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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이조 우리고전 읽기 007)

박지원, 이경애 (지은이)
홍신문화사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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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열하일기 (일석이조 우리고전 읽기 007)
· 분류 : 국내도서 > 고전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88970551661
· 쪽수 : 196쪽
· 출판일 : 2008-10-30

책 소개

'일석이조 우리고전 읽기' 시리즈의 7권. <열하일기>를 읽으며 한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엮었다.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 4년) 박지원이 청나라 고종의 칠순잔치를 축하하러 가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쓴 중국 기행문집이다.

목차

머리말
이 책의 특징 및 구성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
십리하에서 소흑산까지(성경잡지)
신광녕에서 산해관까지(일신수필)
산해관에서 연경까지(관내정사)
열하로 가는 길(막북행정록)
태학에 머물다(태학유관록)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환연도중록)
부록

저자소개

박지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실학자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 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반당 자격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고희연을 치르는 바람에 조선 사신 역사상 처음으로 열하에 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여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지향했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아들이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는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50여 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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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50년 부산 출생. 계림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을 시작으로 출판사 편집부에서 오랫동안 기획 및 편집작업을 했다. <그들의 문학과 생애>, <춘추좌전> 등의 교정작업을 비롯하여, <논술세계명작>, <글로리아 위인전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는 <일석이조 우리고전 읽기> 시리즈를 기획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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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때 시냇가에서 다투는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말소리가 마치 새가 지저귀는 듯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급히 가서 보니, 득룡이 되놈들과 예물의 많고 적음을 다투고 있었다.
대개 예단을 나누어 줄 때면 반드시 전례를 따라 그대로 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봉황성의 교활한 청인 관리들은 반드시 무슨 꼬투리를 잡아 한 가지라도 더 빼앗으려고 기를 썼다. 이런 일을 잘 처리하고 못하고는 순전히 *상판사의 마두에게 달린 것이다. 만일 그가 일에 서툰 풋내기라든지, 중국말을 제대로 못한다든지 하면, 그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년에 이렇게 했다 하면 내년에는 벌써 그것이 전례가 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전례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사신들은 이와 같은 내막을 모르고 오직 책문 안으로 들어가기에만 급하여 자꾸만 역관을 재촉하고 또 역관은 마두를 재촉하여, 그 폐단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 35~36페이지


열하(熱河)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사냥을 즐겼던 휴양지다. 온천이 많아 강물이 얼지 않는다고 해서 열하라고 부른다.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내몽고 지역에 있다. 열하는 처음 여행 일정에는 없었다. 그러나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가 열하에 머물러 있는 바람에 그곳까지 가게 된 것이다. 한양에서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까지 가는 데는 한 달 보름 정도가 걸린다. 그 거리는 무려 4천 리, 1천 6백 킬로미터나 된다.
‥‥‥‥‥‥‥ 29페이지


우리나라는 명나라를 2백 년 동안 섬기며 충성하기를 한결같이 했다. 비록 속국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한 나라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당하고(명나라의 멸망을 가리킨다.), 온 백성이 머리를 깎아서 모두 오랑캐가 되고 말았다. 대륙의 한쪽 구석에 있던 우리나라는 다행히 이런 수치를 면할 수 있었지만, 중국을 위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청나라에는 성곽과 궁궐과 백성 등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으며, 훌륭한 가문과 학문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이후의 성스럽고 지혜로운 임금과 한나라·당나라·송나라·명나라의 좋은 법률과 아름다운 제도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저들은 오랑캐일망정 중국 문물의 훌륭함을 잘 알고 있어서, 곧장 이를 빼앗아 차지했다. 그래서 이제는 중국의 문물이 마치 그들 만주족이 본래부터 지녔던 것처럼 되기에 이른 것이다.
천하를 위하는 것은,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취하여 본받아야 한다.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고 한 것은,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혔던 것을 분하게 여겨 본받을 만한 좋은 점마저 물리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그들이 중국에 영향을 미친 부분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어리석고 융통성 없는 풍속부터 개혁시켜야 한다. 밭을 가는 법이나 누에를 치는 법, 그릇을 굽는 법이나 풀무를 부는 법에서부터 공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풍성하게 하는 것까지 모두 배워야 한다.
‥‥‥‥‥‥‥ 87~8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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