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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4820439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18-12-03
목차
프롤로그 …7
1. 햇살 속으로, 그렇게 …16
2. 해방, 그리고 이별 …23
3. 부자간의 갈등과 이념의 대립 …36
4. 고뇌, 군정에는 참여치 마라 …51
5. 민족의 불행, 독립이 아닌 해방 …67
6. 파르티잔의 허상 아래 …78
7.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120
8. 움트는 봄기운 …138
9. 첫 출근, 첫 사랑 …152
10. 한 남자에게 닻을 내리고 …167
11. 나의 첫 아이 은학 …173
12. 영전(榮轉)과 한여름 설운 꽃은 지고 …187
13. 뜨거운 이름, 어머니와 아들 …223
14. 누님, 제가 힘이 되어 드릴게요 …238
15. 희망을 향해 서다 …253
16. 6월 민주항쟁, 부모와 자식 …262
에필로그 …276
저자소개
책속에서
14
누님, 제가 힘이 되어 드릴게요
집을 나와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설아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대전의 곽 보아스였다. 무슨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그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학교로 찾아갔다가 설아의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라고 했다. 무엇인지 한 손에는 두툼한 것을 들고 있었다. 설아로서는 그의 출현이 너무도 반가웠다. 보아스와 함께 은학이 누워 있는 병실을 들른 후 구내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상하게 여러 날 누님이 꿈에 보였어요.”
“꿈에?”
“그런데 아주 초췌해 보이는 거예요.”
“요즘 내가 좀 그렇긴 해.”
“얼마나 힘드세요. 은학이 수술한다는 소식을 좀 주시지 않고요.”
수술 결과는 어떤가요?”
“응,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시는데…아직은 잘 모르지.”
“아무쪼록 수술이 잘 되었기만을 빌게요.”
어린 것이 사투를 벌이다시피 수술대에 올랐는데도 따스한 말 한마디 없고 손 한 번 잡아준 적이 없는 남편이 곽 보아스의 출현으로 인해 더욱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고마워”
“이번에 아버님께서 한약 달이는 기계를 들여놓았어요.”
“한약 달이는 기계?”
“그동안은 약을 집에서 달여 먹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지금까지는 타는지 졸았는지 약탕기를 계속 열어보며 지켜보고 있어야 되었잖아요. 그래서 약을 아예 한의원에서 달여 짜주는 기계지요. 정말 편하고 좋아요.”
“그런 기계도 다 나오는 모양이군.”
아주 찬찬히 은학의 안부와 병세를 묻고 조근 조근 이야기 하는 보아스의 모습은 자상한 남편감의 자화상인 듯 설아를 설레게 했다.
“학교 출근하며 약 달이기가 어려우실 것 같아 좋은 약제를 써서 두 제 달여 왔어요. 이건 매형 거구요. 누님만 드시면 매형이 섭섭해 하실 것 같아…….”
따지고 보면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곽 보아스는 어쩜 이리도 스스럼없이 누님이라며, 매형이라며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지, 이제는 그 속에서 다정함이 느껴졌다.
어차피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음식을 주문했다. 아미는 병원에서 나오는 밥을 오빠와 나누어 먹을 것이니 들어갈 때 빵이라도 사다 주리라고 생각했다.
둘은 병원의 정원을 가로질러 설아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우선 약을 방에 두고 나올 셈이었다. 왜 여관에서 사느냐고 곽보아스는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집은 멀고, 여긴 병원에 드나들기가 좋으니까.”
쓸쓸히 말하는 설아의 표정에서 보아스는 그녀의 생활이 뭔가 편안치 않다는 낌새를 느꼈다. 우환이 도둑이라고, 은학의 수술이 간단한 문제일 수만은 없을 것이었다.
보아스는 돌아가겠다고 서둘렀다.
“미안하군, 번번이.”
그렇게 말하고 보니 설아는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의 것이 당당히 내 것일 수 있는데 그사이에는 다리가 있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그러한 다리조차 없으면 연결고리도 없이 떠도는 각각의 섬에 불과할 터였다. 설아는 곽 보아스를 향해 고맙고 미안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이번엔 그를 배웅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함께 나갔다. 곽 보아스는 들어가라고 했지만 설아는 굳이 고집을 부렸다.
“나도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거든.”
그러자 그가 웃었다. 그것은 보아스가 전에 설아에게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누님, 곧 또 올라올게요.”
“힘든데 오지 마.”
“저는 누님이 보고 싶은걸요.”
개찰구를 빠져나가려다 말고 그는 설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힘내세요. 제가 힘이 되어 드릴게요.”
그리고 그는 멀어져갔다. 설아는 그 한마디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제가 힘이 되어드릴게요.’ 일찍이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은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짐만 지우고 떠나들 갔다. 더구나 지금은 너무나 힘든 일뿐이다. “제가 힘이 되어드릴게요.” 이게 얼마나 든든하고 정겨운 말인가를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말 한마디에 그간의 겪은 모든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어깨가 한결 가벼워짐은 무슨 조화인지 설아는 의아했다. 이런 말을 누구나 서로 주고받는다면 세상은 그렇게 살벌하지만은 않으리라.
퇴근길에 오래간만에 병원에 들른 허성재는 은학에게만 신경을 썼고 설아에게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사촌 동생이 입대하기까지 설아가 나와 있는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자는 말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허성재의 그런 행동이 설아는 서운하지 않고 덤덤하게 느껴짐은 분명 곽 보아스의 역할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허성재가 나가고 설아는 고개를 숙이다가 발등 위로 떨어진 자신의 강렬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래, 은학이 퇴원하는 날 함께 들어가자꾸나.’ 그때 가서 그 치한이 아직도 집에 있으면 단호히 내쫓아 보내리라.
고단한 몸과 착잡한 생각 속에서 은학의 퇴원 일자만 기다리는 중에 곽 보아스가 다시 상경했다. 이번에는 대학로의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어디 새벽녘 풀숲을 헤쳐 온 사슴이기나 한 것처럼 그에게서는 싱그러운 향내가 느껴졌다. 주점 집 여자, 이불 집 여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맞는 얘기일까. 알고 보면 그 여자도 본바탕은 그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불행하고 궁핍한 삶이 그녀를 그런 곳으로 몰아냈을 거라고 설아는 생각해 보았다.
마음 바탕에 숨어서 잘 드러나지는 않는 그 어떤 미움이 고정관념을 만들면서 음울한 곳으로 생각을 몰아갔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헤어 나오려 애를 쓰면서 설아는 곽 보아스를 건너다보았다.
“누님! 약은 드시는 겁니까? 얼굴이 전보다 더 안 돼 보이세요.”
“피곤해서 그래. 병원이라는 곳은 생각만으로도 지치는 곳 아니겠어?”
“그렇긴 해요. 그런데 누님, 아버님이 돈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 알고 계셔요?”
“알고 있지. 원래도 그런 분인데 전쟁 후에 생각이 더욱 많이 변하셨을 거야. 사실 돈이란 것은 사람이 쫓아다닌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그런데 왜?”
“맞지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제 어머니는요, 후덕한 아버님께서 저희를 불쌍히 보시고 살 만큼 해주시는데도 돈 욕심이 무한정이란 것은 모르실 테죠. 제 어머니가 아니면 아버님과 헤어지게 만들고만 싶습니다. 꼭 속이 시커먼 동물 같아 보여 정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런 부모를 두고 제가 어찌 그 신성한 사제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말을 이어나가는 보아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이런 말까지 하는 그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어 설아는 그를 새삼스럽다며 다시 보았다. 그때 그는 무엇인가를 윗주머니에서 꺼냈다.
“한의원은 아버님이 용한 의원이시고, 가장 좋은 약재만 쓴다고 소문이 나서 원동에서까지 날로 환자가 많이 옵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고 있습니다.”
설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서두가 긴 것일까, 본인 어머니를 비하하면서까지. 설아는 모든 게 궁금할 뿐이었다.
“이건 수표예요. 누님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거예요.”
“뭐? 집 한 채 값이라고? 왜? 왜 나를 그렇게나 생각하는 거지?”
“알고 보면 전 재산이 모두 누님 것이어야 마땅한 일인데 제가 이렇게 행동해서 정말 죄송해요.”
보아스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 있으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이치가 여기에 있었다. 얼마 후 그가 고개를 들더니 명랑하게 말했다.
“누님, 배고파요. 기차 시간을 대려다가 점심을 놓쳤거든요.”
설아는 자리를 옮겨 조용한 한식집으로 들어갔다. 그를 모처럼 가까이에서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눈동자가 머루알처럼 뚜렷하게 검고 투명해 보였다. 인상이 맑고 부드러워 매력적인 남자였다. 신부는 포기한 지 오래고, 곽 보아스가 어느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를 상상해보는 일은 흥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