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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불교 > 불교명상/수행
· ISBN : 9788974799229
· 쪽수 : 428쪽
책 소개
목차
001 믿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002 종교는 믿는 것인가, 아는 것인가?
003 종교를 믿는 이유는?
004 신앙에도 질적 차이가 있는가?
005 불교에서 믿음의 의미와 대상은?
006 불교신앙은 기복(祈福)인가?
007 불교는 자력신앙인가, 타력신앙인가?
008 불교는 자력신앙이라고 하는데, 정토신앙은 타력신앙이 아닌가?
009 불교에 신앙의 대상이 많은 이유는?
010 불탑을 신앙하는 이유는?
011 왜 아미타신앙인가?
012 미륵은 왜 희망의 아이콘인가?
013 관음보살은 어떻게 자비의 화신이 되었나?
014 지장보살의 욕구 거스르기
015 솔직 당당한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
016 행원(行願)의 화신, 보현보살
017 책임과 권위의 상징, 약사여래
018 호국신앙이란?
019 왜 붓다의 자식[佛子]인가?
020 신앙은 선택이다
021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022 ‘신’이 종교의 본질인가?
023 불교는 인간의 종교다
024 붓다 빌딩 바로 보기
025 근본불교란 무엇인가?
026 연기의 진리, 그리고 사랑
027 연기적 사유(思惟)와 인간의 책임
028 12연기, 인간의 실존
029 고통의 길[流轉緣起], 행복의 길[還滅緣起]
030 무상(無常), 긍정과 사랑의 에너지
031 무아(無我), 자유와 사랑의 길
032 괴로움이 왜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인가?
033 참을 수 없는 집착의 무거움[集聖諦]
034 마음이 현실을 받아들일 때[滅聖諦]
035 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방법[八正道]
036 붓다의 마지막 유훈은?
037 불교는 왜 분열되었나?
038 경전 탄생의 비밀
039 부파불교, 학문적이고 관념적인
040 부파불교를 소승이라 부르는 까닭은?
041 대승불교를 일으킨 주역은?
042 대승불교는 이단인가?
043 대승경전은 붓다의 말씀이 아닌가?
044 업(業), 숙명 아닌 자유의지
045 윤회(輪廻),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046 대승 초기에 공(空)사상이 유행한 이유는?
047 대승에서는 번뇌가 보리라고?
048 대승불교에서 불상의 의미는?
049 불성과 여래장, 불교 휴머니즘
050 유식(唯識), 오직 마음뿐인가?
051 밀교(密敎), 왜 비밀스런 가르침인가?
052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한 이유는?
053 격의(格義), 중국인의 불교 이해 방식
054 교판(敎判), 경전에 가격 매기기
055 천태법화(天台法華),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
056 화엄(華嚴), 모두가 꽃이다
057 선(禪),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058 한국불교, 회통(會通)과 비빔밥
059 마음[禪]과 언어[敎]가 만나면?
060 원불교는 불교인가?
061 붓다의 시행착오
062 붓다를 깨침으로 이끈 수행은?
063 위빠사나의 원리와 실존적 의미
064 삼학(三學), 수행인가 자성(自性)인가?
065 계율, 깨침을 향한 첫 걸음
066 육식, 파계인가?
067 백골관, 무상과 무아 체험
068 참회, 미래를 창조하는 에너지
069 바라밀, 피안(彼岸)에 이르는 길
070 보시, 자선인가 수행인가?
071 인욕, 인내인가 평정인가?
072 정진에도 중도가 필요하다
073 사섭법(四攝法), 중생 끌어당기기
074 사무량심(四無量心), 이웃을 내 몸처럼
075 이입사행(二入四行), 진리에 이르는 두 길
076 간화(看話), 말머리를 본다는 것
077 지관(止觀), 멈추니까 보이더라
078 묵조(墨照), 조용히 관조할 뿐
079 염불(念佛), 현재의 마음이 부처
080 염불과 선의 만남
081 절 수행, 아상 소멸 프로젝트
082 주력(呪力) 수행이란?
083 사경(寫經), 경전을 사색하는 시간
084 공양도 수행이다
085 일상 모두가 수행
086 붓다의 깨침, 그 실존적 의미는?
087 깨침, 언어의 길이 끊어진 체험인가?
088 지정의(知情意)로 본 붓다의 깨침
089 열반의 네 가지 모습[涅槃四德]
090 깨침에 이르는 네 단계[四果]
091 아라한이 몽정을 한다면?
092 보살이란?
093 보살은 무엇으로 사는가?
094 보리심(菩提心)을 향하여
095 유식의 깨침 5단계[位]
096 화엄의 깨침 52단계[位]
097 깨침, 순간[頓]인가 점차[漸]인가?
098 돈오(頓悟)란 무엇인가?
099 돈오, 완성인가 미완인가?
100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양립 가능한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 육식이 계율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조건만 갖추면 고기는 먹어도 되는 음식이었다. 그 조건이란 동물을 잡는 모습을 눈으로 보지 않고[不見], 나를 위해 잡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며[不聞], 나를 위해 잡았다고 의심되지 않는[不疑]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삼종정육(三種淨肉)이라 하는데,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청정한 음식이면 먹어도 좋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붓다가 육식을 허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출가한 사문에게 걸식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었지만 하심(下心), 즉 자신을 낮추는 중요한 수행이기도 하였다. 얻어먹는 사람이 어떻게 우쭐하는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상대가 주는 음식이 고기인지 아닌지, 맛이 있는지 없는지 가리지 않고 그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붓다에게 육식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붓다의 사촌인 데바닷타였다. 그는 평생을 붓다에 대한 콤플렉스로 고통 받으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세 번에 걸쳐 붓다를 죽이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하였다. 그가 바로 붓다에게 육식을 금하고 이를 어길 경우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한때 승단이 분열되기도 했지만, 붓다는 데바닷타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수행자 각자의 판단에 따라 보고[見] 듣고[聞] 의심스러운[疑] 고기가 아니라면 먹어도 좋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육식, 파계인가?」 중
염불의 목적이 서방정토에 태어나는 것이라면, 이는 자력적(自力的)인 근본불교와는 많이 다르다. 스스로 수행해서 깨침에 이르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달리 염불은 절대 타자, 즉 아미타불의 힘에 의존한 타력적(他力的) 신앙이라는 뜻이다. 흔히 정토신앙에서는 깨침에 이르는 방법으로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 두 길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 수행을 통해 깨침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길이라면, 염불은 쉽고도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에게 귀의하기만 하면 극락왕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의 48대 서원에서도 “어떠한 중생이라도 지극한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열 번만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타력적인 측면 때문에 염불을 가볍게 보는 시선도 없지 않은데, 이는 큰 오해다. 염불의 대상이 석가모니불이든 아미타불이든 관계없이 그분들의 명호를 오직 일념으로 부르다 보면 어느새 모든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마음이 청정해진다. 그렇게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모두 사라지면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간화선을 통해 깨침에 이른 여러 선사들이 염불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염불, 현재의 마음이 부처」 중
불교는 앎의 철학이자 삶의 종교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불교 역시 인문학의 근본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알고 있다. 바로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신과 진리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붓다의 유훈인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속에 담긴 실존적 의미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한마디로 주인공으로서 무상한 삶을 멋지게 살라는 뜻이다. 『불교에 대해 꼭 알아야 할 100가지』 역시 인문학의 근본 물음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불교적 해답을 모색하고 있는 책이다.
「에필로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