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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7830862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13-02-22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_ 7
1. 재회, 광기(狂氣)의 연희 _ 14
2. 교차 ; 참 빌어먹을, 혹은 이 죽일 놈의 _ 43
3. 봄날의 시작, 그러나 아직은 겨울 _ 63
4. 일상의 뒤틀림 _ 93
5. 피치 못할, 그러나 위험한 시도 _ 113
6. 꿈에-夢 _ 140
7. 비밀-SECRET! _ 168
8. 판도라의 상자 _ 181
9. 혼돈-진실과 거짓 _ 206
10. 드러나는 진실의 파편 _ 231
11. 눈동자가 쫓는 것은 _ 256
12. 폭풍전야 _ 287
13. 진실, 그리고 개전! _ 305
14. 숙명적 흐름 _ 328
15. 결전 _ 359
16. 사랑 愛 _ 383
에필로그 _ 396
저자소개
책속에서
인적 없는 거리에 타닥타닥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지라 령의 발걸음은 뛰듯이 빨라졌다.
아버지와 리, 그리고 치엔.
령의 운명을 둘러싼 세 남자가 령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한 사람은 령을 낳아준 아비이고, 또 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치엔은……. 치엔을 떠올린 예령의 얼굴에 어둠이 스쳤다.
그는 비열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령의 약혼자이자 회(會)의 후계자인 리의 자리를 탐냈고, 결국 순진한 그녀의 아버지를 꼬여냈다. 그녀의 행복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던 아버지는 령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치엔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치엔은 그야말로 악의 축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아버지와 손을 잡고 리를 죽이려고 한다.
아버지와 치엔의 대화를 떠올린 령의 얼굴에 참담함이 스쳤다.
‘내일이 바로 결전의 날입니다. 떨리십니까?’
‘네, 떨립니다. 기대와 흥분으로 아주 오싹오싹합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음흉한 시선이 오가고 그들은 미리 축배를 들었다.
치엔이 회(會)의 주인이 되고, 령은 그의 아내가 된다고 했다. 령은 거래의 증거이자 인질이었다. 회의 본가에 머물고 있던 령을 집으로 소환한 이유가 있었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령은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했다.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거래되는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을 느낄 새도 없이 령은 사랑하는 남자의 신변을 걱정해야 했다.
령의 머릿속에는 그를 구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공격받게 되면 리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죽게 된다.
령은 그대로 집을 뛰쳐나와 회(會)의 본가로 달려갔다. 9진(進)의 사합원(四合院)은 지극히도 폐쇄적이지만, 비밀통로를 알고 있기에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는, 다정하고 좋은 남자이니 사정을 이야기하면 아버지를 살려줄 거야.”
령이 스스로를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회(會)의 후계자가 다정하고 좋은 남자라는 것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령이 아는 리는 좋은 남자였다.
거친 말투로 툴툴대면서도 령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줬다. 그가 령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리가 나쁜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령의 생각이 순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령은 리를 믿었다. 그는 은혜를 쉽게 잊는 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비밀통로 입구에 다다른 령이 조심스럽게 수풀 사이를 헤쳤다. 입구는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지만, 이미 존재를 알고 수색하는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령은 조심스럽게 통로에 몸을 실었다. 회(會)의 주요인물들이 가끔 외유를 나갈 때 쓰는 곳이라 그런지 깨끗하고 쾌적했다.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복잡한 기관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이미 리에게 파훼법을 전해들은 령으로선 통로를 통과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령은 비밀통로를 전부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통로에 몸을 실었을 때처럼, 조심스런 몸짓으로 통로를 빠져나온 예령은 리의 처소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리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령?”
의문 가득한 목소리에 령이 번쩍 고개를 들었고, 곧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다.
“리!”
령이 반갑고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리가 머물고 있는 2진(進)의 사합원(四合院)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였기에, 곧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바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령은 서둘러 리에게 달려갔다.
“뭐가 그리 급해?”
리가 느릿한 목소리로 질문했지만 령은 태연하게 리의 말을 받아줄 정신이 없었다.
“리,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요. 굉장히 급한 일이야.”
령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접근했다.
그녀가 엿들은 바에 의하자면 결전은 바로 내일이었다. 지금 당장 대응책을 모색해도 모자랄 정도로 굉장히 급박한 상황이었다.
“당신이 위험해!”
령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아버지와 리, 두 사람 모두 소중하기에 령은 누군가를 선택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해서 두 사람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령은 설사 불효녀가 되더라도 그 길을 택할 뿐이었다.
“내가 위험하다고?”
“치엔이 반역을 모의했어요. 내 아버지와 손을 잡았다고요. 결전의 날이 바로 내일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것은…… 연판장이에요.”
서재에서 몰래 훔쳐온 연판장을 령이 내밀었다. 치엔이 령을 희롱하며 비웃을 때 은밀하게 훔쳐온 것이었다.
“아아.”
하지만 리는 령에게서 연판장을 받아들지 않았다. 다만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받아요. 어서!”
령이 채근했지만 리는 여전히 복잡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리!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어서 연판장을 받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를 구분해요. 그리고 역도들을 먼저 물리쳐요. 날 믿어요. 난 당신한테 나쁜 일 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령을 못 믿어서, 의심해서 그런가 싶어 령은 서러움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티엔렁과 그의 아들 리는 자신을 굳게 믿고 있다며 낄낄대던 치엔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야. 아버지와 치엔이 손을 잡았어요. 저우타오도 그렇고, 덩라이도 당신을 배신했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아, 그래! 연판장을 보여줄게요. 당신이 직접 보고 판단해요.”
령이 연판장을 뒤적여 그들의 이름을 보여주려고 할 때, 나직한 한숨소리와 함께 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대를 아내로 맞는 내 심정을 그대는 짐작이나 할까?”
알 수 없는 말에 령이 멈칫한 찰나, 갑자기 붉은 천이 령의 시야를 덮었다.
“우리 혼례식에 쓸 너울이다. 어때?”
령은 혼란스러웠다. 안뜰에 서 있던 리의 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천이 들린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너울이라니?
령의 눈에 혼란이 섞였다. 생각 같아서는 도대체 이게 무엇이고, 너울을 지금 왜 들고 있느냐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질문을 하고, 구구절절한 사유를 들을 시간은 그들에게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리! 시간이 없어요.”
령이 그를 재촉했으나 리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름다워. 알아? 그대가 이 너울을 쓰면 참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어. 헌데 정말 아름답구나.”
시간이 급한데 리는 딴소리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에 령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리의 이런 모습이 너무 달콤해서 령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항상 다른 여자만 바라본 리였기에, 그의 변화가 마치 꿈만 같았다.
그때 리가 령의 하얗고 작은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그는 다정했다. 기이하다 생각할 정도로 다정했고, 기묘하다 생각할 정도로 달콤했다.
“날 사랑하나?”
“사랑해요.”
령이 대꾸했다.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아비의 뜻마저 거스르고 달려온 리다.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은, 당신은 어때요? 당신도 날 사랑하나요?”
령이 물었다. 어리석다 해도 좋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평생, 묻지 못할 말이고 듣지 못할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묘한 밤 아름다운 정원에서 령은 구름에 취해 홀린 듯이 물었다.
리의 눈에 아스라하게 암영(暗影)이 번졌다. 아닌가보다. 알고 있는데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리의 모습에 령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령은 외쳤다. 괜찮아요. 날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대신 내가 더 많이 좋아하잖아요. 당신 몫까지 내가 더 많이 사랑하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거짓으로라도 사랑한단 말을 듣고 싶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이 리를 아프게 하고 곤란하게 한다면, 괜찮다. 안 들어도 된다.
그런 말 뭐가 중요해? 령은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어차피 굳이 답을 바란 물음도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도 알고 있고, 앞으로도 바라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령은 그렇게 서운함을 삭였다.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미소를 지었다. 그때 리가 대답했다.
“사랑한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예령은 들었다. 령도 들었다. 령의 얼굴이 화사하게 변했다. 못 믿겠다는 듯, 비록 거짓이고 동정이고 연민이라도 좋으니 행복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빛이 되었다. 그리고 리(悧)는 손을 들어 령의 목을 감쌌다.
“사랑해.”
꺾었다. 꽃이 무너져 내렸다. 고통은 없었다.
리는 간단하고도 간결하게 령의 숨통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