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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0041636
· 쪽수 : 480쪽
· 출판일 : 2020-03-17
책 소개
목차
一
二
三
四
第六章. 죄의 무게
一
二
三
四
第七章. 황실요괴대사냥전
一
二
三
四
五
第八章. 천변
一
二
三
四
第九章. 바람은 감은 눈 위로
一
二
三
四
닫는 장
마치며
숨은 장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느새 해의 바로 곁까지 다가온 섭성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의 미간이 팔(八)자를 그렸다.
“무슨 짓이냐?”
“다치셨잖습니까?”
“당장 놓지 못할까!”
“벌써 천벌을 받으셨군요.”
해의 손목을 홱 잡아당긴 섭성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놔라! 감히 어디 손을 대느냐? 너도 네 아비처럼 내 손에 죽고 싶은 것이냐?”
해가 과격하게 손목을 비틀었다. 섭성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린 틈을 타 손목을 빼냈다. 사납게 눈을 치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섭성은 가만히 해를 응시했다. 기이한 일이다. 분노해 마땅한 소리를 들었는데 분노가 일지 않았다.
일곱 해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 식솔 모두를 잃고 늘 원수에 대해 생각했다. 원수가 눈앞에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해보곤 했는데 언제나 답을 알 수 없었다. 그 원수를 다시 만난 순간에도 알 수 없었고, 부모를 모욕하는 말을 들었는데도 마찬가지다.
죄를 모르는 자다. 그가 분노한다고 그녀가 그 죄의 깊이를 알게 될까. 그의 책망에 뉘우치며 후회하게 될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길 잃은 짐승에 불과한 이 계집에겐 화낼 가치조차 없다.
“작은 상처라 해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이리 오십시오.”
섭성이 다시 해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결계 밖으로 나오는 날, 이번에야말로 현북의 땅주인 일족이 완전히 멸족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놓아라! 내 너를 죽일…….”
“군주께선 누구보다 강하시겠지만, 이 안에선 아닙니다. 군주께서는 지금 저를 죽일 수 없습니다.”
냉정히 대꾸하며 섭성이 손에 도력을 모았다. 깊은 밤을 닮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둡고 고요하며 평온한 기운. 해는 그 기운이 유해하지 않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그럼에도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 섭성을 노려보는데, 형구에 쓸리고 까진 손목의 상처가 차츰 아물어갔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너…….”
보이는 상처뿐만 아니다. 천벌에 입었던 내상도 사라졌다. 섭성이 해의 손을 놓아주었다. 해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약한 의문이 떠오른다.
뭇사람들은 양섭성을 두고 가장 무력한 땅주인이라 일컬었다. 직접 경험한 그의 도력은 미미하여 과연 가장 무력하다 칭할 만했다. 하지만 이 순간, 해는 그 평이 단지 도력이 약한 데서만 기인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치유술사였더냐?”
“의술사입니다.”
“그 둘에 차이가 있어?”
해가 의문했다. 섭성의 입가에서 가벼운 한숨이 흩어졌다.
“군주께는 의미 없을 차이입니다.”
치유술사는 의학적 지식 없이 순수하게 도력만으로 사람을 치유한다. 의술사는 의학을 바탕으로 사람을 치유하는데, 더 빠른 치유를 위해 자신의 도력을 쓰는 것뿐이다. 무엇이 주가 되느냐는 치유술사와 의술사를 구분하는 데 있어 아주 큰 차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해에게 별로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녀뿐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치유술사와 의술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 힘으로 잘도 땅주인이 되었구나.”
치유의 힘은 파괴적인 속성과 합이 맞지 않는다. 여차하면 뒤는 후계자에게 맡기고 최전방에 서야 하는 땅주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살생 가능한 힘이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치유와 살생은 양립할 수 없으니, 요괴와의 전장에서 양섭성은 도력 없는 평것과 다를 바 없을 터.
그의 도력은 싸움에 적절하지 않다. 위급 시 누구보다 선봉에 서서 결계를 수호해야 하는 땅주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저따위 도력과 속성으로 여태 현북을 지켜오다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군주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섭성이 조소했다.
“무어?”
해가 눈을 치떴다.
“약해빠진 땅주인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게 지금 군주의 처지입니다.”
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해가 도력을 내뿜었다. 동시에 천벌이 내려쳤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섭성은 어느새 결계 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범위에서 벗어난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곧 흔적 없이 사라질 감정이다.
“기껏 치료해드렸더니 무용한 짓이었군요. 부디 이 밤만큼은 군주의 몸을 소중히 하십시오. 군주께서 타고난 힘을 믿고 유한한 육신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보니 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당장 결계를 열지 못할까? 죽여버리겠다, 양섭성!”
잘 벼려진 분노에도 섭성은 동요 없었다.
“지금은 밤입니다, 군주. 군주께서 아무리 날고뛰어도 달 기운을 업은 요괴를 상대하게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내일 군주께서 저를 죽이신다 해도 오늘은 그곳에 계셔야 할 겁니다. 장왕 전하는 결코 약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섭성의 입에서 장왕이 언급되는 순간, 해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네가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느냐? 네깟 것이 감히!”
섭성은 물러나지 않았다. 벼락같은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세간에서 무어라 떠들던 장왕 전하는 분명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리되었잖습니까? 슬픈 일이지요. 그러니 밤에는 안 됩니다, 군주. 뭇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미치광이라 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세요.”
머리를 툭툭 두드린 섭성이 돌아섰다.
“거기 서라! 거기 서란 말이다! 죽여버리겠다!”
해가 윽박질렀다. 섭성은 그녀를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너는 망가졌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고, 해도 되는 것과 해선 안 되는 것의 차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너는, 그저 '권영'이란 존재에 눈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