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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우리 학생들을 지도하다

율곡 이이, 우리 학생들을 지도하다

(율곡에게서 듣는 학교모범 16가지 가르침)

이이 (지은이), 김정진 (엮은이)
자유로(새성)
12,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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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우리 학생들을 지도하다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율곡 이이, 우리 학생들을 지도하다 (율곡에게서 듣는 학교모범 16가지 가르침)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고전
· ISBN : 9788993298246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5-09-01

책 소개

율곡 이이가 저술한 <학교모범>을 오늘에 되살려 쓴 책.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 할 준칙을 제시한 것으로서, 모두 16조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 시대 이상적인 선비교육의 지침이 되었다. 각각의 가르침에 잘 부합하는 동서고금의 사례들을 곁들여 구성하였다.

목차

■ <학교모범> 서문 / 10
1. 뜻을 세워라 - 입지(立志) / 13
2. 몸가짐을 단속하라 - 검신(檢身) / 35
3. 독서하라 - 독서(讀書) / 51
4. 말을 신중하게 하라 - 신언(愼言) / 67
5.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지켜라 - 존심(存心) / 83
6. 부모를 잘 모셔라 - 사친(事親) / 97
7. 스승에게서 배워라 - 사사(師事) / 115
8. 친구를 잘 사귀어라 - 택우(擇友) / 131
9. 가정생활을 잘하라 - 거가(居家) / 143
10.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지내라 - 접인(接人) / 157
11. 시험에 응시하라 - 응거(應擧) / 171
12. 이익보다는 의(義)를 중시하라 - 수의(守義) / 183
13. 참되고 꿋꿋한 마음을 지녀라 - 상충(尙忠) / 199
14. 정중하고 겸손하게 행하라 - 독경(篤敬) / 213
15. 학교생활을 잘하라 - 거학(居學) / 225
16. 독서모임에 참여하라 - 독법(讀法) / 239
■ 덧붙이는 글 / 252
■ 율곡 이이 연표 / 254

저자소개

이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 1536년(중종31년) 1세 : 12월 26일 강릉부 북평촌 외가에서 출생함. 부친은 이원수(李元秀), 모친은 신사임당(申師任堂), 본관은 덕수(德水), 字는 숙헌(叔獻), 號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 1541년(중종36년) 6세 : 강릉에서 한양으로 올라옴. - 1542년(중종37년) 7세 : 「진복창전(陳復昌傳)」 지음. - 1543년(중종38년) 8세 :파주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화석정(花石亭)」 시 지음. - 1545년(중종40년) 10세 : 「경포대부(鏡浦臺賦)」 지음. - 1548년(명종3년) 13세 : 진사초시에 장원급제함. - 1551년(명종6년) 16세 : 5월 어머니 신사임당 별세, 「선비행장」을 지음. 파주 두문리에 어머니를 장례하고 3년간 시묘함. - 1554년(명종9년) 19세 : 우계 성혼(1535~1598)과 도의의 교분을 맺음. 3월 어머니 시묘 3년을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함. - 1555년(명종10년) 20세 : 금강산에서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유학에 전념함. - 1556년(명종11년) 21세 : 봄에 한양으로 돌아와 漢城試에 장원급제함. - 1557년(명종12년) 22세 : 9월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 곡산 노씨와 혼인함. - 1558년(명종13년) 23세 : 봄에 경북 예안 도산(陶山)을 방문하여 퇴계 이황을 만남. 겨울에 別試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함. - 1561년(명종16년) 26세 : 5월 아버지 이원수 별세. - 1564년(명종19년) 29세 : 7월 생원 진사시에 장원급제함. 8월 明經試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으로 첫 벼슬길에 나아감.(모두 9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림.) - 1565년(명종20년) 30세 : 봄에 예조좌랑에 전임. 8월 요승(妖僧) 보우(普雨)와 권간(權奸) 윤원형(尹元衡)을 단죄하는 상소를 올림. 11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사퇴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불허. - 1566년(명종21년) 31세 : 2월 병조좌랑에, 3월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됨. 겨울에 이조좌랑에 임명됨. - 1568년(선조원년) 33세 : 2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됨. 가을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함. 11월에 다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가 강릉 외조모 이씨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강릉으로 내려감. - 1569년(선조2년) 34세 : 6월 교리에 임명됨. 9월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림. - 1570년(선조3년) 35세 : 4월 교리에 임명됨. 10월 병으로 사직하고 해주로 감. - 1571년(선조4년) 36세 : 1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여름에 교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해주로 감. 6월 청주목사에 임명됨. - 1572년(선조5년) 37세 : 여름에 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감. 8월에 원접사 종사관, 9월에 사간원 사간, 12월에 홍문관 응교, 홍문관 전한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퇴함. - 1573년(선조6년) 38세 : 7월 홍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3차례 상소를 올린 후 사임하고 8월에 파주로 돌아감. 9월 다시 직제학에 임명되어 사퇴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겨울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임명됨. - 1574년(선조7년) 39세 : 1월 우부승지에 임명되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림. 3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됨. 10월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됨. - 1575년(선조8년) 40세 : 8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됨. 9월 『성학집요』를 지어 올림. - 1576년(선조9년) 41세 : 우부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전라감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나아가지 않음. 10월 해주 석담에 청계당을 지음. - 1577년(선조10년) 42세 : 1월 해주 석담에서 「동거계사」를 지음. 5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12월 『격몽요결』 지음. - 1578년(선조11년) 43세 :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를 지음. 3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6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 1579년(선조12년) 44세 : 5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 1580년(선조13년) 45세 : 5월 「기자실기」 지음. 9월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 12월 대사간에 임명. 1581년(선조14년) 46세 6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다시 예문관 제학으로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8월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9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10월 호조판서에 제수됨. 11월 『경연일기』 완성 - 1582년(선조15년) 47세 : 1월 이조판서에 제수됨. 7월 선조의 명으로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학교모범」, 「사목(事目)」을 지어 올림. 8월 형조판서에 임명됨. 9월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고 숭정대부로 특진. 10월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가 되어 「극기복례설」을 지음. 12월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 1583년(선조16년) 48세 : 2월 「시무육조」 지어 올림. 3월 경연에서 십만양병을 건의함. 6월 동인의 탄핵을 받고 파주로 돌아갔다가 7월에 석담으로 돌아감. 9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 1584년(선조17년) 49세 : 1월 「육조방략」을 최후로 지음. 1월 16일 한양 대사동에서 별세함. 3월 20일 파주 자운산에 안장됨. - 1624년(인조2년) : 문성(文成)의 시호를 받음. - 1681년(숙종7년) : 문묘의 종사를 허락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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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진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의 여러 중학교와 경기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으며, EBS 교육방송 입시학원 등에서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저서에 <독서불패>, <다산 정약용 리더십>, <책과 소통한 사람들의 이야기>, <독서대왕 정조>, <자제력으로 새로워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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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머리말 - 경세제민의 개혁가.교육자, 율곡 이이
율곡은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경세가였다. 율곡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0만양병설이다. 율곡은 1583년 경연장에서 나라의 형세가 극도로 부실해서 10년이 못 가서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10만양병을 건의하였다.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명을 배치하고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해서 나라의 위급상황에 대비하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율곡의 이런 주장에 대해, 유성룡은 태평한 시절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공연히 불화를 조성하는 일이라며 반대했으며, 다른 대신들도 유성룡의 말에 동조함으로써 율곡의 우국충정의 뜻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율곡은 유성룡에게 “속유(俗儒)들이야 시의(時宜)를 알지 못해서 그렇다지만 공도 또한 그런 말을 하는가?”라고 말하며, 시대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대신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과연 10년도 채 지나기 전에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유성룡은 탄식하며 “이이는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시대현실을 꿰뚫어보는 율곡의 통찰력과 선견지명이 동시대의 다른 벼슬아치들에 비해 얼마나 탁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율곡은 20년 벼슬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뿐이었다. 율곡은 29살에 호조좌랑으로 첫 관직을 시작한 이래, 48세까지 20년 동안,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 청주목사, 황해도 관찰사,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고위직 벼슬을 두루 거친 사람이라면 관료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태도가 몸에 배어 현실에 안주하여 무사안일한 생활에 빠져 지낼 수 있지만, 율곡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율곡은 늘 깨어 있었으며 쉬지 않고 나라의 상황을 진단하고 개혁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위기 상황에서 건져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동호문답>, <만언봉사>와 같은 상소를 올려서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을 제시하였으며, 제왕학 교과서인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임금께 올림으로써, 위로부터의 기강을 바르게 하여 국기(國基)를 튼튼하게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또한 <학교모범>, <격몽요결>과 같은 교육지침서를 저술하여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율곡은 정치, 경제, 국방,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서 애국애민의 방향을 제시한 민본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다. 율곡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개혁가이자 교육자였던 것이다.
율곡이 이런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게 된 근원은 학문 연마에 있었다. 율곡은 학문을 잘했다. 조선의 유학자들 중에는 세상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초야에 묻혀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며 자신의 고결함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율곡의 학문은 그렇지 않았다. 율곡은 학문을 통해 자신을 수양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았으며, 단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탁상공론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율곡의 학문은 나라 사랑과 국가 경영의 큰 포부를 갖고 부국강병과 민생의 안녕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율곡은 참된 학문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문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참된 학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학문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고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학문한 사람이 세상을 경륜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진정한 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율곡은 벼슬길에 있는 동안에는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위해서 온 힘을 쏟았으며,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는 세상을 경륜할 후진 양성을 위해 교육과 교화에 전심으로 매진했던 것이다.

율곡의 이와 같은 학문관과 교육철학에서 나온 책이 바로 <학교모범>이다. 선조의 명을 받들어 저술한 <학교모범>에서 율곡은 배우는 선비들이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배움을 행할 수 있도록 모두 16가지의 중요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율곡의 가르침은 당시의 배우는 선비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학생들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것이다.
이 책 ‘율곡 이이, 우리 학생들을 지도하다’는 율곡이 <학교모범>에서 제시한 16개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율곡의 가르침에 잘 맞는 동서고금의 좋은 사례들을 곁들여 구성하였다. 아무쪼록 우리 학생들이 율곡의 가르침과 훌륭한 삶을 산 사람들의 좋은 모습을 잘 배워서 장차 나라와 사회에 이바지하고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보람있게 가꾸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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