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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3176926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3-01-28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내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이었지. 소리 같은 것은 없었지만 기분이 묘했어. 마치 날카로운 송곳이 슬금슬금 등 뒤로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어찌나 기분이 더러웠는지 나도 모르게 펄쩍 뛰며 돌아봤어.”
“…….”
“누군가 있더군. 꽤 먼 곳에 누가 나처럼 길가에 차를 세워 놓았더라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포드사의 세단이었어. 정 팀장처럼 자가용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는 편은 아니지만, 국산차와 외제차도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지.”
“차 주인은 봤어?”
계속 듣기만 할 셈이었던 유상준이었지만, 조급한 마음이 들어 재촉하고 말았다.
“어떻게 생긴 놈들이야?”
“한 놈이었어. 운전석에 앉아 있는 놈만 봤지.”
“인상착의…… 몽타주 작성할 정도는 기억해?”
“그럴 필요도 없어.”
강만오는 그때 기억이 떠올랐는지 경련하듯 전신을 한 번 떨었다.
“금발머리의 외국인이었으니까 듣기만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인상착의를 대충만 들어도 보는 즉시 그놈이라는 걸 알게 될 걸?”
“외국인이라고?”
강만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굳이 더듬을 필요도 없이, 떠올리는 순간부터 시야에 확 들어오는 존재였다. 자동차 핸들에 턱을 걸치고 퀭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외국인.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강만오는 전류가 등줄기를 죽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외국인은 분명히 강만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만오도 놈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았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그놈이 웃더군.”
강만오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놈이 짓던 미소. 영원히 무표정할 것만 같던 그 얼굴에서 입술 한쪽만 살짝 올라가는 기이한 미소였다. 입가를 제외한 다른 곳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외국인의 표정은 소름끼치게 달라졌다. 강만오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놈의 미소를 떠올리며 총각무 하나를 줄기까지 통째로 씹어 삼켰다.
“그때까지 그 놈은 핸들에 턱을 걸치고 날 보고 있었어. 그러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세우더군.”
‘범인이다!’ 백산은 확신했다. 강만오의 설명만으로도 놈이 승자의 여유를 부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한 놈인가? 중정의 특별 팀 포스 요원들을 한 놈이, 암살이나 기습이 아닌 정면 대결로 해치웠다고?’
“그 새끼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싸웠어?”
유상준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놈과 맞붙었단 말야?”
“아니……. 아니야. 그럴 엄두도 내지 못 했어.”
강만오는 쓰게 웃었다. 그때 자신이 취한 행동이 부끄러워 유상준과 백산에게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놈은 운전석에서 날 보며 경고하더군.”
“경고?”
“손끝으로 제 목을 슥 긋더니 입 다물라는 시늉을 하더라고.”
강만오는 놈이 했던 것과 똑같이 자신의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있으라는 얘기겠지.”
“그놈이 범인인 건 확실하군.”
백산은 유상준의 다음 말이 당연히 몽타주를 작성하여 범인을 찾거나 중정 요원에게 비밀 지시를 내려 놈의 행적과 기관을 추적하자는 제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상준은 이마에 좀처럼 보이지 않던 주름이 드러날 정도로 인상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애들을 죽인 놈이야.”
강만오는 또 한 번 주전자 주둥이를 물고 목울대를 꿀꺽거렸다. 마치 자신을 학대하듯 주전자를 비울 때까지 입도 떼지 않았다. 탁자에 주전자를 내려놓을 때의 강만오는 지옥불에 떨어진 원귀 같은 표정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그 새끼를 체포하든 쏴죽이든 해야 했는데…….”
“…….”
“못 하겠더라고.”
강만오는 극한에 다다랐던 격정을 거짓말처럼 지우며 고개를 숙였다.
“발이…… 발이 떨어지지 않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