史記』(1998)가 있다. 고대의 사태를 직접 경험한 이들의 정서와 사유를 중심에 두고자 한 최근의 저술로는 『『삼국사기』 읽기 : 고대의 경험과 중세의 인식』(2017), 『고대의 풍경과 사유 : 한국고대사의 경험과 인식』(2019), 『한국 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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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서장. 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삼국사기』 정보의 설명력을 토대로-

1. 경험과 인식의 거리

역사는 본디 경험의 기록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를 주요 구성 인자로 삼은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록물이다. 『삼국사기』가 담고 있는 삼국의 경험은 기원전 1세기에 시작하여 기원 후 10세기 30년대까지에 걸쳐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이 완료되었으므로, 신라 건국의 전말은 사건 당대로부터 1200년 뒤에야 기록으로 정착된 셈이다. 그리고 오늘의 독자들은 8백 수십 년 전의 기록을 매개로 2000여 년 전의 경험을 탐색한다. 이 점에서 『삼국사기』는 고대의 경험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이어 주는 통로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삼국사기』는 이미 12세기 중엽 고려 지식인들의 고대 인식이다. 천년을 상거한 고대의 경험 편들은 여러 실체적 매개물에 담겨 그들 앞에 놓였을 것이다. 편찬의 책임자 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 작업을 마치고 인종에게 보고하는 글[進三國史記表]에 의하면, 그들은 중국의 여러 문적들과 국내의 옛 기록들[古記]을 참조하였다. 다만 중국의 관련 문적들은 우리 고대 삼국의 사적을 외국의 일로 범주화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비록 『삼국사기』 편찬에 광범하게 활용되었으나, 끝내 중국인의 시각에 충실할 뿐이다.
대상을 향한 주체의 시각이 그의 인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중국의 문적보다는 국내의 전승물들이 한결 더 심중하게 음미되어야 한다. 물론 국내 전승물들이 구체적으로 편찬 과정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명료하지 않다. 연구자들은 『舊三國史』에서 유래한 것으로 판단되는 기록물을 비롯하여 여러 형태의 고유 정보들을 추적하고 분석한다. 그것들은 상대적이나마 삼국인들의 경험에 한 발 더 다가서 있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다. 그 매개물들이 다양할수록, 그리고 그 형성의 시점이 경험 당대에 근접할수록, 그를 통한 인식은 탄탄해진다.
이처럼 『삼국사기』는 12세기 중엽 고려 중기의 현실에서 고대를 응시한 결과물이다. 그곳에는 인식 주체의 현실, 즉 중세의 시각이 관류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고대의 경험과 정서에 직접 다가서려 하는 오늘의 독자에게는 회피할 수 없는, 혹은 넘어서야 할 차폐물이기도 하다. 중세의 시각과 그에 충실한 인식이란, 때때로 오늘날 독자의 인식과 충돌을 빚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가 들어서고자 하는 고대의 세계가 ‘경험된 과거’인 반면, 『삼국사기』가 독자에게 허용하는 세계는 끝내 ‘기록된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통로인 동시에 차폐물이라는 속성은 마치 빛이 분광기를 통과하면서 파장에 따라 나뉘는 현상으로 비유할 만하다. 고대의 경험은 『삼국사기』에 담겨 오늘의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경우 『삼국사기』가 편찬된 중세의 현실은 바로 그 고대의 원형이 통과하는 분광기와도 같다. 분광된 가시광선들은 본래의 빛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되 프리즘의 양변에서 그 맥락은 달라진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에 담긴 고대의 경험들 가운데는 고대의 현실에서 명백했던 의미가 실종된 채, 텍스트 가운데 맥락을 잃고 고립되거나 부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문제를 음미하기 위해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구려의 창국 직후 몇 가지 관찰 기록과 築城 정보를 거론해 보기로 한다.

2년(기원전 36) 여름 6월에 松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그 주인으로 봉하였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일러 ‘多勿’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3년 봄 3월에 황룡이 ?嶺에 나타났다.
3년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慶雲]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靑赤].
4년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7일 동안이나 물상의 빛깔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4년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이상 『삼국사기』 13 고구려본기 1, 동명성왕)

이에 따르면, 동명성왕은 건국한 지 2년째 되는 해 6월에 그들보다 먼저 정착해 있던 송양의 나라를 아울렀다. 이듬해 3월에 황룡이 골령에 출현하더니, 7월에는 골령 남쪽에 푸르고 붉은 빛을 띤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올랐다. 또다시 이듬해 여름에도 7일 동안이나 구름과 안개가 사물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고 깊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7월에 고구려는 비로소 신생 왕조의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한다. 그러므로 이 기사들은 일견 고구려 건국 주체들의 경험과 관찰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만 그 가운데 황룡의 출현과 7일간 이어진 운무의 당대적 혹은 현장적 의미는 모호하다. 골령 남쪽에서 일어난 구름이 왜 祥瑞인지도 짐작하기가 어렵다.
반면에, 인용한 기사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은 명료하다. 발단은 기원전 36년 6월 송양의 나라를 병합한 사건이며, 종결부는 그 2년 뒤 7월 왕성과 왕궁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송양국의 병합은 외래 유입 집단으로서 주몽 세력이 정착 이후 거둔 최초의 대외적이자 영토적인 성과이며, 신생 정치체로서 고구려의 국가적 지향과 성장에 중대한 토대였다. 성곽의 축조와 궁실의 조영 또한 王者가 피지배집단과 ‘섞여 거주[雜居]’하지 않고 위계와 기능에서 손색없는 왕성과 왕궁을 건조한 것이었으므로, 건국기 고구려사의 지표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전ㆍ후의 두 사건 기사는 고구려 국가사의 긴요한 사실 정보이다. 연구자들은 이들 기사를 주목하고 음미하여 고구려 초기 역사의 추이를 헤아린다. 그와는 달리 두 사건 사이에 개재해 있는 황룡과 구름과 운무는 그 자체의 의미가 모호한 동시에, 그들 사이의 연관도 쉽사리 착안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정보들을 단순히 기록자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경험자의 관찰과 정서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행히 위의 분절된 정보들에 함축되어 있을 게 분명한 유기적 호응의 단서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맥락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 경험 정보들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부분적이나마 계기적 사건으로서의 자질을 획득하고 있다.

[서쪽을 순행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얻었는데 蟹原에 거꾸로 달아매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 비류왕의 도읍을 표몰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이 곤란을 면하려거든 네가 하늘에 호소하라”라고 하였다. 그 사슴이 슬피 울어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맛비가 7일 동안 퍼부어 송양의 도읍을 표몰시켰다. 송양왕이 갈대 밧줄을 물의 흐름에 가로 걸쳐 두고 오리 말[鴨馬]에 올라탔으며 백성들은 모두 그 밧줄을 잡고 있었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긋자 물이 곧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와 항복하였다 한다.]

그윽한 구름이 골령을 덮어 玄雲冪?嶺
연이은 산조차 보이지 않고 不見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어서 有人數千許
나무 베는 소리와 방불한데 ?木聲??
왕께서는 하늘이 나를 위해 王曰天爲我
저곳에 성을 쌓는다 하시매 築城於其趾
홀연히 운무가 걷히고 나니 忽然雲霧散
궁궐이 올연히 솟아 있구나 宮闕高?嵬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들의 소리가 토목 공사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왕께서는 “하늘이 나를 위해 성을 쌓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절로 걷히자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이 皇天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 (이상 『東國李相國全集』 3 古律詩, ?東明王篇?)

골령, 구름, 그리고 물색을 분별할 수 없는 운무와 우뚝 솟은 성 등으로 빚어낸 서사시의 일부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파편적 정보들에 일목요연한 맥락을 부여하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시적 형상의 근거가 된 이른바 『구삼국사』의 관련 정보가 운문 형태 본문의 앞과 뒤에 분주 형태로 소개되었다. 특히 둘째 분주에는 사태의 시점과 시간으로 ‘7월’과 ‘7일’이 제시되어 있다. 요컨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동명왕편의 위 대목은 골령, 경운-현운, 운무, 7월, 7일, 궁성, 황룡-황천 등 주요 표식들이 빠짐없이 서로 조응한다. 이로써 『삼국사기』 동명성왕의 재위 3년 3월부터 4년 7월에 걸친 네 개의 분절된 정보는 일관된 인과적 맥락을 획득하게 되었다.
앞의 분주에 보이듯이, 애초에 송양왕의 항복부터가 이미 하늘이 개입한 7일 간의 폭우 결과였다. 뒤이어 하늘은 골령 기슭을 운무로 감추고 7일 만에 궁궐을 완성해 주었다. ?동명왕편?의 문의는 송양의 항복과 고구려 성궐의 완성이, 일견 같은 해일 수도 있는 6월과 7월 사이에 하늘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두 사건이 2년 전 6월과 2년 뒤 7월의 일이라 하였다. 설령 ?동명왕편?의 6월과 7월이 같은 해가 아니라 해도, 적어도 골령의 구름에서 발단하여 궁성의 축조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는 7월 중에 연속된 일이었다. 『삼국사기』 서술자도 골령의 구름과 궁성 축조는, 비록 해를 달리하면서도, 7월의 일이었다 한다. 결국 동명성왕 재위 4년 4월의 운무 정보는 그만 앞뒤의 정보와 연결점을 잃고 만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의 서술 시차는 50여 년에 불과하지만, 두 책의 인식, 혹은 서술 방식의 차이가 가볍지 않다. 경험된 과거는 경험 당대의 현실에서 일단 고유하다. 차이는 오직 인식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기록된 과거는 인식 주체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지금 살펴본 축성 기사의 경우 과연 『삼국사기』 찬술자가 사건의 본래 구조를 무모하게 해체한 것인가? 아니면 동명왕의 신성한 창국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한 시인의 상상력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절된 정보 편들에 자의적으로 단일한 맥락을 부여한 것인가? 또한 『삼국사기』의 ‘다물’과 ‘황룡’이 ?동명왕편?에 없는 것은 구성 자료의 차이에서 유래하는가, 서사 구조에 긴요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작자가 배제한 결과인가?
여하튼 동명왕의 치세 기록 가운데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라고 한 정보는 이제 전후의 의미 맥락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특정 시공간에서 펼쳐진 푸르고 붉은 구름이란 대개 태양의 고도와 지평선에 근접한 層雲이나 積雲의 상태에 따른 형용일 것이다. 그 자체는 범상한 관찰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그 구름은, 하늘의 의지를 매개하는 황룡이 출현한 데다가 하늘의 아들이 거처할 왕궁이 세워지는, 바로 그 골령에 서렸기 때문에 ‘慶雲’이 된다. 붉고 푸른, 찬연한 층상의 구름은 솟아오르는 궁궐의 수직성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형용의 구름은 얼마간 특이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일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 백제와 신라에서도 관찰되었다.

? 고이왕 26년(259) 가을 9월에 푸르고 자줏빛 도는 구름[靑紫雲]이 궁궐 동쪽에서 피어올랐는데 마치 누각과 같았다. (『삼국사기』 24 백제본기 2)
? 실성이사금 12년(413) 가을 8월에 구름이 狼山에서 일어났는데, 멀리서 보면 누각같이 생겼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필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복 받은 땅이로다”라고 하여, 이후로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공교롭게도 백제의 구름 역시 ‘푸르고 자줏빛 도는’ 형상이었다. 더구나 관찰자는 구름이 마치 누각과 같았다고 한다. 성곽과 누대의 豫兆였을 고구려 골령의 푸르고 붉은 구름과 유사했던 것이다. 게다가 신라에서는 향기마저 자욱한 누각 형용의 구름이 일었다. 백제와 신라의 사례는 고구려 골령의 구름이 궁성 축조의 예조였으리라는 이해를 효과적으로 지지한다. 특히 신라 낭산의 누각형 구름은, 그 땅이 신선이 강림하여 노니는 福地임을 알리는 징후로 해석되었다. 만약 위의 기록처럼 실성이사금이 그 징후의 타당한 해석자였다면, 그 해석은 곧 이른바 ‘경험 당대의 인식’인 셈이다.
그러나 방향을 달리해 보면, 낭산의 구름에 대한 신라 왕의 해석은 골령의 구름을 문득 ‘慶雲’이라고 했던 고구려본기 기사의 생경함과 상통한다. 게다가 왕의 이 해석은 뜻밖에도 벌목 금지령의 근거가 되어, 당시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당혹케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아연 신라의 정치 현상과 실성이사금의 통치 방식에 대한 隱微한 단서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낭산에 서린 구름의 정보 가치는 파악할 길이 막막하다. 마찬가지로 백제의 구름 기사에도, 관찰자나 기록자의 평가나 정서가 담겨 있지 않거나 깊이 은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누각형 구름 기사에는 길-흉과 성-속과 귀-천의 대응 관계에서 하나의 일관된 경향이 관류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땅히 주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이 만약 당대인들의 가치와 인식을 반영하는 어떤 것이라면, 이는 이른바 고대의 보편적 사유 방식이라고 이를 만한 것이겠다.
다시 말해 누각형 구름의 출현은 고대의 관찰자들에게 공통의 해석 혹은 인식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경험자나 기록자의 특정 인식이 수반되지 않은 백제의 구름에 대해서도, 고구려와 신라의 구름을 둘러싼 해석과 의미부여 방식을 원용하여 헤아려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은 일종의 ‘유형[pattern]’은 『삼국사기』의 정보들 가운데 광범하게 산재되어 있다. 한 예로 신라의 조분이사금과 자비마립간, 그리고 백제의 아신왕은 공교롭게도 허공에 ‘피륙을 편 듯한[如匹練]’ 흰 기운이나 붉은 빛이 나타난 얼마 후거나 그 이듬해에 훙거하였다.

? 조분이사금 17년(246) 겨울 10월에 동남방 하늘에 흰 기운이 피륙을 편 듯[如匹練] 뻗쳤다. 18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2 신라본기 2)
? 자비마립간 21년(478) 봄 2월 밤에 붉은 빛이 피륙을 편 듯[如匹練] 땅에서 하늘까지 뻗쳤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22년 봄 2월 3일에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 아신왕 14년(405) 봄 3월에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피륙을 편 듯하였다[如匹練].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25 백제본기 3)

위의 사례에서 ‘如匹練’은 왕의 죽음에 대한 예조의 기능을 하고 있다. 단일한 형태와 방식은 아니지만, 王者의 죽음은 거의 대부분 일탈적 현상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수반하였다. 신라의 경우 혁거세거서간, 유리이사금, 소지마립간, 경덕왕, 경문왕 등이 왕성의 우물에 용이 나타난 다음 머지않아 薨去하였다. 실성이사금과 진평왕과 태종무열왕의 훙거에서도 우물물의 변고가 먼저 나타났다. 탈해이사금, 파사이사금, 일성이사금, 벌휴이사금, 눌지마립간, 진덕왕의 훙거에 앞서서는, 일부 화재와 벼락이 발생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성궐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自毁].
그런데 백제 비유왕도 흑룡이 한강에 출몰한 다음 곧바로 죽었다. 고구려 문자명왕 역시 왕궁 남문이 저절로 무너진 이듬해에 죽었다. 그러므로 신라 왕들의 죽음에 앞서 우물 공간에 출현한 용과 변고, 그리고 무너지는 성문 등은 고대국가 왕들의 죽음을 포괄하는 보편적 현상이나 인자로 간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동질적 경험과, 그에 짝하는 유형화된 관찰과 사건들의 사례는 『삼국사기』에서 허다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 빈도가 반드시 두 사건 사이의 인과적 연관을 직접 지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고대적 현실 즉 경험자의 진실은, 중세의 기록 주체나 그 기록을 매개로 사유하는 우리의 인식 가운데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

2. 정보와 설명의 층위

인식 주체가 그 의미를 포착하는가 못하는가의 여부와, 기록된 정보가 과연 경험 당대의 진실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기준은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크게 보아 『삼국사기』의 정보들은 이미 고대의 경험에 대한 유력한 설명의 자질을 획득한 것들이다.
진평왕 재위 36년(614)에, “永興寺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 되어 비구니가 된 진흥왕의 왕비가 죽었다.” 신라본기의 이 기사는 영흥사의 소조불상이 저절로 무너져 내린 사건과, 진흥왕의 비가 죽은 사건으로 구성되었다. 즉 독립된 두 사건 정보가 각각 인과의 요소로 엮여 하나의 설명이 된 경우다. 그녀는 일찍이 진흥왕의 捨身을 본받아 영흥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불상의 ‘저절로 무너짐[自壞]’이란 왕의 죽음에 앞서 성문의 ‘저절로 무너짐[自毁]’과 그 의미 맥락이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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