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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인
· ISBN : 9788997201112
· 쪽수 : 440쪽
책 소개
목차
이 책에 대해
프롤로그
Part 01 나를 키운 사람들
Chapter 1
고향 스타브로폴
전쟁의 상흔
학교로 돌아가다
트랙터 조수로
Chapter 2장
모교 모스크바국립대
사회 활동에 뛰어들다
입당원서
라이사와의 첫 만남
학생 결혼식
졸업
Chapter 3
첫 임지 스타브로폴
당을 믿지 않는 사람들
모스크바를 오가며
표도르 쿨라코프와 라이사
후루시초프 숭배자 에프레모프
Chapter 4
지방당 서기가 되다
체제의 틀 안에서
크고작은 사건들
Part 02 정상으로 가는 길
Chapter 5
최초의 페레스트로이카 실험
이너서클에 들어가다
안드로포프, 코시긴, 쿨라코프
Chapter 6
스타브로폴을 떠나다
중앙무대에서의 첫 연설
당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가 되다
Chapter 7
권력 핵심으로
브레즈네프 정체기
Chapter 8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식량난
밑빠진 독에 물 붇기
궁정 암투
버터와 총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대결
브레즈네프 사망
Chapter 9
안드로포프 당서기장 재임 450일
레닌 탄생 113주년 기념 연설
안드로포프의 퇴장
강대국을 이끈 병자(病者) 체르넨코
체르넨코의 마지막 날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우여곡절 끝에 서기장이 되다
Chapter 10
아내의 발병
혈액암 진단
회상
뮌스터 병원
분노의 시간들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실
Part 03
페레스트로이카의 길
Chapter 11
변화의 출발점에 서다
술과의 전쟁
시험대에 오른 글라스노스트
체르노빌 충격
경고음이 울리다
Chapter 12
새로운 세계관
핵 없는 세상을 향해
위기에 처한 제네바 정신
Chapter 13
지도부 균열
저서 ‘페레스트로이카’ 출간
옐친과 나
과격 세력의 저항
니나 안드레예바의 반(反)페레스트로이카 선언
양극단의 협공 받는 페레스트로이카
Chapter 14
신사고 헌장
유엔총회 연설
다당제로의 길을 열다
봇물 터진 독립선언
8월 쿠데타
연방 사수를 위한 최후의 안간힘
연방 해체를 위한 옐친의 비밀작전
벨라베자 음모
에필로그
해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인의 자화상-김흥식 전 연합뉴스 모스크바특파원
리뷰
책속에서
…그래서 어머니는 크렘린 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우리 부부는 돌아가며 어머니를 찾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나는 혼자서 갔다. 우리는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 늦게 헤어졌다…. 어머니는 이튿날 새벽 4시에 돌아가셨다. 운명하기 전에 의사들이 나한테 남길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다. “그 애가 다 알아요.”
프롤로그
(2000년 9월 21일에 쓴 일기)
라이사가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오늘은 아내의 묘소에 묘비가 세워지는 날이라 가족과 친지들이 아내의 무덤에 모두 모였다. 비석은 조각가 프리드리히 소고얀의 작품이다. 알록달록한 대리석 비석은 표면이 마치 꽃으로 장식한 돌판 같았다. 아주 큰 돌이었다. 비문은 이렇게 쓰여졌다.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1932년 1월 5일 태어나 1999년 9월 20일에 잠들다.’ 라이사를 빼닮은 젊은 여인이 몸을 구부리고 묘비에 야생화 다발을 놓았다. 벌써 1년이 지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1년이었다. 사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여러 달 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딸 이리나와 외손녀 크세냐, 아나스타샤, 그리고 친구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라이사가 떠난 다음에는 몇 달 동안 강연 일정도 모두 중단하고, 그저 다차에 처박혀 있기만 했다. 그처럼 지독한 고독감은 전에는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라이사와 나는 50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늘 꼭 붙어서 지냈지만 한 번도 서로 지루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같이 있으면 우리는 그저 행복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둘이만 있을 때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한 적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젊은 시절에 시작한 사랑을 끝까지 키워나간다는 언약을 굳게 지키며 살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라이사의 죽음에 대해 나는 너무 큰 죄책감을 느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왜 아내를 지켜내지 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온갖 기억을 다 되살려내 보았다. 우리가 겪은 일들이 나중에 라이사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런 양심도, 책임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권력을 차지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내는 가끔 그 일을 입에 올렸고, 그러면 나는 늘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면 아내는 이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보면 나는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내와의 마지막 시간이 된 9월 19일부터 20일 사이의 밤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아내는 1999년 9월 20일 새벽 2시 57분에 눈을 감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 없이 눈을 감았다. 서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아내는 자기 여동생 루드밀라로부터 줄기세포 이식수술을 받기로 한 날을 이틀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우리가 모스크바의 혼인등록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한 지 46주년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내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도저히 아내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이리나와 나는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붙어 앉아 하염없이 아내를 불러댔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 자카르카, 가지 마, 내 말 들려?” (나는 집안에서 아내를 자카르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손을 꼭 쥐면 아내가 나의 애원에 응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라이사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앓아눕기 전에 아내와 나는 우리의 장래에 대해 수시로 이야기했다. 한번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없으면 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어때요? 아마도 당신은 내가 죽으면 다른 여자와 재혼해서 살겠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누가 죽는다고 그래. 당신은 아직 젊어. 거울을 한번 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못 들었어요? 당신은 너무 지쳐서 좀 쉬어야 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면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노인네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아요.” 손녀가 태어나자 얘들이 자기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를 놓고 우리는 머리를 짜냈다. 아내는 바불랴라고 불러 주면 좋겠다고 했다. 직역하면 ‘작은 할머니’란 말이다. 흔히 하는 것처럼 바부시카라고 부르면 너무 늙고 병든 할머니가 연상되어 싫고, 바불랴라고 하면 그나마 좀 젊고 생기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내는 우리가 서로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꿨다. 점점 더 불안해했다. “그만 하고 돌아가고 싶어요.” 여행길에 아내는 가끔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고 장거리 여행 때는 자기가 내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두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혼자 남겨 놓고 떠나면 더 슬퍼할 게 분명했다.
…그날 밤 딸 이리나와 나는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서서 울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2001년 1월 5일에 쓴 일기)
라이사의 생일이다. 살아 있으면 69세가 된다. 장래 이야기를 하면 아내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더도 덜도 없이 새로운 세기와 새천년이 시작될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아내는 새천년이 시작되기 석 달 전에 눈을 감았다. 아내는 2000년 새해를 영원히 기억될 방식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때까지 이리나와 손녀들은 파리 구경을 한 번도 못해 봤다. 그래서 우리는 2000년 새해를 아이들을 데리고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도시의 샹젤리제 거리로 가서 맞이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새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그 끔찍한 일이 닥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리나와 아이들과 함께 파리 여행을 예정대로 했다. 라이사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노보데비치 묘지로 갔다. 꽃을 한 아름 안고 갔다. 정교회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밤에는 눈이 왔다. 나는 라이사가 제일 좋아하는 빨간 장미를 가져갔다. 그날 묘지에서 본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묘비를 덮은 희디흰 눈 위에 빨간 장미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벽에는 아내의 큰 초상화가 걸려 있다. 집안 곳곳에 꽃과 촛불이 장식되어 있고, 예쁘게 장식된 성탄 트리가 놓여 있고, 트리 향이 집안에 퍼졌다. 식탁에는 아내가 손님맞이 할 때 내놓곤 했던 음식을 차려놓았다. 시베리아식 펠메니 수프와 아방가르드 파이를 곁들인 러시아 디너였다. 크렘린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파이인데, 아방가르드란 이름은 아내가 붙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선 채로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었다.
저녁을 마친 다음 서재로 갔다. 전등을 모두 끄고 창가에 섰다. 다차 마당에는 야간등이 켜져 있고, 우거진 숲 위로 소리 없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볼쇼이극장에서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를 앞둔 제야는 볼쇼이극장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면 새해 선물을 주고받았다. 산타크로스는 대통령궁의 경비가 아무리 삼엄해도 어김없이 선물을 갖고 왔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졌다.
이런 기억들은 이제 모두 지나간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내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라이사는 러시아의 겨울을 무척 좋아해서 눈보라 속에서 밖으로 나가 걸어 다니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스타브로폴에 살 때부터 그랬는데, 한번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을 뻔한 일도 있다. 그런 습관은 모스크바로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 아내는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과 젊은 시절을 모두 그곳 시베리아에서 보냈다. 가족 모두 철도 노동자로 일했는데, 북부 우랄의 타이가 삼림지대에서 여러 해를 보내기도 했다.
그 시절 라이사와 제냐, 류도치카, 어린 세 자매는 양털가죽 코트에 돌돌 싸인 채 썰매에 태워져 이사를 다녔다. 길고 긴 시베리아의 겨울밤 가족은 펠메니를 끓여 자루에 넣어 바깥에 내놓았는데, 그러면 펠메니는 꽁꽁 얼어붙었다. 펠메니는 라이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아내의 마지막 날들이 생각난다. 아내는 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고,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꿋꿋이 견뎌냈다. 나는 눈뜨고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아내는 나와 딸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도저히 해답을 구하기 힘든 물음에 답을 구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7월 19일 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아내를 병실로 데려갈 때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내 눈을 쳐다보면서 아내는 이렇게 물었다.
“의사가 뭐라고 해요?”
아내의 상태를 알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심각한 혈액병이라고 해요.”
“이제 끝인가요?” 아내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아니요. 내일 독일로 가서 진찰을 더 받아볼 예정이오. 그래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다음 치료 방법을 정하기로 했어요.”
라이사의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뮌스터로 날아갔다. 9월 21일에 돌아올 때 라이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승에서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우리의 삶에 대해 책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로서는 너무 쓰기 힘든 책이었다. 이 책에는 나와 우리 부부가 살아 온 삶에 대한 회고와 추억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