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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집 이야기

이응노의 집 이야기

(제5판)

이응노 (지은이)
  |  
수류산방.중심
2012-01-25
  |  
29,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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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집 이야기

책 정보

· 제목 : 이응노의 집 이야기 (제5판)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건축 > 건축이야기/건축가
· ISBN : 9788991555273
· 쪽수 : 200쪽

목차

ㆍ이응노의 집,이응노 이야기ㆍ화가의 고향,화가와 고향-이응노의 경우[김학량] │하나│이응노와 고향 │둘│'고향'을 버려라 │셋│고향,소년의 꿈,그리고 출가(出家) │넷│첫입문:서화 │다섯│다시출가,그리고 두 번째 입문:'미술'/'동양화',그리고 풍경 │여섯│식민지 이후-도시,사람,삶 │일곱│인간과 현실,글고 반추상 │여덟│추상-(구성(Composition)) │아홉│유배(流配0 │열│춤 또는 꽃 ㆍ이응노의 집,만든 이야기 ㆍ소년 이응노가 바라봤던 풍경 앞에서 [김석환] ㆍ미래로(美來路)의 아름다운 공간 [이태호] ㆍ이응노, 한국 현대 미술사에 남겨진 공백[유홍준] ㆍ'이응노의 집' 개관 일지:시작과 끝,끝과 시작 [윤후영] ㆍ이응노의 집,집 이야기 ㆍ이응노의 집과 풍경의 건충 [조성룡] ㆍ이응노의 집-문화 문명의 교차점[김미상] │하나│홍성과 '이응노의 집' │둘│우리 시대의 미술관과 기념관 │셋│조성룡의 건축 세계 │넷│'이응노의 집'이 의미하는 것 │다섯│하늘로 이어지는 축과 우주의 맥 │여섯│조경과 '코스모스케이핑(cosmoscapig)' │일곱│공간과 빛이,툭툭,징검다리처럼,또는 징검다리에서 │여덟│땅에서 스며나온 집, 또는 틈새 │아홉│자연스레 세계를 담다 │열│'이응노의 집'과 '풍경의 회복' ㆍ이응노의 집,전시실 소개 제1전시실 │이응노의 여정│고암 이응노가 걸어온 길,연표 │제2전시실│이응노의 작품세계 1:도불 이전의 서화,풍경화 │제3전시실│이응노의 작품세계 2 :도불 이후<구성>,<군상> 연작 │수록 작품 목록│이응노의 집:프로그램과 찾아오시는 길 ㆍ이응노의 집,홍성 이야기 ㆍ고암을 따라 홍성을 걷자│고암의 그림을 만나러 가는길│유년의 고암을 만나러 가는 길│ 흥성의 또 다른 볼거리

저자소개

이응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4년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25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홍천마을에서, 이근상(李根商)의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출생했다. 7세 무렵 홍성 읍내 보통학교에 입학. 2년여 수학했다. 어린 날 이응노는 집안 농사일을 돕거나 부친 몰래 친구들과 동네의 일거리를 찾아 생계에 보태거나, 또 고향의 용봉산, 덕숭산 등지를 사생하며 그림에 특별한 애착을 지니게 되었다. 17~18세 무렵인 1920년 초 부친의 소개로 서화가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 1872~1941) 문하에서 문인화의 기초를 짧은 기간 배웠다. 미술에 대한 자신의 재능에 눈뜨게 된 그는 20세 무렵에 더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단신 상경,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문하에 입문한다. 스승 김규진으로부터 ‘죽사(竹史)’라는 초호(初號)를 받기도 한 이응노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서·사군자부에 '청죽(晴竹)'으로 초입선한다. 이후 1931년 제10회 《선전》에서 '청죽(晴竹)'으로 특선을 하기까지 표구점이나 간판점 점원을 거치고,전주에서는 '개척사(開拓社)'라는 간판점을 차리는 등 경제적인 면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1931년부터 1936년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기 전까지는 매해 《선전》 입선을 거듭했으며, 일본에 정착해서는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 일본화과, 홍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 양화과에 등록하고 마츠바야시 케이게츠(松林桂月)의 뎅코화숙(天香畵塾)에 입문했다. 이 무렵부터 한학자 규원 정병조(葵園 鄭丙朝)로부터 받은 바 있던 ‘고암(顧菴)’이라는 호를 사용한다. 1938년부터 《선전》에 '동도하안(東都河岸)' '동원춘사(東園春事)'를 출품해 입선하며, 이듬해에는 《제1회 일본화원전(日本畵院展)》에 '설산(雪山)'으로 입선하는 등 1944년까지 《선전》과 《일본화원전》 두 전시에 나란히 입선하는 개가를 올린다. 그 사이 1939년[《고암 이응노 화백 신남화전》(화신백화점 화랑)]과 1941년 [《고암 이응노 화백 제2회 남화신작전》(화신백화점 화랑)]에 개인전을 잇달아 열었으며 전쟁 말기에 고국으로 완전히 귀국했다. | 1945년 8월 해방된 조국에서 이응노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 결성, 《해방기념미술전람회》 개최 등의 조직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정열적인 활동을 하였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이응노의 미학을 결정적으로 주체적이고 민족적이며 현실주의적인 미학으로 정립시킨 계기가 되었다. 1958년 《도불전(渡佛展)》에서 보여 준 작품들은 “소박하며 깨끗하고 고상하면서도 세련된 율동과 기백”을 한국의 민족성으로 보았던 자신의 지론의 바로 그 그림이었다. 1958년, 55세의 이응노는 프랑스를 향해, 예술가의 목숨 같은 ‘새로움’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 첫 개가가 한지로 빚은 콜라주다. 그것이 “꽉 차 있음이 곧 비어 있음일 수 있는, 동양성의 크고도 관대한 리듬을 따르는 강력한 작품”, “태양 같은 위대한 리듬과 경이로움과 찬란함이 뒤얽힌 거대한 하나의 미궁(迷宮)을 창조했다”고 평가한 현지의 찬사들이 시사하는 1960년대 이응노 콜라주의 성취였다. 1970년대에는 ‘문자 추상’ · ‘서예적 추상’으로 진입하는데, 이는 이응노 자신의 말로 “동양의 한문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그 자원(字源)은 자연 사물의 형태를 빌렸거나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동양의 추상화적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라는 뛰어난 지혜로부터 흘러 나온 결과였다. 이것은 1964년부터 ‘파리 동양미술학교’를 프랑스 당대의 지성인들의 후원을 얻어 개설했다. 여기서 약 3,000여 명의 문하생을 길러 내고 유럽에 동양 정신을 ‘가르쳤던’ 용기와 자신감의 바탕과도 조응한다. | 1980년대에는 ‘동적 인간’, 군중들을 그린다. 그의 말로 “서로 손 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생 공존을 말하는 민중 그림”이다. 그것은 ‘공생 공존’의 평화의 희구요, 하늘(天)을 꽉 채운 작고도 작은 사람들의 은하수일 수 있다는 점에서 천지인(天地人)의 바탕, 즉 자연(自然)이요 자연의 이법(理法)의 도해인 동양 정신의 생생한 변주였다. 이응노의 한 생애는 예컨대 ‘어떻게 동양성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성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삶이었다. 그는 1989년 파리의 시립 페르 라세즈(Pere-Lachaise) 묘지에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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