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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3964653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13-11-25
책 소개
목차
Ⅰ. 해마
Ⅱ. 나는 누구?
Ⅲ. 마지막 통화
Ⅳ. 물음표를 갖지 않는 사람들
Ⅴ. 보이지 않는 손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는 단상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길게 마셨다. 그런 뒤, 검은 선글라스 밑으로 입술 끝을 올리더니 다시 두 손을 객석을 향해 뻗었다.
“이 세상에 조절되고 편집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 만든 영화 한 편에 박수치고 감동하는 건 얼마나 정교하게 또 어떤 주제를 향해 편집했는가에 달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공적이고 완성도 높은 인생을 살고자 하는 현대인은 자신의 기억력과 인지력과 집중력을 업그레이드하거나 부분편집을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옛날 철학자들의 것이죠. 이 시대는 달라야 합니다. 달라야 살아남습니다. 우리 시대는 ‘나는 욕망하고 편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여야 합니다.”
“언젠가 자살하려던 사람을 만나 죽음에서 구해낸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 사람은 몹시 견디기 힘든 기억 때문에 지옥 같은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던 상황이었던 모양입디다. 자살을 탈출구라고 생각하고 고층빌딩 난간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어요. 난 그때 바람이나 쐴까 해서 옥상에 올라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찰나였습니다. 그 사내가 난간 앞에서 신발을 벗는 걸 봤죠.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어요. 죽음 말고도 다른 탈출구가 있다면 난간에서 내려오시겠습니까, 하고 말이죠.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주저하는 표정을 짓다가 내려섰습니다. 나는 괴로웠던 기억을 지우고 다른 이의 행복한 기억으로 교체해 넣으면 삶은 달라질 거라고 길게 설명했지요. 그러자 그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죠. 그는 현재 아주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심 교육관의 음성은 속삭임으로 변해 있었다. 뒤따른 정적 속에서 은은한 첼로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갈고리처럼 긴 입술만으로 웃으며 양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시커먼 선글라스가 조명에 하얗게 빛났다.
“얼마나 뜻깊은 일입니까.” 그가 말했다. “누군가의 평온했던 기억이 자살하려던 또 다른 생명을 살게 한다는 게 말입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왜 이토록 많은 것인가. 삶의 오점이자 피멍으로 존재하는 기억. 꿈속에서 재현될까 무서운 공포스런 기억.
지금까지 고객들이 해마의 ‘마술 같은’ 시술로 지운 어두운 기억들만 죄다 끌어모아 이어붙인다면, 어떤 세상이 만들어질까. 암울한 절망과 공포와 폭력이 난무하는 지옥 같은 세상일까. 마치 달걀을 깨서 노른자는 노른자대로 흰자는 흰자대로 따로 모아놓듯이 공포스런 기억들이 조합된 세계는 지옥이며, 행복한 기억들의 조합은 그야말로 유토피아 같은 세계일 거라는 기대로 사람들은 어두운 기억들을 곰팡이 걷어내듯이 지운다. 언제든 절망은 곰팡이 피어나듯 또 찾아올 것이며 분노와 공포가 쓰나미처럼 의식을 덮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냐고?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말해보라고? 글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