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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0492920
· 쪽수 : 272쪽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아홉 번째 집
즐거운 수선소
삼봉여인숙
엄마의 요강
터틀넥 스웨터
바닷가 찻집
먼동
바퀴의 집
2009. 서울 피에타
해설
삶의 고통을 응시하는 서사적 윤리의 망루_고명철
저자소개
책속에서
오후는 오전보다 시간이 훨씬 빠르게 지나간다. 바쁘게 쳐내야 하는 일감에 묻혀 그럭저럭 별 생각 없이 지나갈 때가 많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흘러간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 복잡할수록 몸을 되게 놀리는 게 수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두렵지 않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살갗이 찢어진 곳은 붙이고 꿰매면 언제든 아무니까. 상처나 고통은 가슴속에 든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고 무서운 것이다. 담보 잡힌 집을 날리고, 보증을 선 친구마저 남편을 배신하고 숨어 버렸을 때 남편의 칼날은 세상을 향해 있었다. 그러던 그의 분노는 어느 때부턴가는 자신을 향했고 그때부터 남편은 안으로 곪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거둬버린 나를 향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독하게도 울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그가 내게 가한 최악의 폭력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았다. 미쳐버릴 수도 없었던 가슴속의 불, 어쩌면 남편은 그 불덩이를 삼키지 못해 스스로를 죽여 버렸는지도 모른다.
―「즐거운 수선소」 중에서
“스웨터 하나 도톰하니 짤 수 있나?”
경망스러운 어린애 같던 주인남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범한 중년남자의 점잖은 목소리로 돌아와 있다. 이젠 스웨터를 벗고는 못 살겠네. 주인남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양쪽 주머니가 축 늘어진 주인남자의 회색 스웨터는 벌써 몇 해나 입은 것처럼 후줄근해 보인다. 여자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 소리에 주인남자의 눈이 여자의 도드라진 이마에 붙박인다. 그는 마치 눈으로 소리를 듣고 있는 귀머거리 같은 표정이다. 여자는 천천히 수화기를 든다. 안녕하세요, 전화번호가 찍혀 있어서 전화 드렸는데요. 잘못한 것이 있는 아이처럼 생수남자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다. 물이 떨어져서요. 생수남자는 여자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한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생수 배달을 그만뒀습니다. 여자는 뜨개방인데요, 라는 말을 목젖까지 밀어 올렸다가 삼킨다. 대리점 전화번호를 가르쳐 드릴까요? 더듬거리는 생수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여자가 전화를 끊고 났을 때 주인남자는 가고 없다.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귀가 먹었던가. 유리문에 검은 콜타르가 엉긴 듯 밖은 농밀하게 들이찬 어둠뿐이다.
―「터틀넥 스웨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