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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동서양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93753172
· 쪽수 : 220쪽
· 출판일 : 2011-08-22
책 소개
목차
◇중국편
1. 진시황릉과 병마용兵馬俑(1)
황제의 시초, 불로불사를 꿈꾸다
2. 진시황릉과 병마용(2)
세계 8대 불가사의
3. 남경南京 명효릉明孝陵
최초의 걸인 출신 황제의 능
4. 명십삼릉明十三陵(1)-장릉長陵
명나라 최대의 번영, 죽어서도 이어지다
5. 명십삼릉(2)-소릉昭陵
지하 궁전을 위한 벙어리 뜰
6. 명십삼릉(3)-정릉定陵
정릉박물관으로 불리는 지하궁전의 보물들
7. 성경삼릉盛京三陵(1)-청복릉淸福陵
명나라와 만주족의 문화가 접목돼 있는 청 최초의 황제릉
8. 성경삼릉(2)-청소릉淸昭陵
북릉공원이라 불리는 서민들의 휴식처
9. 성경삼릉(3)-청영릉淸永陵
조상묘를 잘 써야 발복한다
10. 청동릉淸東陵(1)-효릉孝陵
사후의 자금성, 청나라 문화의 백미
11. 청동릉(2)-경릉景陵과 유릉裕陵
청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강희제와 건륭제
12. 청동릉(3)-자희릉慈禧陵
수렴청정 서태후의 화려한 능
◇베트남편
1. 후에(Hue)의 뜨득(Tu Duc) 황릉
사후 궁전과 별장이 함께하다
2. 후에의 카이딘(Khai Dinh) 황릉
베트남에서 가장 화려한 최후의 황제릉
◇일본편
1. 오키나와의 슈리성(首里城)과 타마우둔(玉陵)
일본 아닌 일본, 류큐 왕국의 상징
◇에필로그-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참고문헌
리뷰
책속에서
우리가 흔히 책자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병마용은 유약을 바르기 전의 도자기 모습처럼 황토색을 띤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원래 병마용은 대부분 채색이 돼 있었다. 병사들의 머리는 검정색, 얼굴은 분홍색으로 칠해졌으며, 갑옷과 기타 장신구들도 군청색과 초록색, 흰색과 빨간색 등으로 색깔이 입혀졌었다. 게다가 병사들의 손에는 무기가 다 들려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빈손이다. 어찌 된 영문일까?
역사학자들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漢書』, 역도원이 쓴 『수경주水經注』 등을 종합해 볼 때, 진나라 말기 진의 수도 함양을 공격했던 항우와 그의 군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항우의 군대는 진나라를 침범하자마자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해 진시황릉과 관련된 유적 여러 곳을 불태웠다. 황릉은 심하게 파헤쳐지고, 병마용갱을 발견한 군사들은 갱도에 불을 지르고 도용들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게다가 도용들이 들고 있던 실제 병장기들을 모조리 수거해 자신들의 무기로 재사용했다. 이렇게 안 좋은 상태로 매장된 병마용들은 2000년 넘게 땅속에 묻혀 있으면서 침습浸濕을 받으며 다시 한 번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실제로 병마용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 목조로 된 기둥들이 새카맣게 불에 타고 그을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서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날 이 정도의 병마용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중국편 2. 진시황릉과 병마용(2)
명효릉은 조선 왕릉을 조성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26대 임금 고종이 만년에 자신의 황릉을 조성하기 위해 이곳을 참조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보면 “정유년(1897)에 사람을 보내 명나라 능제를 살펴보게 했더니 모든 석물이 아주 굉장했다고 한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합장된 남양주의 홍릉洪陵과 비교해 보면 석물의 종류, 도상, 배치에서 비록 규모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명효릉의 제도를 상당 부분 따랐던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왜 고종은 시기적으로 가까운 청대淸代의 능을 모본으로 삼지 않고 명대의 능을 참고했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이 청에 대한 거부의식과 명나라에 대한 숭배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황제국을 탄생시킨 고종이 명나라를 새롭게 세운 주원장에게 더욱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저 멀리 중국에 있는 중국 황릉 한 기가 우리의 역사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 확인된 것이다.
중국편 3. 남경南京 명효릉明孝陵
1958년 정릉의 지하궁전 발굴이 끝나고 1959년 9월 30일 정릉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한다. 그런데 개관 당일 새벽, 현장에 있던 박물관 주임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답시고 황제와 황후의 시신이 들어 있던 관곽棺槨을 버리라고 지시한다. 관곽이 낡아 시멘트로 새롭게 복제를 해놨으니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몇몇 사람들이 말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만력제와 두 황후의 관곽은 무덤 옆에 있는 산등성이에 조각난 채 버려졌고 그 주위에 살던 농민들이 그것을 수거해서 궤짝이나 새로운 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경우인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66년 중국 대륙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전무후무한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시작된 것이다. 모택동의 지휘 아래 100만 명이 넘는 소년·소녀 홍위병들은 천안문 광장을 떠나 사찰, 공원, 고건축물,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유물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았다. 그러다 이들이 명십삼릉에 도달해 마침내 정릉의 지하궁전까지 찾아낸 것이다. 홍위병들은 이곳이 봉건시대의 상징이며, 황릉의 주인이야말로 지주계급의 총 대표이자 ‘반동분자’라며 지하궁전 안의 유물을 정리한 다음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명루 위 ‘정릉定陵’이라고 새겨진 현판에는 페인트칠을 해 못 쓰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더욱 자신감을 가진 홍위병들은 지하 창고에 보관돼 있던 만력제와 황후의 시신과 황제·황후의 초상화, 발굴 관련사진 등을 모아놓고 모두 소각시켜 버린다. 1966년 8월 24일 ‘혁명적 행동’이라는 이름 아래 정릉 앞 광장은 불바다가 됐다. 자신의 능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던 황제는 그렇게 스러져갔던 것이다.
중국편 6. 명십삼릉(3)-정릉定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