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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91934450
· 쪽수 : 496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겨드랑이까지 털이 나기 시작했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물론 어른이 되면 몸 여기저기에 털이 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도 먼 미래의 일.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털이 많은 초등학교 5학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울고 싶어졌다.
몸의 이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원래가 학년에서 두 번째로 컸던 키가 5학년 1년 사이에 12센티미터나 자랐다. 어머니의 키를 훌쩍 넘어 버렸다. 남자의 성장이 절정에 이르는 때는 중학생 때다. 지금의 스피드로 자란다는 가정 하에, 가정시간에 배운 내용대로 계산하면 내 키의 최종 도달점은 2미터 40센티미터! 괴물이다! 너무 두려워서 계산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목소리도 변했다. 음악시간에 ‘저 목장에 늦여름 철이 오고’ 노래를 부르는데 ‘늦여름’ 부분에서 목소리가 가라졌다. 잠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헬리콥터로 변신해 버린 것처럼. 그러다 결국 그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얼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입술 위의 털이 마음에 걸려 거울을 자주 보다 보니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에 뭔가가 잔뜩 나기 시작했다. 턱이 길어지고 둥그렇던 얼굴이 갸름해졌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조금 다르다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 아닌가.
돌연변이. 연구소에서 배운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크게 입을 벌려 빗방울을 받아들였다.
좋아, 간다.
대전근과 비복근에 힘이 넘쳤다. 대퇴이두근과 대퇴사두근이 더 빨리 뛰라고 나를 재촉했다. 기지마의 충고대로 복근과 배근까지 동원해 몸이 떨리지 않게 균형을 잡았다.
“와타루!”
사치의 목소리가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머릿속을 그 목소리 하나로 가득 채운다. 그 목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사치는 내 심장이며 나의 근육이었다.
남은 200미터, 2위 선수를 바깥에서 크게 따돌린다. 나머지 하나. 두 발이 트랙 위를 날아오른다.
150미터. 선두와 나란히 선다. 찰싹 옆으로 붙어서 상대의 상태를 살핀다. 따라잡은 나를 곁눈으로 살피는 그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 됐어, 할 수 있어.
나머지 100미터. 마지막 하나가 뒤로 물러난다. 이제 내 앞에는 아무도 없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늘 내 몸을 지배하던 머리가 몸에게 먹혀 버린 것 같았다. 산소 결핍으로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질러 댄다. 그렇지만 그것이 환호의 외침으로 들린다.
골라인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우승 상품처럼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빛 속에 뭔가가 보인다.
그것은 언젠가 보았던 매머드의 환영인지도 모르고, 젖은 채 빛나는 경기장의 지붕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곳을 향해 내처 내달리며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
내 숨결로 흐려지는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는 순간 아이스 맨이 든 케이스가 전시장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사람이 열 수 없게 유리를 고정하고 자물쇠를 채워 두지 않은 것이다.
유리 케이스에 손을 대 본다. 그리 무겁지 않아서 간단히 들어올릴 수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아이스 맨을 만져 보았다.
바싹 마른 피부는 너무 딱딱해서 돌 같았다. 그러나 돌처럼 차갑지는 않다. 나무에 가까운 온기가 느껴졌다.
두개골에 엷은 피부가 달라붙었을 뿐인 얼굴의 윤곽을 손가락으로 더듬고 안구가 없는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아버지라 생각하며 살았어요.”
열 살 때 그렇게 정한 것이다. 처음 눈에 들어 온 존재를 부모라 여기는 막 태어난 병아리처럼.
“아버지가 필요했거든요, 꼭. 다른 아이들처럼 아버지를 가지고 싶었어요.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얼굴이라도 알고 싶었어요. 자신이 누군가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어요. 늘 찬 바람이 통과하는, 몸에 뻥 뚫린 구멍에 끼워 넣을 퍼즐 조각이 필요했어요.”
아이스 맨의 팔을 잡아 보았다.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상상했던 대로 커다란 손이었다. 창이나 석기를 단단히 거머쥐기에 적합한 실전적인 긴 손가락이었다. 손등을 두드리면서 나는 옛날의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그렇지만 이젠 괜찮아요. 구멍은 메워졌거든요.”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요.”
이번에는 나 자신을 향해 말했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