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고대사
· ISBN : 9788977661417
· 쪽수 : 552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서론
1부 자유
1. 한 사람, 하나의 비전 (기원전 483년)
“나는 하프나 리르를 탈 줄은 모르지만, 작은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법은 알고 있습니다.”
2. 함대 건설 (기원전 483~481년)
삼단노선 100척을 한꺼번에 건조하는 일은,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이나 감당할 수 있는 대역사였다.
3. 목재 담장 (기원전 481~480년)
“설령 아티카 안의 모든 것을 빼앗긴다 해도, 제우스 신께서는 아테나 여신에게 목재 담장을 주실 것이로다.”
4. 통로를 막아라 (기원전 480년 여름)
페르시아 제국에 맞선 테르모필라이의 저항으로 그리스군에서는 최초의 영웅적인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5.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 여름의 끝)
아테네의 미래, 아니 어쩌면 그리스의 자유는 크세르크세스의 반응을 테미스토클레스가 얼마나 정확히 예측했느냐에 달려 있었다.
2부 민주주의
6. 그들만의 리그 (기원전 479~463년)
아테네는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그들은 도시를 처음부터 다시 재건해야 했다.
7. 끝없는 야망 (기원전 462~446년)
“이들은 키프로스, 이집트, 페니키아, 하일레이스에서 같은 해에 전몰한 사람들이다.”
8. 아테네 황금기의 선원들 (기원전 5세기 중엽)
그들은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폭넓은 시각을 갖고, 위험에 직면하여 악전고투한 끝에 동료들과 무사히 귀환한 그 시대의 오디세우스였다.
3부 제국
9. 아테네 제국의 해군 (기원전 446~433년)
“만일 아테네가 점증하는 크세르크세스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나라를 포기했거나 혹은 그리스에 머문 채로 페르시아에 항복했다면…….”
10. 전쟁과 역병 (기원전 433~430년)
아테네인들에게는 모든 일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알고 보면 피레우스에는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1. 행운은 용감한 사람 편이다 (기원전 430~428년)
“강대했던 나라가 훗날 작은 나라에 패하는 것은 기술과 용기의 부족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12. 희극의 탈, 지휘관의 탈 (기원전 428~421년)
클레온은 페리클레스와 같은‘ 민중의 지도자’로 행세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보다 더 비민주적인 사람도 없었다.
13. 시칠리아 원정 (기원전 415~413년)
그들은 선발 함대와 조우한 뒤에야, 최악의 적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거대 병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부 재앙
14. 악당의 귀환 (기원전 412~407년)
“아테네인들은 그에 대해 애증의 감정을 갖고 있다. 같이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그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15. 영웅과 사약 (기원전 407~406년)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돈으로 사들인 최고의 노잡이들과, 기병·평민·재류 외국인·해방 노예들로 구성된 아테네 선원들 간의 해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6. 하데스의 궁전으로 (기원전 405~399년)
“피레우스에서 시작된 사람들의 통곡 소리는 장성을 따라 퍼져 나가다 이내 도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5부 부활
17. 횃불을 넘기며 (기원전 397~371년)
제2차 해상 동맹 헌장에는 새로운 진보주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다.
18. 아틀란티스의 삼단노선들 (기원전 370~354년)
아테네는 실패도 자주 겪고 그것으로부터 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치욕은 낯설었다.
19. 해군의 대변자 (기원전 354~339년)
“무모한 제안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것은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고, 그에 대한 심판자는 바로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20. 마케도니아의 그늘에 가려 (기원전 339~324년)
알렉산드로스는 부친의 군대와 더불어 동방을 정복하려고 한 그의 꿈도 함께 물려받았다.
21. 최후의 전투 (기원전 324~322년)
“아테네인들은 목숨·재물·함선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리스 공통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겼다.”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연표
참고 문헌
찾아보기
리뷰
책속에서
그리스 동맹군 가운데 전 시민을 동원한 곳은 아테네뿐이었다. 젊은 키몬과 그의 동료 기병들만 해도 ‘바다로 간 기사들’이 되었고, 중장보병들도 방패와 창 대신 노잡이 방석과 노를 손에 잡았다. 수천 명의 일반 시민들도 난생 처음 기병 및 중장보병과 진정으로 동등해진 느낌을 받았다. 노가 만인을 평등하게 만든 것이다. 노 젓기는 완전한 행동의 일치를 요구했으며, 훈련은 불가피하게 강렬한 단결심을 촉발시켰다. 부자와 빈자의 손에는 똑같이 굳은살이 박혔고, 엉덩이에 물집이 생겼으며, 근육이 뭉쳤고, 미래에 대해 동일한 희망과 두려움을 느꼈다. 삼단노선의 갑판과 노열이 아테네를 새롭게 통합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르테미시움 전투가 공염불이 되었다는 맥 빠진 사실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동맹군 함선들이 노를 저음에 따라 페르시아 함대도 그리스 핵심부로 착착 들어오게 될 터였다. 그 암울한 순간, 훗날 한 시인이 아르테미시움을 ‘아테네의 아들들이 자유의 빛나는 초석을 놓은’ 곳으로 노래하리라는 사실을 내다볼 수 있는 아테네인은 아무도 없었다.
뱃사람들의 도시 피레우스는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었다. 따라서 그릇된 신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것과 불경뿐이었다. 아테네에서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신전이 아닌 철학을 가르치는 학원에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