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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한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04917783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18-07-30
책 소개
목차
1장. 환생도 지겹다
2장. 뭔가 다른 차원
3장. 금성고, 접수
4장. 다재다능
5장. 전생 디딤돌
6장. 뜨거운 여름
7장. 금강의 재림
8장. 무서운 고3
9장. 기연보다 인연
10장. 새내기는 에이스
11장. 미래 에너지 탐사대
저자소개
책속에서
촤아아악-!
핏방울이 하늘로 튀었다.
얇고 예리한 칼날이 상대의 가슴에 십(十) 자를 만들었다.
털썩!
육중한 거구를 자랑하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패배하다니…….”
“그래도 너 정도면 제법 강한 적이었다, 천마.”
천마(天魔).
마교의 절대자를 물리친 건 놀랍게도 한창 젊은 검객이었다.
절세신룡 이태민.
혜성처럼 강호에 나타나 천하제일검이 된 그가 무림을 구한 것이다.
천마는 이태민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다 죽어가면서도 기백은 잃지 않았다.
“뭣이라? 당금 무림에 나보다 더 강한 무인이 있다는 말이더냐?”
이태민은 한 손으로 귀를 파며 대답했다.
“무림에서는 네가 제일 강하지. 그런데 이전 차원에선 3위 정도 하려나.”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이제 그만 죽어라. 너를 죽이고 마교 잔당 소탕하러 가야 한다.”
이태민이 다시 검을 높이 들었다.
천마의 목숨을 완전히 끊기 위함이다.
그러나 천마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내가 괜히 너를 이곳으로 유인했겠느냐? 삼만 근의 폭약을 묻어두었다!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말을 마친 천마가 두 손을 땅에 붙였다.
단전에 남은 내력을 쥐어짜 폭발시키려는 것이다.
아무리 천하제일검이라 해도 삼만 근의 폭약이 터지면 죽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곳은 절벽 사이의 협곡이다.
몸을 날려 피할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쿠구웅-!
천마의 내력이 폭약을 건드렸다.
절벽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폭발이 일어나며 일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태민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천마를 이기고도 억울하게 죽게 됐는데 여유가 철철 흘러넘쳤다.
“나는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가.”
이태민의 의미심장한 말과 동시에 폭약이 터졌다.
퍼퍼펑!
쿠콰콰쾅-!
굉음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훗날 강호는 천하제일검이 천마와 함께 절벽에 묻혀서 무림을 구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절세신룡 이태민, 아니, 차원의 방랑자 치우는 폭발에 휩쓸리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다음엔 또 어디서 환생할까…….”
***
두 개의 태양과 아홉 개의 달이 뜨는 세계.
천마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한 치우는 아슬란 대륙에서 눈을 떴다.
“늦었구나.”
그의 눈앞에 하얀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노인이 서 있었다.
치우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한 차원에서 죽으면 다른 차원에서 다시 살아난다.
창조의 이유를 깨닫기 전까지 무한정 반복되는 축복이자 징벌이다.
치우는 환생 거듭하며 여러 차원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신이 어떤 법칙을 정했는지 몸으로 터득한 뒤였다.
누군가가 운명을 다하면 그 몸으로 치우의 영혼이 스며든다.
치우가 환생한 날, 몸의 주인은 죽을 운명이었다는 뜻이다.
대신 원래의 몸의 주인이 갖고 있던 기억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따라서 새로운 차원에 적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슬란 대륙에서 치우는 제로딘이라는 마법사 수련생으로 환생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로딘은 평범한 수련생이 아니었다.
무려 대마도사 쿤데라의 제자였다.
흰 수염 노인 쿤데라는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였다.
대마도사는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클래스로 알려져 있었다.
그다음 경지인 현자 클래스를 정복한 마법사는 아직까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제로딘, 오늘따라 이상하구나. 지각을 절대 하지 않더니 눈동자도 자주 흔들리고…….”
“사실은 어제 늦게까지 파이어볼을 연습했습니다.”
“흐음, 무리한 수련은 집중력을 갉아먹는다는 점을 명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쿤데라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치우가 하나뿐인 제자 제로딘으로 환생했다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신과 아바타, 그리고 치우를 제외하면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원을 넘나들며 환생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 수련의 성과를 한번 보자꾸나.”
“네!”
치우는 환생 첫날이지만 착실하게 제로딘 역할을 했다.
대마도사의 제자로 환생한 것은 운이 좋게 잘 풀린 케이스이다.
지난 세 번의 환생에서는 소매치기, 몬스터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헌터, 내공 없는 낭인무사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때와 달리 좋은 스승 밑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억-!
제로딘이 된 치우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는 어제까지의 제로딘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캐스팅, 파이어볼!”
마나로 이루어진 복잡한 수식이 손바닥에 떠올랐다.
곧이어 축구공 크기의 불덩어리가 허공에 나타나 열기를 뿜어냈다.
슈우욱- 퍼엉!
제로딘의 의지대로 한참을 날아간 파이어볼이 통나무를 쓰러뜨렸다.
‘마나를 배열해서 캐스팅을 성공하면 마법이 구현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데?’
치우의 영혼이 깃든 제로딘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마법을 경험하며 희열을 느꼈다.
그의 재능은 천부적이다 못해 악마적이었다.
오죽하면 신으로부터 환생이라는 시험을 받겠는가.
짝짝짝!
“훌륭하구나!”
쿤데라가 박수를 치며 제자의 성취를 칭찬했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하고 또 정진하여라, 제로딘. 너라면 현자의 벽을 넘을지도 모르겠구나.”
대마도사 쿤데라는 괜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예언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이뤄졌다.
아슬란 대륙에서도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쿤데라가 죽고 수련생이던 제로딘은 왕궁마법사를 거쳐 대마도사 클래스에 도달했다.
이후 왕궁에서 은퇴한 그는 기어코 현자의 벽을 넘고 말았다.
88세의 나이에 최초로 현자 클래스의 마법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자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수많은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깨달을 순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제로딘을 찾아왔을 때, 그는 따뜻한 벽난로 앞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현자 클래스에 도달한 제로딘은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을 예측했다.
“또 다른 삶을 살게 되겠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산다는 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아슬란 대륙에서 70년 넘게 제로딘으로 충실한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 평온한 안식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치우가 되어 낯선 차원으로 날아가야 한다.
과연 언제쯤 창조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까.
정말 그런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신의 장난은 아닐까.
현자 제로딘의 마지막 순간, 그가 홀로 유언을 남겼다.
“환생도 지겹다.”
아슬란 대륙에서 네 번째 환생을 마친 치우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환생도 경험했다.
다섯 번째 세계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다.
여섯 번째 차원에서 그는 기계화 군단의 엔지니어로 환생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일곱 번째 환생을 하게 됐다.
번쩍!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곧바로 환생하지 않고 환한 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 영혼이 머물렀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아바타!”
신의 대리자로 영원한 환생을 알려주던 아바타의 기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금빛 날개를 활짝 펼친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내 환생이 끝난 건가?”
치우의 영혼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천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아바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멸망의 인도자 치우, 그대에게 신의 경고를 전하겠어요.”
“신의 경고?”
“당신은 환생을 거듭하며 다른 세상으로부터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답니다.”
“개소리! 난 어느 세계에서건 최강의 자리에 올랐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여, 부디 이번 생에서는 스스로를 희생해 세상을 구하는 기쁨을 깨닫기를. 신의 인내심이 다하면… 영원한 소멸이 찾아올지 몰라요.”
“영원한 소멸? 누가 그따위를 겁낼 것 같아?”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안녕하기를.”
아바타의 날개가 펄럭였다.
치우는 곧 새로운 차원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직감했다.
호기롭게 외쳤지만 막상 영원히 소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환생의 고리를 끊고 진정한 안식과 함께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될까.
아쉽게도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차원으로 빨려가고 있었다.
***
화아악-!
눈을 뜬 치우는 낯선 세상에서 처음 들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최치우, 돌았냐? 대가리에 총 맞았냐고!”
사나운 말투가 자신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일곱 번째 차원으로 환생한 치우는 원래의 몸의 주인이 갖고 있던 기억을 흡수했다.
‘태양계, 지구, 대한민국, 고등학생, 나와 같은 이름, 그리고… 빵셔틀?’
상당히 생소한 용어가 떠올랐다.
헌터나 마법사로 환생했을 때는 기억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환생은 뭔가 달랐다.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가 치우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게다가 치우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상황도 처음이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야? 야?”
불쾌한 감각이 치우의 정신을 깨웠다.
키가 멀대 같은 놈이 손가락으로 치우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최치우 씨,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매점 튀어갔다 오셔야죠. 디지게 맞기 싫으면.”
놈은 치우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태초의 차원 링스 월드에서 제국을 지배한 하이엘프들이 나머지 종족을 노예처럼 부리던 것과 비슷했다.
아주 오래전, 지긋지긋한 환생을 하게 만든 원인이 떠올랐다.
치우는 자기 손으로 죽인 제국의 황제 카이저 레골라스를 기억하며 눈을 부릅떴다.
찌릿!
눈동자에 칼날 같은 살기가 서렸다.
일곱 번의 환생을 거치며 이질적인 차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눈빛이다.
순간적으로 상대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어, 어…….”
치우를 괴롭히던 일진 김병철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도 모르게 치우의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놈은 곧장 머리를 가로저으며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잠깐 졸아들었지만 감히 자신에게 눈을 부라린 치우를 때리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치우는 링스 월드에서 수십만 명을 죽인 멸망의 인도자가 아닌, 금성고 3학년 공식 빵셔틀 최치우이기 때문이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병철아, 선생님 바로 앞!”
그때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국사 선생님은 벌써 앞문을 열고 있었다.
주먹을 뻗기 직전이던 김병철이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최치우를 노려보며 손날로 목을 그었다.
수업이 끝나면 각오하라는 뜻이다.
치우는 반대편 구석 자리에 앉았다.
새롭게 눈을 뜬 차원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하필 환생하게 된 몸의 주인도 상태가 안 좋았다.
50분의 수업 시간 동안 머리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김병철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나중 문제였다.
“다들 137페이지 펼치고 집중!”
국사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선생님을 비롯해 학생 중 누구 하나 최치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원래의 최치우가 수업 시간에 보여주는 태도와 흡사했다.
차원의 방랑자 치우는 금성고 3학년 최치우의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곱 번째 환생을 한 그는 여덟 번째 차원에서 새로운 몸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제부터 나는 최치우다!’
교실 구석에 앉은 치우의 눈이 반짝였다.
계속되는 환생에 질렸지만, 새로운 삶이 시작된 순간만큼은 의지가 생겼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치우는 머릿속 조각들을 맞추며 지구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면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다.
어린아이로 환생하는 것보단 여러모로 편리했다.
치우는 링스 월드에서의 인생과 여섯 번의 환생을 거치며 얻은 지식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거기에 19년에 걸친 최치우의 기억이 더해진 것이다.
물론 지난 차원에서 마음껏 사용하던 능력은 무(無)로 돌아간다.
기억과 지식, 경험만 유지될 뿐 낯선 환경에서 모든 게 새 몸에 맞춰진다.
그러나 엄청난 무기를 지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다른 차원에서의 경험을 활용하면 엄청나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공이 하나도 없는 낭인무사로 환생했어도 천마를 쓰러뜨린 천하제일검이 되는 게 가능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다. 너무하다고!’
치우는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금성고 3학년 최치우는 일곱 번째 환생 중 최악의 케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매일 시장에서 김밥을 팔며 열네 시간씩 일하신다.
단지 어려운 가정 형편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소매치기로 환생한 적도 있었다.
문제는 최치우의 몸 상태와 정신 상태였다.
‘마나는 아예 없고 내공은커녕 단전도 좁쌀만 하고… 게다가 근육도 너무 모자란 체형. 그나마 키가 평균은 되는 게 다행인가. 목, 어깨, 척추, 허리, 무릎까지 자세와 균형도 맞지 않는다. 이런 몸이라면 어린 오크 한 마리도 못 잡고 찢겨 죽겠어.’
이태민으로 환생했을 때는 내공이 없는 대신 튼튼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소매치기는 민첩했고, 제로딘은 마법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최치우로 환생하기 바로 직전, 기계화 군단의 엔지니어는 로봇에 생명을 불어넣는 장인이었다.
그런데 최치우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
19년 동안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봐도 정말 써먹을 재능이라곤 없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약골이라도 다른 장점이 있으면 된다.
하지만 정신 상태는 몸 상태보다 더더욱 심각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왕따를 당하기 시작해서 막 3학년이 됐다.
그간의 오랜 괴롭힘 때문에 최치우의 정신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비뚤어져 있었다.
두려움, 절망, 복종, 무기력함.
이런 감정들이 최치우의 기억을 지배하며 정신을 좀먹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집에서 풀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혼자 최치우를 키운 어머니께 매일 짜증을 냈다.
‘하필 이런 놈으로 환생하다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오죽 학교생활이 힘들었으면 벌써부터 몸과 정신이 이렇게 망가졌을까.
‘그래도 반항이라도 해봤어야지. 애꿎은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아니지, 이놈아.’
최치우가 최치우를 꾸짖었다.
환생을 통해 새로워진 최치우가 과거의 자신을 혼내면서 안타까워했다.
이것은 자책인 동시에 위로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잘살면 된다.
과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이다.
불멸의 전사, 차원 방랑자의 영혼이 깃들었으니 금성고 공식 빵셔틀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국사 시간이 끝나면 금성고를 대표하는 양아치 김병철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일진이라고 설치는 학생들 중에서 제일 질이 안 좋은 놈이 김병철이었다.
보통 고3이 되면 일진도 공부에 신경을 쓴다.
수능이 20대 이후의 인생을 가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병철은 미래를 포기한 인간처럼 계속 막장으로 굴었다.
집이 부자이기 때문에 겁나는 게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어느 차원이나 불공평한 건 마찬가지군. 저런 쓰레기가 부잣집에서 편하게 살고.’
김병철은 약한 학생들만 골라서 지독하게 괴롭히는 인간 말종이었다.
악평이 자자하지만 선생님들도 함부로 훈계하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학교에 거액의 발전 기금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수고하셨습니다!”
50분이 다 지나고 학생들이 국사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김병철의 자리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자신을 마주 보며 비릿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곱 번째 인생도 순탄하지는 않겠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칼 하나로 수십만을 죽이고 제국을 몰락시킨 장본인이 겨우 고등학생 양아치와 싸워야 한다.
최악의 피지컬을 가진 몸이라 잘못하면 환생 첫날에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우스웠다.
‘신이시여, 정말 내 영혼을 인정사정없이 시험하는군. 하늘에서 재밌게 보고 있겠지?’
최치우는 조물주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먼저 팔을 뻗어 김병철을 지목했다.
“양아치 새끼야, 점심시간에 나랑 한판 붙자.”
반 전체가 조용해졌다.
다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30명의 학생이 최치우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전교생이 다 아는 공식 빵셔틀이 성질 더러운 일진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지목당한 김병철도 넋이 나갔다.
사람은 전혀 예상 못 한 일을 당하면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다.
“이 찐따 새끼가 아까부터 진짜 돌았나.”
김병철이 황당한 듯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일어섰다.
다른 학생들은 김병철이 최치우에게 다가가기 쉽도록 길을 비켜줬다.
대부분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공범이다.
왕따는 나쁜 소수의 주동과 침묵하는 다수의 공조에 의해 이뤄지는 범죄 행위이다.
최치우는 애초에 반 친구들로부터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점심시간, 학교 뒤뜰, 애들 다 보는 데서 정식으로 붙자. 내가 지면 졸업할 때까지 군말 없이 노예처럼 산다.”
최치우가 승부수를 던졌다.
이제 막 고3이 됐기에 수능까지 8개월은 더 학교를 다녀야 한다.
남은 학교생활을 편하게 보내려면 과감하게 배팅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교실보다는 뒤뜰이 싸우기 유리한 장소였다.
“군말 없이 노예? 니 입으로 말했다?”
김병철이 미끼를 물었다.
사실 빵셔틀로 살고 있는 지금도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인정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꽤 크다.
최치우는 김병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입으로 두말 안 한다.”
“뭘 잘못 처먹었는지 몰라도 단단히 미쳤네. 점심시간부터 노예 될 준비나 해라.”
딜이 성사됐다.
2시간 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희대의 싸움판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굳이 자신이 이겼을 때의 조건을 걸지 않았다.
그는 김병철을 철저하게 박살 낼 작정이다.
그렇기에 다른 조건이 필요치 않았다.
“야, 저러다 최치우 죽으면 어떡하지?”
“설마 병철이가 그 정도까지 하겠어. 적당히 패고 말겠지.”
“근데 진짜 돌았는지도 몰라. 무슨 깡으로 병철이한테 개기는 걸까?”
“아, 몰라, 난 그냥 공부나 할래.”
같은 반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병철이 최치우를 반 죽인다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저 몇몇이 최치우의 용감한, 혹은 무모한 행동을 궁금해할 따름이었다.
‘두고 봐라. 이제 이놈은, 아니,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 테니까.’
최치우가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모든 차원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높은 곳에 서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는 법이다.
신이 수많은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깨닫기 위해서라도 차원의 정점에 올라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링스 월드에서부터 치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계속되는 환생에 지쳐가도 본성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는다.
싸움을 앞둔 최치우의 눈빛이 투지로 반짝였다.
김병철은 그동안 약한 학생들을 괴롭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 같았다.
***
“야, 야! 진짜 한다!”
“와,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네?”
금성고 학생들은 평소와 다른 이유로 웅성거렸다.
점심시간 종이 치자마자 밥도 마다하고 뒤뜰로 모인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짬이 안 되는 1학년, 2학년들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구경했다.
3학년 공식 빵셔틀 최치우와 일진 김병철이 한판 붙는다는 소문은 이미 전교에 다 퍼졌다.
학생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김병철이 얼마나 잔인하게 최치우를 두들겨 패고 노예로 부릴 것인가.
1%라도 반전을 기대하는 학생은 없었다.
“질질 짜면서 무릎 꿇고 빌면 그만해 줄게. 그니까 더 못 맞겠으면 무릎부터 꿇어.”
김병철이 최치우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고작 빵셔틀이랑 붙는다는 이유로 함께 어울리던 3학년 일진들에게 무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최치우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생각할수록 불쾌한 일이었다.
최치우가 감히 자신에게 도전할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됐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는 쓸데없이 높아졌다.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지. 구경꾼이 많이 몰린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하군.’
최치우는 말없이 김병철을 분석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척하고 있지만 김병철의 상태는 평소 같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흥분하고 당황하면 운동신경은 떨어지고 실수할 확률은 올라간다.
교실 뒤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최치우에게 유리해졌다.
‘게다가 여기.’
최치우가 굳이 학교 뒤뜰을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뒤뜰에는 모래가 곳곳에 뭉쳐 있었다.
씨름장 공사를 하다가 만 흔적이 뒤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최치우는 기억 속 뒤뜰의 지형을 떠올리고 유레카를 외쳤다.
“이제 와서 겁나냐? 미친 새끼가 아가리 닫고 가만히 서 있네.”
김병철이 다시 한번 시비를 걸었다.
최치우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당장 피지컬로 따지면 김병철이 월등하다.
키도 머리 하나는 더 크고 근력이나 민첩성도 비리비리한 최치우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피지컬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최치우는 무려 7차원에 걸친 경험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영혼의 강인함으로는 모든 차원을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럽다.
“입 그만 털고 덤벼.”
최치우의 도발이 김병철의 신경을 왕창 긁었다.
이성을 잃은 그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개새끼가!”
힘이 잔뜩 실렸지만 동작이 무척 컸다.
맞으면 아플 것이다.
그러나 맞아줄 이유가 없다.
최치우는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부우웅-!
무식한 주먹질이 허공을 갈랐다.
이제 공은 최치우에게 넘어왔다.
파박!
그는 섣불리 반격하는 대신 바로 옆의 모래 덩어리를 발로 찼다.
동시에 희뿌연 먼지가 휘날리며 모래가 김병철에게 튀었다.
“이런, 썅!”
김병철이 욕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날아든 모래가 눈에 들어가 보이는 게 없었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스텝을 밟았다.
‘맹아일격(猛牙一擊)!’
아주 미약하지만 그의 오른손에 바람의 힘이 응축됐다.
절세신룡 이태민의 차원에서 권왕(拳王)이 쓰던 무공이다.
내공이 하나도 없는 상태지만 초식은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원래의 위력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순간적인 속도와 파괴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쐐애액- 빠악!
제대로 걸렸다.
최치우의 주먹이 김병철의 아래턱을 강타했다.
순도 100%의 정타가 급소 중의 급소인 아래턱을 날려 버린 것이다.
“커어억……!”
김병철의 눈이 뒤집혔다.
그가 하얀 게거품을 문 채 뒤로 쓰러졌다.
쿠웅!
대(大)자로 뻗은 꼴이 우스웠다.
싸움을 지켜보던 금성고 학생들은 공포 영화를 본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양아치들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덤빌 생각을 못 하게 확실히 끝장을 봐야 한다.
“후우, 후우우!”
최치우의 몸 상태도 좋지는 않았다.
환생을 하자마자 최악의 몸뚱이로 상승 무공인 맹아일격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는 내 얼굴만 봐도… 오줌을 지리게 될 거다.”
최치우는 쓰러진 김병철의 가슴팍에 걸터앉았다.
곧이어 UFC 파이터가 파운딩을 하는 것처럼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김병철의 코에서 쌍코피가 터졌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최치우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환생한 걸 보니 원래 몸의 주인은 오늘 죽을 운명이었다.
어쩌면 쓰러져 있는 김병철에게 맞아서 죽을 운명은 아니었을까.
‘최치우, 이제 네가 나고 내가 너다.’
그는 환생하기 전까지 존재하던 스스로의 복수를 대신 해줄 작정이다.
빠악! 퍼억! 퍼퍼퍽!
힘은 빠졌지만 분노가 실린 주먹이 김병철의 얼굴을 난타했다.
그 살벌한 광경에 싸움 구경을 하는 학생들 모두가 공포감을 느꼈다.
“후, 이만하면 됐다.”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낸 최치우는 오랜만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신이 내린 형벌, 7번째 차원에서의 환생을 즐길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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