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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의 수호자

고분군의 수호자

조정래 (지은이)
  |  
청암
2011-08-31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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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의 수호자

책 정보

· 제목 : 고분군의 수호자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3203431
· 쪽수 : 272쪽

책 소개

추리시리즈 '잊혀간 왕국, 아라' 제3권 <고분군의 수호자>. 소설은 1장 '국왕의 죽음', 2장 '잃어버린 목간', 3장 '고분군의 수호자'로 구성되었다.

목차

펴내는 말
머리말

제1장 국왕의 죽음
1. 진서의 방문
2. 국왕의 죽음
3. 고분군에서 일어난 일Ⅰ

제2장 잃어버린 목간
4. 잃어버린 목간
5. 쫓기는 진철
6. 성안의 만남

제3장 고분군의 수호자
7. 고분군에서 일어난 일Ⅱ
8. 옥에서 일어난 일
9. 진정한 수호자

꼬리말

저자소개

조정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64년 경남 함안 출생. 소설가. 함안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잊혀간 왕국, 아라〉에 대한 시리즈로 《사라진 뱃사공》, 《옥돌에 얽힌 저주》, 《고분군의 수호자》, 《연꽃 위의 처녀》, 《검은 바다의 소용돌이》를 출판했고 별권으로 《칠지도, 아라홍련을 품다》가 나와 있다. 아라에 대한 고증으로 일본의 고서(古書)를 연구하다 〈일본서기 천황과 임나일본부는 허구〉라는 시리즈로 전체 3권의 학술서를 쓰고 있다. 조만간 출간될 2권과 3권의 제목은 각각 《일본서기 신대기와 신공황후 신라 정벌의 본질》과 《일본서기 해석을 통해 본 임나일본부의 허구》이다. 2022년 현재 함안군청 가야사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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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중심의 나라 가울이(고구려, 高句麗)도 서서히 그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큰 수치와 모욕이라도 그 늪에 빠지지만 않으면 언젠가 갚을 날이 있는 법이다. 선비족의 모용황과 맞붙어 크게 지면서 직접 성을 쌓고 서울을 옮긴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에서 힘없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2675년의 쓰라림은 추모왕 이후 오백 칠십여 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나라가 가장 힘이 없게 한 사건임은 틀림없었다.
임금으로서 소(釗, 고국원왕)는 결코 그 기억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십육 년의 세월은 복수의 칼을 벼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이었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었지만 쓸 수 있거나 먹을 만한 것은 모두 빼앗긴 채 짓밟혀 거칠고 메말라진 땅에 퍼진 온갖 질병 속에서 살아남는 것도 정말 큰일이었다. 그래도 봄이 오면 다시 새싹이 자라며 전쟁과 질병을 견뎌낸 모진 생명을 이어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해가 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도 살이 붙고 아주 느리기는 하지만 수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십여 년이 지나자 나라가 거의 안정을 찾았고 이십 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자주 웃음이 흐르고 가을이면 배불리 먹은 사람의 노랫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예전의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의 여유는 누릴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발톱을 드러낼 때는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오열홀(烏列忽)의 쇠돌이 아직 모용씨의 수중에 있었다. 거기서 나오는 막강한 힘은 농사짓는데 쓰는 쇠스랑이나 낫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고구려에도 쇠돌이 있고 칼과 창을 만들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고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에 새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무리였다. 여기 저기 조금씩 흩어져 있는 쇠돌을 찾아 손에 넣는 것도 오열홀의 사방에 널린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또 무쇠의 재질도 오열홀의 단단함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무릇 전쟁은 지리적인 이점에다 빠른 이동, 군사의 높은 사기로 이기는 법이니 사기를 높이려면 좋은 무기로 능히 적을 제압할 수 있어야 했다. 무기도 부족하고 충분한 군대를 모으지도 못하는 지금은 분함을 감추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가신 문제도 있었다. 바로 백제와의 관계였다. 낙랑(樂浪) 혹은 평양(平穰)으로 적는 펴라는 백이십여 년 전에 동천왕이 새로 도읍한 서울이었는데 원래 그곳에 살고 있다 쫓겨난 남낙랑과 따로 독립한 대방이 틈만 나면 침범해 왔기에 선왕인 미천왕이 북서로 현도와 요동을 정벌하기 이전에 남낙랑과 대방을 먼저 복속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백제와 서로 국경을 맞대게 됐는데 백제가 수군을 내어 요서와 진평의 두 군(郡)을 차지했다가 비록 지금은 그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근초고왕과 태자 귀수(貴首, 구수라고도 한다)가 이끄는 군대가 본토에 버젓이 건재한 만큼 언제 뒤를 노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전에 대방이 나라를 세울 때 이를 저지하려는 고구려를 무시하고 대방을 편들며 대립한 이래로 백제는 신조선의 후예인 고구려를 안중에 두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백제이다 보니 요동으로 군사를 낼 때 자칫 서울로 치고 올라오기라도 한다면 나라를 고스란히 내줄 판이었다.
그래서 임금이 가우라(계안나(桂安那), 중부)의 신가와 순라(순나(順那), 동부), 불라(관나(灌那), 남부), 열라(연나(涓那), 서부), 줄라(절나(絶那), 북구)의 각 라살(누살(?薩), 도사(道使))을 불러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자 모두가 백제를 쳐서 겁을 준 후 펴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제를 먼저 치는 것은 군사의 힘을 시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은 생각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고구려는 겉으론 조용했지만 속으론 분주히 복수의 칼날을 갈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새라의 물가에 자리한 사로국(斯盧國, 새라)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비교적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라의 들판이어서 새라불이라고 읽고 서라벌(徐羅伐)로 적는 그 땅은 반도의 동쪽하고도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신조선이나 불조선의 유민이 사는 곳이 모두 두류산이나 저릅재(계립령, 조령)의 겹겹이 높은 산으로 둘러쳐져 백제, 남낙랑, 대방의 싸움과는 무관한 곳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새라는 그 산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질 수 있었다.
물론 새라가 계속 조용하게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신조선의 유민이 처음 세운 열두 나라는 처음에는 서로 친하게 지냈지만 차츰 세월이 흐르며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 복속되어 없어지는 나라가 생기는가 하면 복속된 땅에서 다시 나라가 일어서기도 하며 부침이 심했다. 새로 들어온 유민이 정착하며 나라를 선포하기도 했다. 새라도 이런 저런 싸움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침략을 받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새라불은 들판이 넓고 농사를 짓기 좋아서 예부터 사람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인근의 나라보다 힘센 군대를 가질 수 있었고 나중에는 아무도 섣불리 새라를 넘보지 못했다. 오히려 새라는 조금씩 그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물론 한꺼번에 많은 땅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나라가 다투는 틈을 타서 조금씩 땅을 보태 신조선 유민이 세운 나라를 많이 점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새라는 구야국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낙수가 바다로 흘러가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던 구야국도 점차 나라의 힘이 세지면서 다른 땅을 차지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미 서쪽에는 강력한 왕잌던 가진 아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낙수를 건너 신조선 유민이 사는 땅을 침범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새라와 구야국은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때 새라는 아라가 포상팔국력한싸우며 밀리게 되자 은 서로신조선에서 있었던 정을 생각해 군사를 구야국도우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새라는 구야국과 나라를 합치게 되가에 이는 박(朴), 석(昔) 양씨가 번갈아 왕 위에 씨가 강력한 왕잌던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595년으로 미추왕은 최초의 김(金)씨 왕으로 새라와 구야국을 함께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2640년 나라이름을 새로운 나라라는 뜻으로 신라(新羅)로 바꿈으로써 새라와 구야국은 마침내 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2689년 즉위한 내물왕은 김씨가 세습하는 체계를 이루어 사실상 구야국이 새라를 완전히 장악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저릅재 아래서는 새라에서 탄생한 신라가 외부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왕권 강화의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백제도 복수의 칼을 갈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십칠 년 전 요서와 진평을 차지할 당시의 백제는 온조대왕 이후 오백 삼십여 년의 역사 이래로 가장 큰 힘을 자랑했지만 근초고왕이 태자 구수(仇首)와 다시 백제로 돌아오자 남은 병사는 두개의 군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열홀에서 차지한 모용외의 뒤를 이은 모용황이 동으로 고구려의 환도를 빼앗은 후 다시 그 뒤를 이은 모용준이 서쪽으로 대거 군사를 움직이자 요서와 진평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군대의 사기는 지휘관이 좌우하는 법이다. 백제군사는 비록 용감했지만 왕과 태자가 없는 상태에서 오열홀의 이름난 쇠에 끝까지 대항할 수는 없었다. 장수와 병사가 최선을 다했지만 백제군사는 결국 요서와 진평을 모용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더구나 백제로 떠나기에는 배마저 부족했기에 대부분의 군사는 말을 타고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북지역을 장악한 전연(前燕)을 피해 북으로 도망간 군사는 다시 세력을 회복할 때까지 먹을 군량과 숨어 지낼 은신처를 찾아 녹산(鹿山)까지 쳐들어가게 되었고 본래 녹산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북부여는 백제의 군사를 당해내지 못하고 개원(開原)으로 서울을 옮기고 말았다.
배를 타고 떠난 군사가 백제에 도착하자 근초고왕은 불같이 성을 냈지만 당장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서와 진평에 있던 군사가 바다도 없는 내륙 한복판의 녹산에 있으니 세작이 장사꾼으로 위장해 남의 나라를 통과하며 겨우 소식이나 주고받을 뿐이었다. 또 옛날 불리지국이 다스리던 발해(渤海)까지 모용준이 업(?)으로 서울을 옮기며 이제 전연의 차지가 되었는데 나라가 안정되어 있어서 요서를 회복코자 군사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히 2693년 모용준이 죽고 나서 나이가 어린 모용위가 즉위했지만 섭정을 하게 된 모용각이 워낙 뛰어난 인물이라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나라살림을 잘 이끌어 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백제도 당장 군사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그저 복수를 다짐하며 전쟁을 준비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백제도 고구려와 같은 걱정거리를 갖고 있었다. 만약 군사를 내어 전연을 치러간다면 언제 아라가 군사를 내어 뒤를 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사이가 좋았기에 그런 걱정을 접어두었지만 2692년에 조정좌평(朝廷佐平)이었던 아라의 진정황태자가 몰래 백제를 빠져나간 후로는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백제가 요서와 진평을 차지한 후 오열홀을 마저 점령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귀국하자 진정은 나중에 해상왕의 칭호를 주었음에도 아라로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백제에서도 왕명을 출납하는 내신좌평(內臣佐平), 창고일을 맡아보는 내두좌평(內頭佐平), 예의를 관장하는 내법좌평(內法佐平), 임금을 보호하고 병사일을 보는 위사좌평(衛士佐平), 형옥을 담당하는 조정좌평(朝廷佐平), 지방의 군사일을 돌보는 병관좌평(兵官佐平) 등 육좌평이 모여 아라를 먼저 쳐야한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근초고왕은 왕후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왕후의 오빠이자 아라의 황태자인 진정이 예전 요서와 진평을 공략할 때 보여준 놀라운 무예는 아직도 간담이 서늘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답을 이리저리 미루고만 있었다. 그러나 육좌평은 아라에 대한 방비가 없이는 요서를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근초고왕을 졸라댔다. 나중에는 아라에서 사신이 올 때 요서에서 본 이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오지 않는 것을 핑계로 아라가 딴 마음을 먹고 있다고 부추겼는데 과연 왕후의 생일 때 오는 사신이 예전에 해마다 오던 사람과는 달랐다.
수년을 시달린 근초고왕은 2696년 가을 아라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왕후의 생일이 되어 찾아온 사신을 고문을 하는 것을 허용해 버렸다. 그러나 사신은 완강하게 버텼고 근초고왕은 자기가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조바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중에 왕후도 그 사실을 알고 왕을 비난했으며 먹을 것을 사신에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나 왕후도 육좌평의 집요한 고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살을 찢고 피를 말리는 고문이 칠일 밤낮을 넘기며 계속되자 마침내 사신은 입을 열고 말았다.
사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아라가 본래 가진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이미 왜에다 마련했으며 진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쇠뿔한이 지난해 아라의 왕성에 왔다가 다시 왜에 돌아가서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 땅은 비옥할 뿐만 아니라 아라보다도 더 좋은 쇠돌이 나오는 곳이어서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고 군대를 양성하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그곳으로 가거나 다시 돌아올 때는 며칠씩 걸리고 바닷바람이 거세기 때문에 바람이 잘 부는 시기를 택해야 무사히 오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근초고왕은 육좌평을 불러 즉시 아라로 쳐들어가고자 했다. 아라가 왜에서 더 힘을 기르고 그 군사가 다시 한반도로 들어온다면 아라를 먼저 치는 것이 아니라 아라에 점령당할 수도 있었다. 아라의 힘이 더 세지기 전에 힘을 꺾어야만 했다. 그러나 당장 아라를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사신을 다그쳐 알아본 아라의 힘은 당장 백제가 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군사들이 수천 리 북쪽에서 전연에 의해 가로막힌 채 녹산에 머물며 간신히 소식이나 주고받는 형편에 얼마 되지 않는 군대를 이끌고 나라의 운명을 시험을 하기에는 불안했다.
결국 백성을 뽑아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무기도 새로 필요한데다 훈련도 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군사를 모아서 훈련시키고 아라가 마음을 놓게 요서로 쳐들어간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도 끝내 마음을 졸이며 애를 태우던 근초고왕이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백제군에게 아라로 진격할 것을 명한 것은 2697년 칠월이 되어서였다. 이미 나이가 노쇠한 근초고왕은 자기는 궁에 머물면서 태자 구수에게 대장군을 맡기고 침류와 막고해장군에게 보좌케 한 후 군대를 내보냈다.

2696년 가을 백제로 간 사신일행이 돌아오다 산적을 만나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은 용주국왕을 비롯한 아라사람이 모두 놀랄만한 것이었다. 비록 백제왕이 사죄하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비단 한 필(匹)과 덩이쇠 일 매(枚)를 보내주긴 했지만 전쟁 중이라도 사신을 죽이지 않는 법에 비추어볼 때 비록 산적의 갑작스런 습격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로 왈가불가하는 것은 후회만 더하고 자칫 내분만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샌님을 비롯해 많은 군사들이 모두 왜에 가 있는 지금 섣불리 백제와 다투어서도 안 되었다. 현명한 사람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법이다.
용주국왕은 백제와의 국경에 위치한 성에 더한층 경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백제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그동안 훈련시킨 세작을 풀어서 은밀히 백제 땅을 다녀오게 했다. 백제 땅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그들은 백제 군사의 움직임을 샅샅이 알아챘으며 백제가 요서의 빼앗긴 땅을 치러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백제의 궁성에 머물고 있던 세작의 노력으로 2698년 초여름에 백제가 요서로 출발하려 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용주국왕은 부리(좌보(左輔)로 적었다)와 마리(우보(右輔), 대로(對盧), 대형(大兄)으로 적었다)에다 다섯 사리(양가(羊加),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의 다섯 사리, 살(薩), 사자(使者), 사리(舍利)로 적었다)를 불러 앞일을 의논했다. 그 자리에서 모두가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 백제군사가 요서로 출발하면 허를 찌르자는데 뜻을 모았다. 백제군사가 요서로 가면 그 땅은 주인이 없어지는 것이니 그때 왜에 있는 군사를 불러 백제를 치면 진정 샌님이 요서에서 당하고 사신이 죽임을 당한 수모까지 갚아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왜에 있는 군사가 아라로 돌아오면 백제가 위협을 느껴 출발을 미루거나 자칫 출발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왜에 소식을 보내 백제가 요서로 출발할 때까지는 왜에서 나오지 않도록 믿음직한 사람을 보내 이를 알렸다. 또 자칫 아라가 꾸미는 일이 백성의 입을 통해 백제로 흘러들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이번 일을 발설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신의 죽음을 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세작을 통해 계속 새로운 소식이 들렸다. 요서로 가기 위해 백제는 정병 이만을 포함해 오만의 군사를 모으고 있다고 했으며 2697년 봄이 되자 일만이 넘는 군사가 모여 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으며 유월이 되자 이만에 가까운 군사가 모인 것이 알려졌다. 물론 아직은 요서로 갈만한 군사가 아니었기에 훈련에 치중하고 있다는 세작의 보고가 있었으며 오리골(위례홀, 慰禮忽)에는 요서로 가는 배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리고 2697년 칠월이 되자 백제 군사가 요서에서의 장거리에 대비한 이동훈련으로 서쪽으로 출발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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