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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04917271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18-06-07
책 소개
목차
1. 뜻밖의 재회
2. 악마의 유혹
3. 희한한 거짓말
4. 위험한 밀회
5. 천사의 헌신
6. 마지막 유리병
외전
작가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흰 눈이 포슬포슬 내리던 1월 1일. 그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황제의 궁전에 수백 대의 마차가 줄지어 당도했고, 무도회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거대한 홀을 빛으로 장식했다. 그 밑에 선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시답잖은 안부를 물으며 웃음을 흘렸다.
정장을 빼입은 신사들은 아가씨들에게 눈인사를 보냈고, 눈짓을 받은 영애들은 묘한 미소로 답하곤 했다. 모두가 신년무도회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시종의 굳은 목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레이디, 제인 웨슬럿 공작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웨슬럿 공작 영애’란 호칭의 효과는 탁월했다. 시끄럽던 대화 소리가 뚝 그쳤다.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활짝 열린 문으로 쏠렸다. 그녀는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귀족들의 얼굴에는 공포나 경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껏 떠올랐다.
일부는 부채를 펴서 표정을 가리고 저마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국은 왔네요.”
“무슨 낯짝으로 예까지 왔는지, 원.”
“악마가 분명한데 성년이 될 때까지 죽이지도 않고 말이죠.”
“웨슬럿 가 사람들이 악마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지요.”
남녀 할 것 없이 대놓고 거북스러워하면서 대체로 ‘악마’나 ‘저주’ 같은 단어를 입에 올렸다. 지난 십구 년간 제인에 관한 소문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최악의 것들이었다. 사람의 팔다리를 가졌으나 얼굴은 괴물을 닮았고, 성격은 무척 사납다고 했다. 그 성격 탓에 가문의 오랜 가신들마저 기함하며 떨어져 나갔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 인물이 파티에 참석했으니, 문으로 향하는 귀족들의 눈빛이 반감으로 가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 위의 반짝이는 윤슬처럼 빛나는 은빛 드레스 자락과 함께 여기저기서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일 듯한 신비한 연녹빛의 긴 곱슬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영애는 설원 위에 내려앉은 봄날의 햇살 같았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마저 녹아내리니 태양을 바라보는 꽃의 심정이 이해되는 바였다. 고운 얼굴에 티 없이 맑은 피부, 서글서글한 눈매와 청초하게 느껴지는 긴 속눈썹. 그 밑에 자리한 푸른 눈동자와 장밋빛 입술은 남성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 미모가 가히 대적할 만한 자가 없을 정도인데, 코르셋으로 꽉 조인 허리와 대비되는 풍성한 치마는 그녀의 지위가 얼마나 고매한지를 각인시켰다.
‘저리 아름다운 여인이 정말 악마일까. 아니면 아름답기에 악마인가.’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자리 잡은 물음이었다.
말을 잃은 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홀에 들어선 제인은 담대한 표정과 우아한 몸짓으로 고귀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지난 수십 년간 그녀에 대한 흉악한 소문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성을 잃고 상사병에 걸리거나 청혼하려 드는 사내들이 수두룩했을 터였다.
충격받은 귀족들의 정신을 수습해 준 건 무도회의 진짜 주인이 당도했다는 시종의 외침이었다.
“황제 폐하와 황비 전하, 황태자 전하와 황자 전하 듭십니다!”
황족들의 등장에 귀족들은 정신을 차리고 단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홀 구석에 자리 잡은 제인도 단상 위, 의자가 놓인 곳을 바라보았다.
곧 근사하게 꾸민 황족들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예복을 입은 황제가 중앙에 섰고, 그의 우측으로 금빛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황비가 자리했다. 황비의 곁에는 그녀를 똑 닮은 젊은 황자가 섰는데, 여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황제의 왼쪽에 선 황태자, 리처드였다. 금발인 황족들 사이에서 홀로 밤하늘보다 더 어두운 머리칼을 지닌 그는 잘난 얼굴에 밝은 피부와 큰 키, 검술로 다져진 몸매마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소문대로 눈매가 무척 차가웠지만, 그것이 또 강인해 보여서 여인들은 볼을 붉게 물들였다.
아가씨들의 마음에 뜨거운 불이 지펴진 상태로 황제의 축하 연설이 시작되었다.
“올해 열아홉이 되어 사교계에 진출한…….”
황제의 목소리가 거대한 홀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제인의 귀에는 닿지 못했다. 그녀는 황태자를 보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각종 유언비어를 잠식시킬 만큼 자신은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감탄하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나갔다. 그것만으로도 무도회에 참석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저 악마가 황태자란 걸 알기 전까지는.’
제인의 사나운 눈빛과 달리 황태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내들처럼 외모에 감탄한 것도 아니고, 싫은 티가 팍팍 나는 제인의 표정에 당황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무관심한 듯 그냥 눈만 마주쳤다. 그렇게 리처드의 시선이 제인에게 꽂혀서 움직이질 않는 사이, 황제의 연설도 막바지로 치달았다.
“이 자리를 빛내주어 고맙소. 기쁘게 즐기길 바라오.”
우렁찬 박수가 쏟아짐과 동시에 제인은 몸을 팩 돌렸다. 더는 이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예의고 나발이고 당장 떠나려는데, 붉은 드레스가 앞을 가로막았다. 겉치마를 커튼처럼 묶어 올려서 언더스커트 일부를 드러낸 폴로네즈 드레스는 금발의 미인과 매우 잘 어울렸다.
“엘리스 스튜더입니다, 제인 공녀.”
엘리스는 치마를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러다가 반쯤 드러난 제인의 가슴을 보고 남몰래 침음을 삼켰다. 저도 몸매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조금은 비교되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슴에 있어야 할 ‘악마의 문양’이 깊은 골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십구 년간 괴소문을 퍼뜨린 그것이 떡하니 드러난 곳에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우윳빛 가슴 언덕만 고혹적인 자태를 내보였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생글생글 웃는 엘리스의 태도에 제인도 억지로 미간 주름을 펴려 노력했다.
“반가워요, 레이디 엘리스. 좀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적합하지 않은 듯하네요. 공녀와의 춤을 고대하는 신사분들이 계시니 저는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드리는 게 좋겠어요.”
부드럽게 포장하긴 했으나 더는 말 섞기 싫단 소리였다.
엘리스도 제인의 속뜻을 모르지 않았지만 놔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녀는 부채를 펼쳐 들고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신사분들의 뜨거운 시선은 제가 아니라 공녀께 향하고 있는걸요. 아아, 그러고 보니 이번이 데뷔 무도회지요? 어디, 어떤 분이 웨슬럿 공녀님의 손을 잡는 영광을 누리게 될지,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엘리스가 뒤에 서 있던 패거리들을 돌아보며 말하자 그녀의 신호를 받은 네 명의 젊은 여성들이 호들갑을 떨며 호응했다.
“저희도 궁금하네요.”
“웨슬럿의 공녀님인데 당연히 인기가 하늘을 찌르겠지요.”
그녀들의 방정스러운 행동에 무도회를 즐기려던 귀족들의 관심이 다시 제인에게로 쏠렸다. 사람들의 이목을 성공적으로 집중시킨 엘리스는 제인이 거부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자자,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웨슬럿의 공녀님이시지요. 공녀님의 외모에 마음이 흔들리는 신사분이 많을 겁니다. 그럼, 어느 분이 영광을 얻을까요?”
엘리스는 마치 경매하듯이 제인을 두고 춤 상대를 찾았다. 그것이 얼마나 예의 없는 행동인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녀는 유력한 차기 황태자비 후보인 자신의 지위를 아낌없이 이용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그녀를 질책하거나 제인에게 춤을 신청하는 이가 없었다.
무도회에 와서 춤 신청을 받지 못하는 레이디는 말 그대로 못난이 취급을 받았다. 그런 엘리스의 무례한 의도를 모두 눈치챘음에도 귀족들은 쉬쉬하며 사태를 관망했다. 제인의 웨슬럿 가문이 엘리스의 스튜더 가문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지녔지만, 제인에 대한 소문이 워낙 좋지 않은 탓에 다들 쉽사리 나서질 못했다.
민망하리만치 고요한 정적 속에서 제인은 가만히 있었다. 엘리스의 속내도 꿰뚫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으나 먼저 나서서 춤을 좀 춰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예뻐도 ‘악마’라는 꼬리표가 달린 한, 사람들은 쉽사리 다가오지 못할 터였다. 엘리스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고, 얄밉게도 완벽하게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제인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어쩜 이리 용기 있는 신사분이 안 계시나요. 공녀, 너무 상심해 말아요. 신사분들이…….”
한껏 조롱하려던 엘리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근처에 서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갈라서고, 그들이 터준 길로 황태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은 제복이 무척 잘 어울리는 리처드는 엘리스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지난 일 년간 그의 눈에 띄기 위해 노력해 왔다. 황제가 춤을 추도록 종용해도 꿈쩍도 안 하던 그였는데, 오늘은 스스로 단상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황태자의 등장에 귀족들은 숨을 죽였다.
현 황제는 웨슬럿보다 스튜더를 지지해 주는 편이었다. 웨슬럿의 권력이 하도 고강하니 황실마저 위협할 지경에 처한 탓이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스튜더 공작가를 밀어주었지만, 황태자는 중립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 그가 두 공녀 중에 누구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 앞으로 연줄을 댈 가문도 정해질 터였다.
리처드의 발걸음이 두 공녀 사이에서 멈추고, 엘리스는 기대를 품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인의 파트너를 찾는 중에 제게 손을 내민다면 웨슬럿 가문에 제대로 망신을 줄 수 있었다. 황제도 그걸 바랄 테고, 황태자도 부친의 뜻에 부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정치였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엘리스와 달리 제인은 리처드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는 두 공녀 사이에서 그의 시선은 오로지 한 명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저와 춤을 추시겠습니까? 제인 공녀.”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고요한 홀에 퍼졌다. 그의 춤 신청은 무척이나 담백했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는 엘리스가 아닌 제인을, 스튜더가 아닌 웨슬럿을 선택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지난 일 년을 기다린 사람처럼 매우 당연하게.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엘리스는 눈을 부릅떴고, 스튜더 가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망연자실해했다.
제인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큼지막하고 잘빠진 손을 지나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여전히 무감정해 보였다. 그 표정이 더 화를 돋운다는 걸 모르는 것일까? 그에게도 최소한의 인격이란 게 있다면,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옳지 못했다.
귀족들이 다 보고 있으니 참아야만 하는데, 속에서는 열이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
“황태자, 전하아?”
어이없음과 비웃음이 섞인 소리가 제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딴 놈이 황족이라니, 그것도 황태자라니 기가 막혀 미칠 지경이었다. 보는 눈만 없었더라면 당장 무기를 뽑아 들고 저 기막힌 얼굴을 두 동강 내었으리라. 그도 아니라면 배에 검이라도 박아주든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화를 억누른 제인은 풍성한 치마폭을 살포시 잡아 올리고 몸을 돌려 그를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춤을 추라는 소리가 빽-빽- 들리는 듯했다. 그 소리를 무시하며 제인은 리처드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미소에 그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지고 그 순간, 제인의 발이 허공을 갈랐다.
퍽- 둔탁한 소리가 리처드의 정강이에서 울렸다. 근처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귀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 경악스러운 사건을 인지했다.
황태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한 춤 신청이 민망하리만치 모질게 까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