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3883350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10-10-01
책 소개
목차
Prologu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Epilogue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제가 휘건 오빠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하신 것 같은데.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확인 차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뻣뻣했다. 젠장, 목소리가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말뿐일지라도 휘건을 버리겠다는 소리를 해야 하는 마당에, 좋은 목소리가 나와줄 리가 만무하다.
“맞다.”
여지라곤 없이 잘라 대답하신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두 눈이 이제 어쩔 테냐, 하고 묻고 있다.
‘어쩌긴요,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야죠.’
속으로 이죽거린 수완은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할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마음에 없는 소리를 심드렁하게 내뱉은 수완은 내내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에서 힘을 빼고 소파에 풀썩 기댔다. 긴장이 빠져나가고, 대신 허세가 그녀를 채웠다.
“뭐라 했니?”
“들으신 대롭니다.”
“이 할애비를 상대로 허세라도 부릴 참이냐?”
눈치가 귀신인 양반이다. 속이 뜨끔한 수완은 겨우 표정을 유지했다.
“효도하겠다는데, 허세라니요.”
“그럼, 정말 휘건 형이랑 헤어지기라도 할 생각이야?”
민완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휘건일 놓겠다는 소리냐?”
그녀를 마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속을 꿰뚫어보시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로웠다. 수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매일 거울 속에서 보는 모습이 할아버지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었다.
“그게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같은 말 두 번 하시는 걸 싫어하시는 양반이 연거푸 같은 것만 물으신다. 아무래도 슬슬 화가 나시는 모양이다. 수완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씁쓸해졌다. 사방이 적인 가운데서 그래도 할아버지만큼은 그녀의 편일 줄 알았다.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할아버지는 휘건에게 맞선을 주선하신 어머니의 소행에 대해 분노하셨고, 당신의 그 분노를 그녀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또한 휘건을 힘들게 한 책임을 묻고, 더불어 네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고 뭘 하느냐는 야단을 치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자격이니 회수니 하는 극단적인 단어도 쓰셨던 것이고. 그런 할아버지의 속내를 짐작 못 하고 부르자마자 얼씨구나 달려온 꼴이라니. 게다가 도와주겠다 손을 내밀어 주시면 못 이기는 척 그 손을 잡으리라 김칫국부터 마셨으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 번도 누군가의 도움을 바랐던 적이 없었고, 공으로 뭘 얻으려고 했던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기대를 한 거지? 바보머저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자격 운운하시며 회수하시겠다고 하신 건 할아버지세요.”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하겠다고?”
“정확히 말씀하세요. 제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거죠?”
“네 것 하나 지키지 못하는 널 믿을 수 없다.”
드디어 속내를 털어놓는 이 회장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제가 손에 쥔 걸 빼앗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맞받아치는 수완의 목소리도 이 회장의 것 못지않게 차가웠다. 겨우 유지시키고 있던 허세가 깨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침착한 척 앉아서 휘건을 버릴 수 있을 것처럼 굴었던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어쩔 셈이냐?”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고작 맞선이나 보고 다니게 하는 거냐?”
이 회장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다그쳤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이미 알고 있었다. 손녀딸이 곧 죽어도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앉아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손녀딸은 이날 이때껏 도움을 청하는 손을 내밀기는커녕 제 속에 뭘 담고 있는지 꺼내 보이는 것조차 마다했다. 매사가 경쟁이었고, 도전이었다. 그게 다 제 어미의 영향 탓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일개 비서에서 명성그룹의 안주인까지 된 며느리의 야심을 간과해버린 탓이다.
며느리는 수완의 위치에 따라 저의 입지가 달라진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어리광도 부릴 줄 모르게 키우며 제 오빠들과 경쟁하게 하고 더 많이 욕심내게 하고……. 그것도 모르고 손자 중에 수완이 그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좋아만 했으니…….
“어째 대답이 없어. 설마, 그 녀석이 맞선 본 것도 몰랐던 게냐?”
“설마요.”
수완은 겨우 어젯밤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소리는 쏙 뺐다.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모르고 머릴 맞대고 쑥덕공론이던 오빠들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몰랐을 일이다. 오빠들을 노려보며 이를 가는데, 할아버지의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럼, 이제 어쩔 작정이냐?”
그야, 배운 대로 해야지요.
“밟아버릴 겁니다.”
“뭘 어째?”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라도 들은 듯 할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완은 할아버지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도 너무나. 흡족한 웃음을 머금은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한껏 위로 말려 올라갔다.
“등에다 칼을 꽂는 인간은 철저하게 밟아버려야 한다고,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잖습니까. 강휘건이 제 등에다 칼을 꽂았으니 전 그에 따른 응징을 할 겁니다. 할아버지께 배운 그대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