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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7830398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12-09-28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청운동 고급 주택가 밤.
자동차 안의 남자는 차창유리로 2층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주택은 붉은 담 벽을 뒤덮은 담쟁이넝쿨하며, 담 너머로 살짝 드리워진 목련가지 등 변한 게 거의 없었다.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
어두운 차 안, 핸들에 올려 있던 남자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참으리라, 아직 때가 아니기에 기다리자 했던 분노가 양손을 타고 부들부들 감겨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 가고 남자는 곧 어렵지 않게 스스로를 추슬렀다.
피식, 그의 입매가 미소 같지 않은 미소를 만들어내며 희미하게 휘어졌다. 눈은 차갑고, 입술은 부드럽게.
남자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어둠과 정적을 흐트러트리며 카스테레오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장송곡이 음습한 느낌을 싣고 좁은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밖은 어느 집 라일락꽃이 만개했는지 여름 밤공기를 타고 싱그러운 향내가 가득하기만 했다.
어둠 속에서 기교 넘치는 피아노 선율에 심취한 듯 흡족하게 숨을 내쉬던 남자는 눈빛만은 날카롭게 위쪽을 응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2층 창가 커튼이 걷히더니 발코니 쪽으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차 안의 남자는 상체를 당겨 앞 유리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서해인! 서준구의 딸, 서해인이다!
남자의 시선이 여자에게 못 박힌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검은 눈동자 속 지독한 냉기를 그녀도 느꼈던 것일까? 여자가 갑자기 오스스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이내 팔짱 낀 양팔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민소매 하얀 원피스, 긴 생머리,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자태의 여자는 앞쪽으로 몇 발짝 더 다가왔고, 가슴에서 교차시켰던 팔을 내려 난간을 짚었다. 그리고 머리 위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시선을 헤매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여자가 돌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외롭고 딱해 뵈는 몸짓이었다. 마치 깊은 시름이라도 있는 양 작고 마른 몸이 날숨에 눌려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를 지켜보던 남자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하지만 그는 곧 잘생긴 입술 끝을 살짝 비틀며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거칠게 방향을 돌려 멀어져 가는 검정 세단 뒤로 지옥을 오가는 운송수단을 연상시키듯 음산한 연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