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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사회과학계열 > 행정학
· ISBN : 9791130323671
· 쪽수 : 308쪽
· 출판일 : 2025-07-15
책 소개
왜 숙론민주정인가?
"통치가 쟁취의 대상이 되면, 이 싸움은 동족 간 내란으로서 당사자는 물론 다른 시민마저 파멸시킨다."
- 플라톤
"민주정치 질병에 대한 치료법은 더 많은 민주정치다."
- 존 듀이
"정치의 존재이유는 자유다."
- 한나 아렌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의 전원일치로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인용하여 윤 전 대통령을 파면했다. 지난해 12월 14일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지 111일 만의 선고였다. 엄동설한에 더디고 더디게 진행된 헌재의 파면 결정에 민주공화정의 붕괴를 걱정하며 잠을 설쳤던 국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치지도자 탄핵의 역사는 길다. 20여 세기 전 이미 로마공화정에는 자유를 위협한 시민을 민회나 법정에 고발하는 제도가 있었다(Machiavelli, 2022: bk. 1, chap. 7). 16세기 조국 피렌체공화국의 재기를 열망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탄핵제도를 정치지도자가 반역을 꾀하거나 진영싸움에 뛰어들지 못하게 만드는 헌정제도로 평가했다.
내란에 대한 로마공화정의 단죄는 엄격하고 단호했다. 로마공화정의 창건자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집정관으로 취임한 직후 내란 혐의 재판을 맡았다. 끔찍하게도, 왕정복고를 모의하다 체포된 내란 주모자는 바로 자신의 두 아들이었다. 브루투스의 두 아들은 과거 왕 밑에서 누렸던 특권을 잃게 되자 다른 젊은이와 함께 역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끌려왔다. 브루투스는 이 참담한 상황에서 의연하고 단호하게 처신했다. 자신의 두 아들에게 해외 추방형을 내리라는 주변의 권유를 마다하고 다른 내란범과 함께 처형했다.
공화국을 수호하고자 자신의 두 아들을 단호히 처단한 브루투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폭포수처럼 로마인의 가슴에 스며들어 고대 로마를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로마인 비르투(virt?) 의 전범이 되었다. 로마시민에게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 피로 맺어진 부정(父情)을 초월한 브루투스의 공화국 정신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격찬했다(Machiavelli, 2022: bk. 1, chap. 16).
"로마공화정이 향후 자유를 지키고 곤경과 무질서에 대처하기 위해 브루투스가 자신의 두 아들을 처형한 것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며 신중하고 필요한 처방책은 없었다."
민주공화정의 위기
대통령 탄핵으로 헌정위기는 한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아직 내란 심판은 끝나지 않았고, 헌정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은 민주공화정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헌정위기의 극복과 자유헌정질서(constitutio libertatis)의 확립을 위해 12·3 친위쿠데타의 위중한 비상사태를 잠시 복기하고자 한다.
2024년 12월 3일 22시 27분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장갑차와 무장군인을 태운 헬기가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되었다. 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이 중지되었고, 언론과 출판은 통제되었다.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을 당하게 되었다.
이 위중한 상황에서 시민은 국회로 달려가 장갑차와 무장병력을 막아섰다. 군대와 경찰은 상부의 명령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국회 담을 뛰어넘어 본회의장에 집결한 국회의원 190명(야당 172명과 국민의힘 18명)은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가결했다. 이로써 비상계엄은 선포된 지 6시간 3분이 지난 이튿날 새벽 4시 30분 해제되었다.
2024년 12월 7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제1차 표결에서 의결정족수 미달(국회의원 재적 300명 중 재석 195명)로 무산되었다. 일주일 후 제2차 표결에서 국회의원 204명(야당 192명과 국민의힘 12명)은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후 공수처와 검찰 및 경찰 국가수사본부의 내란죄 혐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탄핵심리 재판정에서는 사실과 사실성(factuality) 대 거짓과 허구가 격돌했다. 윤 전 대통령은 온 국민이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목격한 친위쿠데타 혐의를 부인했다.
대통령을 도와 친위쿠데타를 주도한 김용현 전 국방장관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1925)을 애독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장관의 공관을 22차례나 방문해 비상계엄을 모의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는 이른바 "반국가세력" 500여 명을 "수거해 사살"하거나 북한과 밀약하여 연평도 부근 해역에 침몰시키는 방안이 적혀 있었다.
2025년 1월 19일 새벽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수백 명의 시위대는 서울서부지방법원의 시설을 파괴하고 경찰과 시민을 폭행했다. 이 폭동으로 경찰 56명(중상자 11명)과 시민 41명이 다쳤다. 법원 건물과 시설이 파괴되었고, 공수처 차량 2대와 언론사의 취재장비가 파손되었다. 이때 체포된 자는 141명, 구속된 자는 92명에 달했다.
2025년 3월 12일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암살계획을 제보받고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지난해 1월 부산의 흉기 테러 사건에 이은 두 번째 살해 위협이었다. 이에 대해 한 개신교 목사는 페이스북에 이 대표 암살을 부추기는 글을 올렸다.
10%대를 맴돌던 대통령 지지도는 대통령 탄핵정국 이후 30~40%대로 치솟았다. 이해하기 힘든 이변의 중심에 허위정보와 음모론이 있었다. SNS를 통해 민주당은 종북·친중 공산주의 반체제세력이며, 성 소수자 인권을 명분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는 사탄의 무리라는 거짓말이 노인층과 상당수 보수 개신교단의 극우화를 선동했다.
헌재의 탄핵 심판 선고가 지연되면서 헌정위기는 '정치 내전'을 넘어 '폭력 내전'이 우려되는 아노크라시(anocracy) 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V-Dem연구소의 『2025년 민주정치보고서』는 한국이 2023년에 이어 2024년에도 전제화가 진행되어 끝내 자유민주정 국가에서 탈락해 선거민주정 국가로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2024년 우리나라 국민의 63%는 민주정치에 불만을 드러냈다. 권위주의 지배를 선호하는 국민의 비율은 2017년 23%에서 2024년 40%로 상승했다.
민회의 오래된 미래
고대 로마공화정은 요즘 우리가 직면한 헌정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의 단서를 제공한다. 기원전 200년~120년경 그리스의 역사학자 폴리비오스는 로마공화정 번영의 첫 번째 원인이 뛰어난 헌정체제에 있음을 발견했다. 폴리비오스는 포에니전쟁 때 인질로 로마에 끌려갔다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만나 제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조국 그리스의 쇠망과 로마의 번영 원인을 탐구했다. 그가 17년 동안 로마에 살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체험하며 도달한 결론은 집정관(왕정)과 원로원(귀족정)과 민회(민주정)가 어우러진 혼합정체(mixed polity)였다. 로마공화정은 혼합정체를 통해 국내에서 기관 간 견제와 균형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국제관계에서는 조화와 협력의 단결된 힘으로 위기상황을 돌파했다(안성호, 2013: 51-52).
18세기 말 고대사와 고전에 밝았던 미국 제헌회의 참여자들은 로마공화정의 권력분립제를 견제와 균형 원리로 수용했고, 원로원과 민회를 참고해 양원제 입법기관을 설치했다. 이들은 상원의 명칭을 원로원인 sen?tus를 그대로 모방해 'senate'로 지을 만큼 로마공화정을 흠모했다.
그러나 미국 제헌회의 참여자들은 로마공화정의 민회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들은 스승을 죽인 배심재판을 증오한 플라톤 이후 이어진 민주정 혐오 전통에 따라 민회를 금기시했다. 미국헌법의 대표적 설계자였던 제임스 매디슨은 시민집회를 극도로 불신했다. 그는 "불안정, 비정의, 혼란"이야말로 민회의 피할 수 없는 치명적 질병이라고 주장했다(Hamilton, Madison, & Jay, 1999: 71-72). 대다수 제헌의회 참여자들은 매디슨의 견해에 동조했다. 결국, 이들은 미국 독립과 건국의 발원지 뉴잉글랜드의 타운미팅 시민집회를 무시한 순수대의제를 설계했다.
역사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역사 속의 도시』(1961)에서 미국의 제헌회의 참여자들이 뉴잉글랜드 타운미팅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제도화시키지 못한 오류가 "혁명 이후 미국 정치발전의 비극적 실패"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Mumford, 1961: 328-330). 20세기의 대표적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미국 헌정질서의 과두적 대의제에 대한 멈포드의 진단에 공감했다. 그녀는 『혁명론』(1963)에서 제헌회의 참여자들이 직접민주제를 거부한 후 "아메리카의 혁명정신은 사그라졌고, 미국의 위대한 성취인 헌법조차 국민을 기만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Arendt, 2006: 231). 아렌트는 선거전제정(elective despotism)의 위험성을 정확히 간파했다.
르네상스 시대 마키아벨리는 로마 번영의 중심에 원로원과 함께 민회가 있었음을 통찰했다. 그는 『로마사 논고』(1517)에서 로마공화정은 훌륭한 제도의 도입으로 시민의 비르투를 분발시켜 번영했다고 지적했다. 시민의 비르투를 분출시킨 훌륭한 제도의 핵심은 바로 민회였다. 로마공화정에서 시민과 호민관은 민회에 출석하여 법률안을 발의하고 법률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했다(Machiavelli, 2022: bk. 1, chap. 18).
전 세계 모든 나라를 군주가 지배하던 시대에 장-자크 루소는 인민의 동의에 기초한 헌정체제의 설계에 주력했다. 그는 로마공화정의 위대한 힘이 민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루소는 『사회계약론』(1762)에서 번영하는 나라를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강건한 헌법을 만드는 것이며, 그 헌법은 거대한 영토가 제공하는 자원 대신 좋은 정부에서 시민 활력이 솟아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탐욕스럽고 비겁하며 소심하고 자유보다 안일을 더 사랑하고 정부의 끈질긴 훼방에 지쳐 집회를 포기하는 시민은 주권을 잃는다."라고 경고하며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Rousseau, 2020: bk. 3).
"민주정에서 시민은 힘과 절개로 무장하고 매일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 위험한 자유를 더 원한다'고 말해야 한다. 약간의 소란은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인류를 진정으로 번영하게 만드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유다. (…) 주권은 시민이 모였을 때만 행사될 수 있다. 수도 로마와 그 주변에 거주하는 수많은 시민을 소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로마시민은 매주 한 번씩 열리는 집회를 거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일주일에 몇 차례씩 집회를 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고전적 역사학계는 로마공화정의 쇠퇴가 원로원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토지개혁이 단행된 기원전 13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석했다. 민회의 민중이 폭도로 돌변해서 직선 호민관을 민중선동가로 타락시켜 로마공화정을 쇠망의 길에 들어서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난 200년의 로마사 연구는 이런 전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현대 주류 역사학계는 민회를 로마공화정 실패의 원인이 아니라 번영의 열쇠로 이해한다(Richard, 1994; Matsusaka, 2020: 102-104). 로마공화정이 쇠락한 원인은 역기능적인 과두정치, 파괴적 권력투쟁, 상비군의 비대화와 영토확장으로 인한 민회 소집의 어려움과 정당성 약화, 이로 인한 원로원과 집정관 및 장군의 집권화였다. 민회는 500년 로마공화정 번영을 견인한 핵심 국가기관이었다. 로마공화정에서 민회의 활약은 로마시민의 비르투, 안정된 정부, 활기찬 사회를 만들었고, 지중해 연안의 모든 민족을 통합했다. 민회는 방대한 영토를 갖게 된 공화정 말기부터 그 정당성과 위상이 하락했다. 그러나 민회는 제정(帝政)에서도 민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황제들이 비상한 노력을 기울인 것에서 확인되듯이 또 다른 500년 동안 로마제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잃어버린 보물
아렌트는 뉴잉글랜드 타운미팅의 헌정화에 실패한 미국혁명을 "보물을 잃어버린"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했다(Arendt, 2006: chap. 5). 아렌트는 타운미팅을 시민의 정치적 자유가 실현되는 공적 공간으로 이해했다. 미국혁명은 국민에게 자유를 제공했지만, 자유가 행사될 공간은 제공하지 않았다. 국민이 아닌 국민의 대표만이 "표현하고 논의하고 결정하는" 행위, 즉 적극적 의미의 자유 행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는 입헌적 제한정부(limited government)일지라도 시민이 통치에 직접 참여할 정치적 자유의 공간을 봉쇄하는 정부는 건강한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몇 년에 한 번 투표장에 나가는 국민에게서 샘솟는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다. 이웃이 2년에 한 번 불현듯 나타난다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도덕률이 실질적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공화국이 시민 속에 살아 움직이는 실체가 아니면, 자신보다 공화국을 더 사랑하라는 권고는 공허한 훈계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에게 공화주의 정신을 함양할 정치적 자유의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나라는 야망과 권력욕에 불타는 엘리트의 파괴적 권력투쟁을 제어하고 이기심과 당파성을 초월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화국 시민을 가질 수 없다. 히틀러와 스탈린 전체주의는 바로 그런 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이다(Bryan, 2004: xv-xvi, 289).
엘리트와 시민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유일한 치유책은 공화국 시민이 "자유로운 행위(free deeds)"와 "살아 있는 언어(living words)"로 자신을 드러낼 공적 자유공간을 갖는 것이다. "삶에 찬란함을 선사하는 바로 그곳 폴리스에서" 시민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겸손과 절제의 미덕을 갖춘 공화국 시민으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Arendt, 2006: 273).
시민의 공적 행복은 자유헌법질서 수립에 달려 있다. 진정한 공화국은 모든 시민에게 공적 자유공간을 제공해 국정운영의 참여자로서 누릴 공적 행복권을 보장한다. 반면에 전제국가는 통치자가 설혹 법치에 따르더라도 공적 행복권을 독점하고, 국민을 공적 영역에서 내쫓아 가정이라는 프라이버시의 골방에 갇혀 지내도록 강요한다. 이 점에서 순수대의제 정부는 전제국가와 다르지 않다. 간혹 계몽된 전제국가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시혜로, 순수대의제는 보모정부(nanny government)의 복지정책으로 국민에게 사적 편익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와 순수대의제는 모두 국민에게서 통치 참여의 공적 행복을 박탈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공적 행복과 사적 행복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행복추구권을 규정하여 공적 행복의 가치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초로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자 토머스 제퍼슨은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통치에 참여하며 누렸던 "기쁨"은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더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고백했다. 민주공화국은 일반 국민에게도 통치 참여의 기쁨을 누릴 권리를 보장한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는 국민에게 사적 행복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이 공적 행복을 보장하는 공적 자유의 공간 창출을 명령한다.
인간은 자치를 욕구하며 기회가 생기면 자치할 수 있다.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노 오스트롬과 남편 빈센트 오스트롬은 '자치하는 인간'의 세 가지 능력을 '조건부 협동인, 학습인, 창작인'으로 설명했다(안성호, 2018: 68-72). 구한말 기아와 폭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시베리아에 이주한 한인의 촌락자치는 인간의 자치능력과 그 성과를 입증했다. 당시 시베리아 한인은 러시아 제정(帝政)이 잠정적으로 허락한 협소한 자유공간에서 자치를 실천함으로써 국내의 비참한 삶과 대조적으로 활기 있고 윤택한 삶을 살았다(Bishop, 1994: 262-279). 지금도 공적 행복에 대한 국민의 갈망은 계속되고 있다. OECD 회원국 국민의 79%는 중대한 국정 이슈를 직접 결정하길 원한다. 직접참정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열망은 이보다 더 강렬하다. 무려 86%의 대한국민은 중대한 국정 사안을 국민투표로 직접 결정하길 열망하고 있다(Pew Research Center, 2023).
공적 자유공간을 "평의회(councils)"로 이해한 아렌트는 평의회가 공적 자유공간을 파괴하고 일당 독재로 치닫는 직업혁명가와 달리 정당 노선을 초월하는 성향이 있음을 관찰했다. 이른바 초당파성(non-partisanship)은 대면 시민집회인 평의회뿐 아니라 국민발안과 국민투표를 포함한 직접민주제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숙론(熟論)을 촉진한다(Breen, 2018: 410-430; Gartner, 2021: 13-30). 직접민주제의 초당파성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하고 허위정보와 음모론이 횡행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정보 네트워크의 오류 교정장치"(Harari, 2024: chap. 9)로서 직접참정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정치를 오직 집권을 위해 권력투쟁을 일삼는 정당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편협한 정치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다"(Arendt, 1961: 145). 자유의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다.
초정파적 직접참정이 촉진하는 숙론은 내전 상태의 적대적 정당정치를 상생의 공론정치로 도약시키는 헌정혁신의 핵심 가치다. 절대다수의 국민은 싸우는 정치를 넘어선, 숙의·토론하는 새로운 민주정을 갈망하고 있다. 84%의 국민은 '전면적 개혁'(46%) 또는 '중대한 변화'(38%)를 원한다. 헌정체제의 변화에 무관심한 국민은 단 2%에 불과하다(Pew Research Center, 2021).
그러나 그동안 정치권은 국민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고, 중대한 국정 개혁과제는 마냥 방치되었다. 모처럼 정부가 의사증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의료대란을 초래했다. 모든 개혁은 기득권자의 저항에 직면한다. 민주공화국에서 기득권자의 극심한 저항을 극복하려면 강압이 아니라 공감과 설득이 필요하다. 초정파적 직접민주제의 숙론은 느리고 조용하나 강력한 공감력과 설득력을 발동한다. 지난 150년 동안 스위스 연방정부는 1%의 숙론 직접입법으로 다문화사회의 갈등을 잠재우고 국정 난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고도의 정치안정과 산업평화를 누리면서 번영을 구가해왔다.
직접참정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직접민주제를 스위스처럼 인구 1천만 명 미만의 소국이나 지방정부에 적합한 제도라고 고집한다. 하지만 오늘날 인구 규모나 비용 문제는 직접민주제의 불가피한 제약 요인이 아니다. 1911년부터 주민발안제와 주민투표제를 도입하여 세계 5위 국가의 경제를 일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인구는 4천만 명에 이른다. 한때 주민발안 13호(Proposition 13)로 재정적 곤경을 겪었으나 직접민주제의 자정 능력으로 극복했다. 게다가 최근 이런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주민발안제를 혁신했다. 미국에서 가장 빈번하게 직접민주제를 활용해온 캘리포니아주는 인종 갈등을 극복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룬 다문화사회의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Walter, 2025: 275-276). 오늘날 대다수 캘리포니아 주민은 직접민주제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소중한 제도적 자산으로 여긴다(Gardels et al., 2020: chap. 2).
빈약한 민주정에서 숙론민주정으로
윤 전 대통령의 탄핵이 확정된 후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선과 함께 개헌 추진을 제안하자,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를 중심으로 이 제안이 내란의 단죄를 대충 무마하려는 '물타기 개헌' 주장이 아니냐고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내란의 수습이 시급하며, 국민의 숙론을 거치지 않은 졸속 개헌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개헌논의를 마냥 뒤로 미루자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오히려 대선을 계기로 개헌논의가 활성화되고, 개헌 일정과 의제가 핵심 공약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탄핵정국의 종결과 함께 위기의식이 사라지면서 개헌의 절박감도 사라졌다. 절박감 없는 혁신은 성공할 수 없다(Kotter, 2009). 심지어 어느 정치평론가는 대통령을 다시 탄핵으로 응징한 '87년 헌법이야말로 한국 민주정치의 복원력을 증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헌법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주장의 기저에는 '민주정치를 가장 덜 나쁜 정체'로 이해하는 조세프 슘페터의 '엘리트 민주정치'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와 나치의 만행을 목격한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서 민주정치란 결국 "정치엘리트의 지배"일 뿐이며, 국민의 역할은 정치시장에서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에 그친다고 주장했다. 슘페터의 이런 엘리트주의적 대의민주정치 관념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1차대전 종전 후 대공황으로 이어진 혼돈의 시대에 존 듀이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민주정 위기극복 방안을 제안했다. 듀이는 『공중과 그 문제』(1927)에서 "민주정치 질병의 치료법은 더 많은 민주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듀이의 '더 많은 민주정치' 관점은 "저열한 영혼은 위대한 인간을 믿지 않는다. 비천한 노예는 자유라는 말을 조롱"한다고 설파한 루소의 '시민주도 정치' 관점을 상기시킨다. 루소는 국가의 보존과 번영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강건한 헌법을 만들어 시민의 활력이 살아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ousseau, 2020: bk. 2, chap. 9). 루소와 듀이의 인간성 신뢰는 공적 자유공간에서 움트는 '우정의 정치(the politics of friendship)'를 제안한 아렌트의 '세계사랑(amor mundi)'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더불어 살아갈 세상에서 인간의 "탁월 욕구(the desire to excel)"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유의 공간에서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 공동세계를 창출하는, "세계를 사랑하고 동료와 함께 지내기를 즐기며 공적 일에 참여하는" 원동력이다(Arendt, 2006: 110-111).
한편,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에서 15년 동안의 정량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수천 년의 역사적 사례를 분석했다. 이들은 국가의 권력이 "착취적 제도"를 통해 행사될 때 빈곤을 초래하지만, "포용적 제도"를 통해 행사될 때 번영을 누리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저술한 『좁은 회랑』(2019)에서 국가의 번영이 "국가의 힘"과 "사회의 힘"이 레드퀸 균형(red queen equilibrium)을 이루는 자유의 좁은 회랑에서 이루어진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런 국가를 "족쇄 채워진 리바이어던(shackled Leviathan)"으로 정의했다.
필자는 '더 많은 민주정치'의 관점과 '자유의 좁은 회랑' 관점을 수용하여 민주정치의 품질과 정책성과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행정연구원은 2019년부터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OECD 거버넌스연구팀과 공동으로 국가포용성지수(State Inclusiveness Iidex: SII) 개발에 착수했다. 약 3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한국행정연구원 박준 외, 2021). 정치적 포용성은 경제적·사회적 포용성과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포용성 수준은 36개 OECD 회원국 중 32위로 매우 낮은 나라로 드러났다. 우리나라보다 정치적 포용성이 낮은 나라는 이스라엘(33위), 헝가리(34위), 멕시코(35위), 튀르키예(36위) 네 나라뿐이었다. 2019년 V-Dem연구소는 멕시코를 선거민주정 국가로, 헝가리와 튀르키예를 선거전제정 국가로 분류했다. 이스라엘은 2023년 자유민주정 국가에서 선거민주정 국가로 전락했고, 우리나라는 이듬해 이스라엘을 뒤쫓아 자유민주정 국가에서 선거민주정 국가로 추락했다.
반면 정치적 포용성 수준이 매우 높은 나라는 노르웨이(1위), 스웨덴(2위), 핀란드(3위), 덴마크(5위)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스위스(4위), 네덜란드(6위), 독일(7위) 등으로 밝혀졌다.
국가포용성지수(SII) 연구는 국가의 포용성 수준과 혁신성 수준 사이에 높은 상관계수를 확인했다. 국가의 포용성 수준이 정책성과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하여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에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정당 지지자들 간 갈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로서 폭력 내전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각종 통계지표에서도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2024년 우리나라의 국회신뢰도와 법원·사법체계 신뢰도는 각각 21%와 33%로서 OECD 평균보다 무려 16%p와 20%p나 낮다. 2024년 우리나라의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8.6명으로 OECD 평균 11.1명의 2.6배로 단연 1위다. 남녀 임금의 격차도 OECD 회원국 중 1위다. 2023년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39.8%로서 OECD 평균 14.2%의 거의 3배에 달한다. 2024년 세계행복보고서는 한국인의 행복순위를 58위로 평가했다. OECD 회원 중 SII 32위를 기록한 한국 민주정의 부끄러운 성적표다.
시민·지방·소수를 포용하는 숙론민주정
SII 연구를 비롯한 사회과학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저질 정책성과가 무엇보다 시민·지방·소수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낮은 포용성에 기인한다. 아울러 포용성이 높은 국가는 포용성이 낮은 국가에서 흔히 배제되거나 소외된 시민, 지방, 소수를 포용하는 헌정체제를 유지하며 비교적 우량한 숙론(熟論) 의 정치를 실현한다. 필자는 이런 포용성이 높은 국가의 민주정을 빈약한 민주정과 대비하여 '숙론민주정'으로 정의한다. 배제되거나 소외된 시민과 지방과 소수가 헌정체제에 들어와 목소리를 내고, 엘리트와 중앙과 다수가 그 목소리를 경청하는 포용적 민주정의 정수(精髓)는 숙론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빈약한 민주정에서는 오직 엘리트와 중앙과 다수의 목소리만 들린다. 제도권 정치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한 시민, 지방, 소수는 아스팔트 위에서 엄동설한과 불볕더위와 싸우며 허공을 향해 분노를 폭발한다. 국회 정문 앞에는 늘 천막에서 풍찬노숙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플래카드가 처연하게 걸려 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분노와 억울함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형편이다.
시민, 지방, 소수의 언로만 막힌 게 아니다. 제도정치권에서도 숙론은 고사하고 협상과 타협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정치는 내전 상태에 빠졌고, 국회는 사생결단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전장이 되었다. 숙론이 실종된 적대적 정당정치에서 헌정혁신과 중대한 국정 난제는 마냥 방치되고 있다.
'87년의 빈약한 민주정을 숙론민주정으로 바꾸려면 먼저 배제되고 소외된 시민, 지방, 소수에게 참여의 공적 공간을 만들어주는 권력공유 헌정혁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엘리트-시민, 중앙-지방, 다수-소수가 권력을 공유하는 자유헌정질서가 세워져야 한다.
'숙론민주정' 헌정혁신은 세 가지 형태의 헌정체제 혁신을 요구한다. 엘리트-시민의 권력공유는 '직접민주제 혁신'으로, 중앙-지방의 권력공유는 '연방제 혁신'으로, 그리고 다수-소수의 권력공유는 '비례제 혁신'으로 실현된다. 세 가지 혁신에 우선순위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헌정혁신을 가로막는 기득권 저항을 극복하려면 지렛대 역할을 할 직접참정제 도입부터 시작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한다.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 명령을 준수하여 직접참정제가 도입될 때 자유와 번영의 숙론민주정으로 가는 헌정혁신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직접민주제 혁신, 연방제 혁신, 비례제 혁신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직접민주제와 연방제와 비례제는 모두 오랜 세월 인류가 정치대화를 위해 '정치적 권리의 평등(isonomia)'과 '평등한 발언권(isegoria)'을 실현하는 제도기술로 개발된 것이다. 제도기술로서 직접민주제와 연방제는 단짝으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직접민주제는 연방적 지방분권제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직접민주제 없는 연방제는 통상 중앙집권화를 초래한다(안성호, 2018: 200).
연방제와 비례제는 모두 포용과 분권 및 소수보호를 위한 제도기술이다. 연방제는 지역공동체들 및 정부수준들 간 권력분점을, 비례대표제는 정당들 및 투표자집단들 간 권력분점을 제도화하여 권력이 한 지역과 한 정파에 집중되는 것을 막는다. 네덜란드 출생의 비교정치학자 아렌드 레입하트는 연방주의적 지방분권제와 비례대표제가 어우러져 조정과 화합으로 유도하는 공존과 상생의 합의민주제를 권력집중으로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승자독식 다수결민주제의 대안으로 제시했다(Lijphart, 1999).
1~3건씩 지속적인 헌정혁신
헌정혁신은 한 번에 1~3건씩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전제정에서 민주정으로 바뀌는 혁명적 상황에서 한꺼번에 전면적 헌정혁신이 요구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상황이 아닌 경우 한 번 개헌할 때 3건 이내의 의제를 선정하여 1~2년 동안 전 국민의 숙론을 거친 후 국민투표로 확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의제를 다루면 심층적 숙론이 어려울뿐더러 의제에 대한 이견조정도 힘들다.
헌정혁신은 수많은 난제를 한꺼번에 뚝딱 해결하는 마법의 방망이가 아니다. 숙론민주정 헌정체제는 오랜 세월 구성원의 지극한 정성과 부단한 노력으로 조금씩 다듬어진 공동체 예술품이다. 고대 아테네 도시국가의 민주정과 로마공화정의 민회는 어느 날 나타난 천재적 지도자의 발명품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갈등과 난관을 극복하며 이루어낸 집단지성의 산물이었다.
더욱이 헌정체제에 관한 제도기술에는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쇠락하는 '헌정부식(constitutional decay)' 증상이 나타난다. 지속적인 헌정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스위스의 국민발안제와 국민투표제는 오랜 세월 꾸준한 헌정혁신의 산물이다. 원래 국민발안제와 국민투표제는 프랑스혁명 때 지롱드 헌법초안을 작성한 니콜라 드 콩도르세가 창안한 제도다. 이것을 19세기 초반 캔톤과 코뮌이 수용해 시행했고, 19세기 중반 이후 스위스 연방이 채택해 150년 동안 발전시켰다. 국민 다수와 캔톤 다수의 찬성으로 개헌을 확정하는 이중다수제, 국민발안에 대한 국회(정부)의 찬반 권고와 대안 제시 등은 국민발안투표를 통해 이룬 헌정혁신의 성과다. 지금도 직접민주제 헌정혁신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스위스의 일부 코뮌은 주민발안의 숙의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 오리건주가 창안한 '주민발안심의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201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역시 주민발안의 숙의성을 높이기 위해 스위스 제도를 벤치마킹해 '주민발안투명성법'을 제정했다.
지속적인 헌정혁신은 연방제 혁신과 비례대표제 혁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니엘 엘라자르에 의하면, 연방주의 아이디어는 히브리 민족의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언약(covenant)에서 시작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언약으로 발전된 사상이다. 이후 고대로부터 중세와 근대 및 현대로 이어지며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Elazar, 1991: chap. 4).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적 의미의 연방제는 18세기 말 미국의 헌법회의 참여자들에 의해 창안되어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소규모 장점과 대규모 장점의 결합, 자치(self-rule)와 공동통치(shared rule)의 공존, 국민과 가까운 정부 순서로 권력을 우선 배분하는 보완성원칙(subsidiarity principle), 국민주권을 보장하는 시민공화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연방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제도가 아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연방제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고뇌와 투쟁을 통해 얻은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비례대표제의 역사는 직접민주제와 연방제보다 짧다. 그러나 비례대표제 역시 대의민주제와 정당이 출연한 이후 소선거구 다수결투표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2세기 이상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2025년 현재 37개 OECD 회원국 중 온전한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나라는 24개국이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8개국은 비례대표제를 부분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선거제도로 소선거구 다수제와 함께 이른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 재적의석 300석 중 46석(15%)만 비례대표의석으로 배정된 데다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위성정당 문제 등으로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폐해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SII 연구에서 숙론민주정으로 분류된 국가도 헌정부식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숙론민주정 국가도 AI 시대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한 정보편향, 허위정보, 극우 파시스트 등장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숙론민주정 국가는 이런 도전에 지속적 헌정혁신을 통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스위스는 2015년부터 2025년 3월까지 10년 동안 55건의 개헌 국민투표를 시행했다. 독일도 1949년 기본법 제정 이후 지금까지 60여 차례 개헌을 단행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거의 40년 동안 단 한 차례의 헌정혁신도 이루지 못했다. 헌정혁신은 나라의 번영을 위해 과학기술혁신만큼 때로 그보다 더 중요하다.
헌정리더십과 시민비르투
미국 제헌헌법회의에 참여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페더랄리스트 페이퍼』(1788) 제1호에서 우리가 "성찰과 선택"을 통해 좋은 정부를 세울 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우연과 무력"에 의존해 정치체제를 갖는 운명에 갇힐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설파했다(Hamilton, Madison & Jay: 1999: 27). 그는 나라의 흥망을 결정할 헌정혁신의 최대 걸림돌은 "기득권을 위협하는 모든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나라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확대하거나 출세를 꾀하는 사람들의 왜곡된 야망"이라고 지적했다. 18세기 말 해밀턴의 이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숙론민주정의 최대 장애물은 기득권 상실을 걱정하는 엘리트의 저항과 권력 마니아의 권력욕이다.
필자는 처음 로버트 그린리프의 『서번트 리더십』(1977)을 읽으며 상당히 많은 분량이 거버넌스체제에 관한 논의에 할당된 것을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 책을 숙독하며 진의를 깨달았다. 그린리프는 조직의 정상에 군림한 한 명의 수장에게 막대한 권력을 집중시키는 위계적 피라미드체제를 조직질병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진단했다. 그는 조직질병을 치료하려면 피라미드체제를 동료제로 바꿔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 로마에서 기원한 '동료제' 거버넌스 혁신이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오늘날 계층제의 최정상에 한 명의 수장이 앉아 있는 제도로 인해 중요한 기관에서 신뢰상실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Greenleaf, 2002: chap. 2).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가 행복하게 다스려지려면 반드시 진리를 고수하는 입법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에게 헌정질서를 세우는 입법은 "신을 본받는 일(athanasia)"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로마인의 영광과 쇠락의 원인에 관한 고찰』(1734)에서 고대 로마 번영의 비결이 로마공화정을 세운 국가지도자의 훌륭한 헌정리더십(constitutional leadership)에 있다고 보았다. 루소는 『사회계약론』(1762)에서 공화국 헌법을 설계하는 입법자는 "신적 능력"을 닮은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인간 본성을 꿰뚫어 보고, 인간 행복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백년대계의 관점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지도자는 민주공화정 붕괴의 위기를 초래한 빈약한 민주정을 자유와 번영의 숙론민주정으로 바꾸는 헌정혁신을 일신의 안일과 당리당략을 빌미로 거부하거나 미루지 않을 것이다.
숙론민주정의 수립에 헌정리더십이 매우 중요하지만, 민주공화정의 주인은 결국 국민임을 자각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과 고대 로마공화정의 수립에서도 위대한 헌정리더십과 함께 자유를 쟁취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폭정에 항거한 시민비르투가 있었다. 숙론민주정은 거져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폭정 아래서 죽을 것이다"(Snyder, 2017: 152).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지난 7년 동안 학술세미나와 정책토론회에서 발표한 아홉 편의 글을 수정·보완하여 단행본의 형식에 맞게 재편집한 것이다. 긴 기간 동안 다른 장소에서 발표된 글이므로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데이터를 업데이트하며 내용의 중복을 최대한 피하려고 첨삭했다.
그동안 이 책의 주제에 관해 국내외 논문과 서적을 두루 참고하고 틈틈이 고전을 애독하며 가까운 분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더해지면서 일부 용어의 선택도 바뀌었다. 예컨대, 이 책의 핵심 용어인 '숙론민주정'은 고민 끝에 최종 선택되었다. 애당초 '포용민주정'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나 이미 다른 연구자가 이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 데다 포용적 헌정혁신이 촉진하는 성숙한 민주공화국의 진수가 '숙론'에 있다는 판단으로 숙론민주정으로 결정하였다.
제1장은 번영하는 나라의 숙론민주정을 만드는 헌정혁신의 필요성과 과제를 총론적 관점에서 다룬다. 숙론민주정 헌정혁신의 필요성을 제국과 공화국의 상반된 헌정질서의 관점에서 논의한 후 현재의 빈약한 민주정을 숙론민주정으로 바꾸는 헌정혁신의 과제를 제시한다.
제2장은 작금의 제3물결 전제화 추세와 양상을 살펴보고, 전제화 위협을 극복하고 자유와 번영의 좁은 회랑으로 인도할 숙론민주정 개념의 기원과 의미를 검토한다.
제3~5장은 시민을 소외시키는 과두적 대의민주제를 극복하기 위한 직접참정 확충의 문제를 다룬다. 제3장은 자유와 돌봄의 초등공화국 시각에서 풀뿌리민주정의 중요성과 실천방안을 논의한다. 제4장은 민주공화정의 위기극복을 위한 1% 직접참정을 논변한다. 제5장은 AI 시대 허위정보와 음모론의 도전에 대응한 오류 교정장치로서 직접참정의 의의와 헌정혁신의 세부과제를 검토한다.
제6장과 제7장은 지방을 종속시키는 과잉 중앙집권제를 극복하기 위한 연방적 지방분권의 문제를 다룬다. 제6장은 지방의 중앙 종속을 극복하고 지방의 자생력을 불어넣는 조세자치권의 현실을 분석하고 확보방안을 모색한다. 제7장은 지방소멸의 위기에 직면한 지방을 살리고 국회를 소모적 정쟁에서 정책으로 경쟁하는 민의의 전당으로 바꾸는 지역대표형 상원의 논거와 양원제 개혁방안을 제시한다.
제8장은 소수를 배제하는 승자독식 다수제의 결함을 극복하고 다수와 소수의 권력공유의 관점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준대통령제(이원정부제)와 내각제, 나아가 양원제 국회를 활용한 준내각제 개혁방안을 논의한다.
제9장은 국민주도의 헌정혁신을 다룬다. 국제적 참여헌정주의 동향과 아이슬란드, 칠레, 스위스 사례를 비교·분석한 후 헌법개정 국민발안제 개헌과 국민투표법 개정 및 국민주도의 개헌절차법 제정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개혁안을 제시한다.
감사의 말씀
이 책의 집필에 여러분의 도움을 받았다. 필자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나 논쟁거리가 생기면 주변의 몇 분에게 대화를 청했다. 이 요청에 기꺼이 응해 귀중한 논평과 조언을 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성경륭 상지대학교 총장님의 높은 식견과 통찰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때로 비판적인 의견도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민 진 국방대학원 전 부총장님, 임도빈 서울대학교 교수님, 권수철 법제처 전 국장님, 민정식 관해해운 회장님, 그리고 동생인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에게 감사드린다. 필자의 견해가 때로 부담스러웠겠지만 끝까지 경청해주고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이분들 덕분에 이 책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숙론민주정은 '정책공간 포용과혁신' 포럼에서 발원했다. '숙론민주정' 아이디어를 움틔운 한국행정연구원의 국가포용성지수(SII) 연구는 바로 이 포럼을 창립한 분들의 선견지명과 열정에 힘입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포함된 두 개의 장은 이 포럼에서 발표된 원고에 기초해 작성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포럼을 이끌어오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성경륭 전 이사장님, 박능후 대표님, 최기영 이사장님, 변창흠, 이정옥, 이수훈, 윤 황, 류영재 이사님, 김기봉, 조흥식, 송승철, 권호열, 김현철, 전영일, 임춘택, 김동주, 문명재, 정성훈, 심미선, 김홍수, 초의수, 주병기, 고영구 교수님, 강충경, 이석희 사무총장님, 윤범기 기자님, 한동환 전 감사님, 김준희 사무국장님, 그리고 민형배 국회의원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헌법개정을 위한 시민운동에 헌신하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특히 '국민주도상생개헌행동'과 '헌법개정국민행동'에 동참하신 정세욱, 이시종, 김중석, 안동규, 이상선, 김준식, 이병렬, 송운학, 임진철, 이두영, 김태환, 박진강, 이창용, 정중규, 고문현, 허영구, 송창석, 박재율, 신대운, 안승문, 윤호창, 김정훈, 박재순, 최일도, 조인래, 노세극, 조현주, 정정화, 신용인, 양승원, 강영봉, 김일석, 문병교, 강정미, 신동진, 연성수, 김병학, 권영태, 민인홍, 강민창, 하승수, 이상수, 유병로, 신필균, 유종렬, 김태일, 이기우, 정두환, 김한중, 신지혜, 홍성주 등 동지님들께 경의를 표한다. 이분들의 숨은 헌신이 열매를 맺는 날이 기필코 올 것으로 믿는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시로 거친 원고를 교정해주고 다듬어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건강한 식단으로 하루 삼식을 제공해준 고마움도 이 자리를 빌려 전하고 싶다. 끝으로 이 책의 출간을 맡아주신 박영사 안종만 회장님, 안상준 대표이사님, 임재무 전무님, 그리고 이 책을 정성껏 제작해주신 박영사의 편집부 문선미 부장님을 포함한 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2025년 6월
안 성 호
목차
[프롤로그] 왜 숙론민주정인가? ● 1
제1장
숙론민주정 헌정혁신의 길 ● 23
Ⅰ. 국가거버넌스 실패의 시대 ● 24
Ⅱ. 제국의 질서 vs. 공화국의 질서 ● 26
Ⅲ. 빈약한 민주정의 질병 ● 32
Ⅳ. 숙론민주정의 탁월한 성과와 기능 ● 38
Ⅴ. ’87년 헌정체제의 결함과 숙론민주정 헌정혁신 ● 44
Ⅵ. 숙론민주정 헌정혁신의 시도와 좌절 ● 50
Ⅶ. 헌정혁신의 좁은 문 ● 52
제2장
제3물결 전제화와 숙론민주정 ● 57
Ⅰ. 민주공화정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58
Ⅱ. 20세기 민주정과 제3물결 전제화 ● 59
Ⅲ. 민주정치에 대한 불만과 전제화의 유혹 ● 65
Ⅳ. AJR의 정치경제론 ● 69
Ⅴ. 민주정치의 품질과 국가포용성지수 연구 ● 76
Ⅵ. 포용국가의 숙론민주정 ● 82
제3장
자유와 돌봄의 초등공화국 ● 87
Ⅰ. 잃어버린 보물, 초등공화국 ● 88
Ⅱ. 구한말 비숍이 관찰한 상반된 한국인 모습 ● 89
Ⅲ. 풀뿌리자치 초등공화국 ● 95
Ⅳ. 초등공화국의 공개된 비밀 ● 98
Ⅴ. 스위스 코뮌의 정부형태 ● 103
Ⅵ. 자유와 돌봄의 읍•면•동 초등공화국 설계안 ● 109
Ⅶ.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 112
제4장
민주공화정과 1% 직접참정의 비밀 ● 115
Ⅰ. 풍전등화의 민주공화정 ● 116
Ⅱ. 도산의 대공사상과 삶, 그리고 민주공화정 ● 118
Ⅲ. 브루투스의 헌정리더십과 로마인의 비르투 ● 121
Ⅳ. 로마공화정의 민회와 번영 ● 123
Ⅴ. 직접참정에 대한 오해와 편견 ● 126
Ⅵ. 1% 직접참정의 위력 ● 132
Ⅶ. ‘기득권 내려놓기’ 헌정리더십과 시민비르투 ● 140
제5장
AI 시대 직접참정 헌정혁신 ● 143
Ⅰ. 가짜뉴스와 음모론, 그리고 디지털 독재 ● 144
Ⅱ. AI 시대 오류 교정장치로서 직접참정제 ● 146
Ⅲ. 투표자의 무지에 대한 신화 ● 150
Ⅳ. 국민 신뢰와 직접참정 이슈의 개방성 ● 155
Ⅴ. 갈등 심화와 다수 전제, 우려와 진실 ● 158
Ⅵ. 숙론의 직접참정제 설계 ● 161
Ⅶ. 대만 직접참정 헌정혁신의 교훈 ● 165
제6장
재정연방주의와 조세자치 ● 169
Ⅰ. 지방분권•균형발전정책, 왜 실패했나? ● 170
Ⅱ. 특별자치에 대한 오해와 부실 운용 ● 172
Ⅲ. 조세자치의 축복 ● 174
Ⅳ. 과세권 없는 기형적 지방세 ● 178
Ⅴ. 캔톤•코뮌의 조세자치권과 탁월한 성과 ● 183
Ⅵ. 스위스 재정연방제의 굿 거버넌스 ● 191
Ⅶ. 조세자치 없이 특별자치 없다 ● 196
제7장
지방소멸 대응 지역대표형 상원 ● 203
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 204
Ⅱ. 한국의 인구절벽 vs. OECD 회원국의 인구감소 ● 205
Ⅲ. 한국의 지방소멸 원인 ● 207
Ⅳ. 기존 지방소멸 대책의 결함 ● 210
Ⅴ. 왜 지역대표형 상원인가? ● 213
Ⅵ. 지역대표형 상원을 둔 준내각제 ● 220
제8장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넘어서 ● 229
Ⅰ. 민주공화국의 선출된 왕 ● 230
Ⅱ. 대통령제, 무엇이 문제인가? ● 232
Ⅲ. 내각제 또는 준대통령제가 대안인가? ● 238
Ⅳ. 새로운 정부형태 분류 ● 244
Ⅴ.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넘어서 ● 247
Ⅵ. ‘준내각제 + 간선 대통령’ 헌정혁신안 ● 250
Ⅶ.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의 걸림돌 ● 252
제9장
국민주도 헌정혁신 ● 259
Ⅰ. 제7공화국, 국민주도 헌정혁신으로 열자 ● 260
Ⅱ. 국제적 참여헌정주의 동향 ● 262
Ⅲ. 아이슬란드의 국민주도 헌정혁신 시도 ● 264
Ⅳ. 칠레의 국민주도 헌정혁신 시도 ● 267
Ⅴ. 스위스의 국민주도 헌법개혁과 직접민주제 ● 272
Ⅵ. 아이슬란드, 칠레, 스위스 사례의 교훈 ● 278
Ⅶ. 개헌 국민발안제와 개헌절차법의 설계 ●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