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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94194226
· 쪽수 : 351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구생패(求生佩)를 손에 쥔 검선(劍仙) 김광택의 눈망울이 파르르 떨렸다. 구생패. 검선의 무예를 높이 산 영조가 언제든 한 번은 검선의 목숨을 약속하며 하사한 증표였다. 허나, 홍대주는 비웃음과 함께 그런 김광택의 일말의 희망마저 날려버렸다.
“아무리 구생패라도 대역죄인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네.”
만모한 눈빛의 홍대주가 짐짓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슬며시 물었다.
“하물며 백사굉이 여기서 살아난다면 세자 저하께서 가장 위험해지신다는 걸, 검선 자네가 모른단 말인가?”
모를 리 없기에 더욱 괴로웠다. 어느 쪽이 더 소중하냐 묻는다 해도 쉬이 대답하지 못할 것을 목숨 걸고 선택해야 하니 가슴만 미어졌다. 벗이냐, 주군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검선에게 백사굉은 단호함을 내보였다. 끝까지 사그라지지 않는 주군에 대한 충성을 두 눈 가득 담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 대역 죄인인 내 목숨은 살릴 수 없어도, 이 왈패 놈 목숨은 구할 수 있지 않겠소!”
그러자 백사굉을 구하겠답시고 형장에 뛰어들었던 장대포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형님! 왜 이러시오! 죽는 날까지 함께하자, 약조하지 않았소!”
‘고(孤)상(霜)’
본디 백 년 전의 상평통보 뒷면엔 아무 표식이 없는 게 정상이었다. 뒷전에 주전소를 표시하기 시작한 건 효종을 이은 숙종 시대부터였다. 그러니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음이었다.
순간 이선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엽전이 바로 북벌지계를 찾을 수 있는 증표야.”
임수웅이 놀란 숨을 들이키며 불쑥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저하! 북벌지계라 하셨습니까?”
“보게. 이 두 글자가 바로 단서네.”
세자의 손에 들린 엽전을 좀 더 자세히 보려 고개 숙이던 임수웅은 문득 기척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고개를 드니 세자도 느꼈는지 단단한 눈매가 더욱 매섭게 굳어져 있었다. 임수웅은 잽싸게 칼을 뽑아 문밖을 향해 내질렀다. 얇은 창호지가 찢기며 날카로운 칼이 밖으로 삐져나갔다.
“아저씨! 따라와요!”
동수가 우물로 뛰어들자 인(人)이 낮게 혀를 찼다.
“실성한 놈이 분명하구나. 자, 그럼 슬슬 끝을 봅시다. 그려!”
햇빛이 들지 않는 우물 속으로 뛰어든 동수는 코로 밀려들어오는 물을 삼키지 않으려 숨을 멈췄다. 부릅뜬 눈으로 사방을 만지며 확인했지만 단단한 돌뿐이었다. 고개 들자 수면에 일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이어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하얀 공기방울이 피어오르며 선비가 물속으로 잠겼다. 동수는 좁은 우물 안에서 머리 위로 떨어진 선비를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선비는 정신을 잃은 듯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가슴팍에서 새어나오는 선혈이 물에 번지는 걸 보니 부상이 심해 보였다.
‘으악! 어쩌지?’
당황해서 한 손으로 선비를 잡아끌자 의식을 완전히 잃은 줄 알았던 선비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내 숨이 막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선비에게 빈 표주박 안의 공기를 대주자 흐릿하게 감탄의 빛이 보였다. 그때 수면 너머 외침이 들렸다.
“세자 나리! 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 모양이시오! 크크크, 어디 기름칠이라도 좀 해주리까? 여기, 기름통을 가져 오너라!”
탁한 우물물 위로 기름이 쏟아졌다. 이어 횃불이 떨어지자 금세 우물 안의 물이 뜨거워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 때문에 놀란 송어가 눈앞에서 기겁해 헤엄치자 동수는 눈을 번쩍이며 송어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