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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24185155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6-05-20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짐작한 것과 달리 외래 진료실의 업무는 고되었다. 하루에 백여 명의 환자를 스치듯 만났기에 여러 번 본 환자의 얼굴과 이름도 익히기 어려웠다.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교대 근무가 아닌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일상은 딴 생각할 틈을 주었고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삶을 새로이 시작해보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배경을 전부 바꾸어버리고 싶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
태어나면서부터 실체를 알 수 없는,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에 놓여본 사람은 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렴풋한 뉘앙스를 감각하게 된다는 것을. 찝찝하게 느껴진 단서들이 불현듯 각을 세우며 맞춰지는데, 나는 아홉 살 때 그러한 순간을 맞이했다. 악몽에서 깨어나 안방으로 가다가 엄마가 흐느끼는 소릴 들었다. 방문을 여는 대신 한쪽 귀를 대어보았다.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내 방으로 가려는데 유경이, 하고 엄마가 이름을 말했다. 그래, 유경이. 아빠가 답했다. 순간 깨달았다. 책상 밑 벽지의 그림과 문가의 키 표시는 유경의 것임을. 그렇다는 걸 내가 모르게 하려고 두 사람이 무진 애쓰고 있다는 것을.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에 다다랐을 즈음 감은 눈꺼풀 아래로 작은 빛들이 나타났다. 어둠으로 가득 찬 반구 천장에 작은 점 여러 개가 뚫려 있고 그곳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점처럼 작은 구멍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고 마침내 반구 형태는 사라졌다.
작은 빛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내게로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숫자 세는 것을 잊었다. 집중하려는 노력 또한 잊어버렸다. 그저 작은 빛들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것들이 만드는 환함 속에 나를 위치시키려 했다. 작은 빛들이 무리를 이루어 한쪽으로 흘러가더니 나를 에워쌌다. 작고 가벼워진 내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
내가 내뱉는 탄성이 다른 사람의 것인 듯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