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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88994054230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12-04-10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격동의 시대 격정적인 삶을 살다 간 ‘젊은 그들’의 꿈과 좌절
제1장 새 물결 새 바람, 그 이름 개화사상
개화의 선각자, 서울 ‘북촌’ 박규수와 그의 집 ‘사랑방 손님들’
개화사상의 원류 실학파의 ‘북학’과 박제가의 북학사상
제2장 역사의 전면에 나선 ‘젊은 그들’
총체적 난국에 빠진 후기 조선왕조
김옥균, 운명의 마을 서울 ‘북촌’에서 뜨다
젊은 그들, ‘불온서적’을 탐독하고 ‘불온서클’을 조직하다
대원군의 집권과 이에 맞서 이긴 민비의 세 불리기
일본의 조선 침탈 신호탄 운요호 사건
갑신정변의 전주곡 임오군란
고종과 개화파, 일본 미국을 벤치마킹하다
제3장 ‘3일 천하’로 끝난 허무한 꿈
난관에 부닥친 1단계 ‘거사’ 계획
심기일전 ‘거사’ 세부계획을 재수립하다
정변 가담자 포섭 및 행동대원 동원 준비
‘운명의 날’ 1884년 12월 4일, ‘정변’을 결행하다
신정부 조각과 정강 공포
신정부, 청국 군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지다
수구파의 반격과 잔혹한 보복
예견된 실패-디테일이 부족한 스케일
잃은 것과 얻은 것
제4장 참담한 망명 생활-그 ‘잃어버린 10년’
후쿠자와 유키치를 다시 만나다
박영효의 김옥균 콤플렉스
거듭되는 신변위협과 재기의 몸부림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섬으로 추방되다
두 번째 추방지 홋카이도에서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좌절 속에서의 문란한 사생활
피할 수 없는 선택, 거부할 수 없는 유혹-상하이 행
제5장 혜성처럼 떠오르다 운석처럼 떨어지다
더욱 암담해진 조국의 현실
동학농민군 진압과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 지배권을 선점한 일본
상하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다
김옥균 암살은 조중일 ‘3국 합작 모살’
암살자 홍종우의 그 뒤 행적
제6장 망국의 길에서 다시 만난 ‘북촌’ 개화파들의 험난한 행로
재기와 좌절을 반복하며 친일파로 전락한 박영효
정계 복귀 후 미국에 재 망명하여 쓸쓸히 생을 마감한 서광범
자기실현과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다채로운 삶을 살다간 서재필
전통과 근대화를 아우른 중도 개화 주창자 유길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조선의 마지막 개화파’ 김홍집
도피 중 전설 같은 죽음을 당한 올곧은 재정 전문가 어윤중
망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천수天壽를 다한 현실주의자 김윤식
〔에필로그〕인간 김옥균의 빛과 그림자-왜 이 시대에 김옥균을 다시 이야기하는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당시 박규수 집에 가장 빈번히 출입하는 사람은 중인 출신 역관 오경석과 같은 역관이며 한의사인 유대치(본명 유홍기)인데 이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소위 새 물결·새 바람 개화사상의 선각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만나고 만나야만 했는가? 박규수가 처음 만난 사람은 역관 오경석이었다. 오경석은 박규수를 만나기 전인 1853년부터 10여 차례 역관 자격으로 사신을 따라 북경을 왕래하며 서양 문물의 눈부신 발전상에 큰 자극을 받고 각종 신학문 자료를 입수하거나 필사筆寫하여 국내에 가지고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오경석은 서양의 발전상과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은 박규수를 접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만나 뜻을 같이한 시기는 대략 1869년 4월 박규수가 상경한 이후부터였다. 이무렵 오경석은 자신과 동년배(1831년?)이며 신분이 같은 역관이자 한의학자인 유대치를 자주 만나 그에게 신학문을 소개하였다. 두 사람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치일선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오경석은 유대치와 함께 박규수를 만나 개화의 필요성을 건의하였으며, 세 사람은 만남이 거듭되면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였다. 첫 상면부터 유대치의 인품에 매료된 박규수는 그 뒤부터 두 사람을 자기 집 사랑채로 자주 불러 이들과 밀회를 거듭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의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개화가 절실하다는 인식을 함께하게 되었다.
조선 왕국과 조선 민족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이 위기는 일차적으로 서양열강의 동양침탈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고, 이러한 사태가 조선에도 곧 불어 닥칠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대 위기 속에서 조선의 정치는 부패해 있고 조선의 사회와 경제는 세계의 대세 속에서 매우 낙후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대 혁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대 혁신은 조선 왕조의 부분적인 개혁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일대 경장·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개화사상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며 위기를 타개하려는 위정척사파들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대 혁신은 반드시 자주적으로 단행해야 하며 붕괴해가는 중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일대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신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조선도 세계 대세에 보조를 함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선진 과학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 시민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 왕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양반 신분제도를 폐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 안의 각계각층에서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들은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하였는데 박규수의 관서지방 해안 방위책과 오경석의 화륜선(군함) 개발 역설은 국방력 강화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쇄국정책이 시대착오적인 맹목적 국수주의에 기인한다고 판단하고 하루속히 자주적 실력을 배양한 후 개항·개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밖에 이들은 오경석이 주장한 바와 같이 외국과 통상을 하되 중국처럼 외세의 압력에 속아 넘어가 일방적인 교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무역을 해야 하며 조선의 금은을 외국의 물품과 교역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임오군란 후 청국의 태도가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을 얕잡아보며 사사건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에 반발, 일본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1882년 8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일환으로 박영효를 특명전권대사로 하여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종사관 서광범과 김옥균이 고문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여기에는 실세인 민영익도 끼여 있었는데 그는 사실상 사절단 감시자 역할이었다.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한 이때 처음으로 국기인 태극기를 만들어 게양함으로써 우리나라 국기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견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사절단은 말이 사절단이지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출장비도 부족한데다가 당초 목적인 배상금 탕감을 놓고 비굴한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절단은 외무성 이노우에와 협상하여 앞서 언급한 배상금 50만 원에 대한 상환 기한을 당초 5년에서 5년 더 연장하여 10년으로 하고 매년 5만 원씩 분할 납입키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차관 교섭을 벌인 끝에 17만 원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5만 원은 앞서 약속한 일본인 관리 유족 피해 보상금조로 공제하고 나머지 12만 원을 받았으나, 이 역시 사절단 경비와 유학생 학비 지원 등에 충당해버렸다. 이렇게 볼 때 말이 차관 도입이지 실속이 없는 빈손 차관 도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