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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2757184
· 쪽수 : 312쪽
책 소개
목차
타락
작품해설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이전의 사태가 목전의 사태에 지배되어 까맣게 잊히는 것.
산은 그날 이전의 세상이 그날 이후의 세상에 지배되어 시나브로 사라지는 사태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쁠 거 없다고 중얼거렸다. 산은 지금 여기, 이니와 함께, 명료한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아무 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지내는 이니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산과 함께였으므로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싶으면 음악을 듣고 키위 주스가 먹고 싶으면 키위 주스를 만들었다. 이니의 목덜미에 코끝을 대고 싶으면 산은 그렇게 했고 산의 등에 자기 등을 기대고 싶으면 이니는 그렇게 했다. 텃밭 가장자리에 나란히 쪼그려 않아 게처럼 옆으로 움직이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가까운 상점에서 양고기 케밥을 사다가 먹었다. 맥주는 인도인 가게에서 네덜란드 제품을 샀다. 언제나 남기지 않을 만큼 샀으나 남으면 버렸다.
늙음도 죽음도 없어서 다가올 미래 따위 준비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산과 이니는 보내고 맞았다.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아침마다 산과 이니가 확인하는 것이었다.
섹스라는 것으로는 두 사람의 소진 행위를 설명할 수 없었다. 둘 사이의 완강한 침묵도 그 때문이었다. 설명할 수 없음. 다만 끝없음, 몸 안에 돋는 생체의 기운을 끝없이 지워나가는 것, 깊고 어두운 음부의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무기력해지는 것, 미래라든가 꿈 따위와 영원히 단절하는 것, 한없이 게을러지고 지저분해지는 것. 아둔하고 어눌하며 더럽고 추해지는 것, 그리되도록 노력하지는 않으나 그리되지 않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 것, 그것이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의 정체라는 걸, 산과 이니는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