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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81403850
· 쪽수 : 290쪽
· 출판일 : 2011-03-30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승부와 모형귀신은 언덕에 올라 신작로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들녘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쿠, 전쟁이잖아. 전쟁 일어난 것 맞지요?”
“그렇단다. 여러 해 계속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큰 전쟁이지.”
승부가 뭐라고 물으려다 모형귀신이 손목을 잡아끄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다른 곳에 이르자 마주 오는 피란민들이 넓은 길을 가득 메웠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모두가 크고 작은 보따리를 지녔다. 남자는 두 갈래 끈을 걸어 어깨에 메었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있었다. 지게를 지거나 손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 쇠약한 노인이나 걷지 못하는 어린이를 지게에 진 사람도 보였다. 소 잔등에 짐을 싣거나 소달구지를 몰고 가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치고, 두렵고, 슬프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웃고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 등에 업혀 칭얼대는 어린애를 빼 놓고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해쓱한 얼굴로 간혹 불안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남보다 처지지 않으려고 허둥지둥 걸어가는 침묵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승부야, 일어나. 빨리 일어나. 빨리 빨리. 날 따라와. 뛰자. 빨리 뛰자. 빨리 뛰어야 살 수 있다. 뛰자.”
다급한 금실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억센 손아귀를 느꼈다. 승부는 오른손을 잡힌 채로 거스를 수 없는 강한 힘에 끌리면서 교문 쪽으로 달렸다.
“빨리 뛰어. 더 빨리, 더 빨리.”
황급하게 부르짖는 칼날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후볐다. 다른 생각을 가질 정신이 없었다. 손을 놓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뛰면서 뒤돌아보았다. 회의 중이던 군관들은 조명탄을 보고 재앙을 예감했지만 곧이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근처에 머물던 몇몇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