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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책읽기/글쓰기 > 글쓰기
· ISBN : 9788991136304
· 쪽수 : 272쪽
책 소개
목차
나는 기억한다
발문/ 『나는 기억한다』를 기억한다 . 론 패짓
옮긴이의 말/ 마법의 주문과 소진되지 않는 기억의 세계 . 천지현
저자에 대하여
책속에서
나는 기억한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단 한 번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았던 때를. 나는 살구 파이를 먹고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아이스크림 한 그릇을 먹고 난 후 마시는 물 한 잔이 얼마나 맛있을 수 있는지를.
나는 기억한다, 선물을 열어 보고 난 뒤의 크리스마스 하루가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나는 기억한다, 초기의 섹스 경험과 그때 후들거리던 무릎을. 지금의 섹스가 훨씬 좋은 것은 확실하지만, 무릎이 후들거리던 그 느낌은 정말 그립다.
나는 기억한다, 세 달에 한 번씩 2번가에서 피를 팔던 일을.
나는 기억한다, 보스턴 미술관 앞에 놓인 단지들에서 담배꽁초를 주워 모으던 일을.
나는 기억한다, 자신이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하던 때를.
나는 기억한다, 첫 발기를. 무슨 끔찍한 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나는 기억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분장하고 오기’ 파티에 메릴린 먼로로 꾸미고 갔던 때를.
나는 기억한다, 존 케네디가 총에 맞은 날을.
나는 기억한다, 지하철에서의 첫 성적 경험을. 어떤 녀석이 (겁이 나서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발기가 되어서는 내 팔에 대고 그것을 문질렀다. 나도 몹시 흥분이 되어 내릴 곳에 이르자 서둘러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고, 내 자지를 붓 삼아 유화를 그려보려 했다.
나는 기억한다, 세상을 뜬 노인의 아파트를 치우는 일을 맡았던 것을. 그가 남긴 물건들 중에서 벌거벗은 어린 사내아이를 찍은 아주 낡은 사진이 나왔다. 그 사진은 남아용 속옷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교회 성가대의 지휘자였다. 가족도 친척도 없었다.
나는 기억한다, 지금과 꼭 마찬가지로 그때도 인생은 심각했음을.
나는 기억한다, “퀴어들은 휘파람을 못 불지”라는 말을.
나는 기억한다, 아주 더운 어느 여름날 내 어항에 얼음 조각들을 넣었다가 물고기가 몽땅 죽어버린 일을.
나는 기억한다, 길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을 깨닫는 꿈을.
나는 기억한다, 린다 버그를. 한번은 그녀가 내게 속내를 털어놨다. “너무 멀리 나가는” 것은 안 되지만 가슴을 만져주는 것은 아주 좋아한다며(그 정도도 내게는 상당히 멀리 나가는 것이었다), 자기가 그러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거였다. (도와줘요!)
나는 기억한다, 메릴린 먼로가 죽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나에게 음담패설을 얘기해줬던 사내애를. 섹스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최초의 실마리를 거기서 얻었다.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신발에 거울을 붙이고는 여자애와 대화를 나누면서 치마 밑으로 발을 쓱 밀어 넣던 짓을. 다른 남자애들이 그 짓을 했다. 나는 안 했다.
나는 기억한다, 화장실 물을 내린 다음 똥이 ‘여행하는’ 경로를 떠올려보려 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발가락 사이에 낀 때를. 나는 절대로 발가락 때를 먹지 않았지만 그렇게 한 다른 아이들을 기억한다. 내가 코딱지를 먹은 것은 기억이 난다. 맛이 꽤 좋았다.
나는 기억한다, IQ 테스트를 받았는데 평균 이하의 점수가 나왔던 것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나는 기억한다, 우리 형이 욕조 마개를 뽑으려고 알몸을 깊이 구부린 모습을 보고 똥이 길쭉한 틈새가 아니라 구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을.
나는 기억한다, 어머니가 보지 않을 때 마지막 순간을 노려 세탁기에 속옷을 슬쩍 집어넣던 일을. (몽정 때문에.)
나는 기억한다, 반 고흐를 좋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를. 그러다 마침내 얼마나 그를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이제는 그가 얼마나 지겨운지도.
나는 기억한다, 어머니 아버지의 벗은 몸이 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이해해보려 했던 것을. (산다는 것 말이다.)
나는 기억한다, 해마다 가을이면 말하기 수업 시간에 “지난여름을 어떻게 보냈나”에 대해 발표를 해야 했던 것을. 나는 대개 수영을 많이 했고(거짓말)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사실) 독서도 많이 했다고(사실 아님), 그리고 여름이 아주 빨리 지나갔다고(사실)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갔고 지금도 그렇다. 어쨌든 여름을 보내고 나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둘러싼 한바탕의 난리법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