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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2561200
· 쪽수 : 1072쪽
· 출판일 : 2017-01-10
책 소개
목차
1권
프롤로그
1. 투기
2. 폭거
3. 근본
4. 불경
5. 직감
6. 상처
7. 현비
8. 파렴치한
9. 자정향
10. 위계
11. 흐름
12. 폐쇄
2권
13. 극한
14. 부정
15. 폐출
16. 평화
17. 그림자
18. 다른 급, 같은 사랑
19. 해후
20. 첩지
21. 청건
3권
22. 동금서슬
23. 흉몽
24. 간청
25. 하라성
26. 황후책립
27. 인과율
28. 불신
29. 앵무가
30. 유수
31. 방치
마지막 이야기
남은 이야기
작가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프롤로그
# 1. 아주 사소하나 치명적인
이제 일곱 살이 되는 개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소원을 말해 보라 했다. 개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뜸 작은 입술을 열어 황궁을 구경하고 싶다 했다. 뜬금없는 말이라 화들짝 놀라서는 어림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더니 실망한 표정도 없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기대조차 않았다는 듯한 그 작은 몸짓이 죽은 제 어미와 어찌나 똑같은지 심장이 콕콕 쑤시더라. 하여 개성성(開惺惺), 하나뿐인 딸 개리를 데리고 입궁을 감행하였다. 가지고 있는 패(牌)가 든든하니 입궁이야 무난하나, 들켜서는 곤란한 인물들은 피해야겠기에 그 걸음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아버지, 저 아이는 누구지요?”
한참 인적이 드문 곳만 찾아 궁 안을 조심스럽게 구경하고 있던 차, 개리가 팔을 쭉 뻗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어 왔다. 개성성은 걸음을 멈추고는 개리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집이 작은 것으로 사내아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사내아이를 응시하던 개성성이 헉 하고 헛숨을 삼키며 주위를 휘이익 둘러보았다. 어쩌다가 태자전까지 와 버렸나. 그러니 멀리서 윤곽만 보이는 사내아이는 분명 ‘그’일 것이다. 마주치면 곤란한 인물 중 하나였다.
“큰일이다. 리야, 어서 숨어야 한다.”
개성성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곳을 찾았다. 품위 따위야 내던진 지 오래다. 다행히 아직 저쪽에서는 이쪽을 발견치 못하였으니 재빨리 숨어 버리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저 쪽 편에 바윗덩어리를 발견하였다. 바위 뒤에 숨어서 조용히 이 곳을 빠져 나갈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개리를 데리고 서둘러 숨으려는데, 어라? 없다. 방금 전까지 개리가 서 있던 곳으로 손을 뻗었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개성성의 눈에 어느새 저만치 ‘그’가 있는 궁정으로 다가가고 있는 개리의 모습이 잡혔다. 또 한 번 헛숨을 삼켜야 했다. 개성성의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고 개리를 잡아 오기에는 거리가 아슬아슬했다. 열흘 전 제후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황제인 진명제(晉明帝)와 쓸데없는 문제로 논쟁을 하였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당분간은 폐하를 피하는 게 개성성의 신상에 좋았다. 설마 어린 ‘그’가 개리를 위험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개성성은 일단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왜 그 반대 생각은 하지 못하였을꼬.
태자전의 궁정은 다른 궁정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못이었는데, 사람이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라 깊은 운치가 있었다. 하여 언()은 이 곳을 좋아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어마마마와의 추억이 한가득 고여 있는 곳이기도 해서, 언은 생각할 것이 있을 때는 늘 이 곳을 찾았다. 오늘도 머리를 굴려야 할 일이 있어 연못을 찾은 언은 아마바바의 명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틀 후에 사신(使臣)이 소서국(少西國)을 비롯한 몇 개의 나라를 차례로 방문하는데, 오늘 아침 황제 폐하, 즉 아바마마께서 그 사신 행렬에 언도 반드시 동행할 것을 명하였다. 갑작스런 아바마마의 뜻을 조용히 헤아려 볼 요량으로 언이 먼 반대편 수풀로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그 생각의 덩어리를 반죽하지도 않았는데 귓가로 문득 달그락달그락거리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곳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함부로 들어왔다가는 큰 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환관(宦官)이 그를 급하게 찾을 때도 궁정 바깥에서 기다리지,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언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점점 가까워지는 나무 신 소리를 좇아 몸을 돌렸다.
계집아이였다. 복장을 훑어보니 궁 안에서 일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황가(皇家)의 아이도 아니다. 황실 족보가 선대(先代)의 주황(皇) 덕분에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지만, 언이 파악하지 못한 황가의 인물은 없었다.
“누구냐?”
빤히 아이를 주시하던 언의 입술이 벌어졌다. 나이답지 않은 엄격한 음성에 바로 앞까지 다가오려던 아이가 두 걸음 정도 사이를 벌여 두고는 멈추어 섰다. 하지만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이는 그저 언이 이해 못 할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 어떻게 너 같은 아이가 황궁 안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마지막 말은 아이에게 묻는다기보다는 궁의 수비대장을 떠올리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리(梨).”
예고 없이 튀어나온 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언은 습관대로 오른쪽 눈썹을 까딱 치켜 올렸다.
“뭐?”
“리. 내 이름, 리.”
“리?”
언의 중얼거림에 개리의 얼굴로 급작스레 화사한 웃음이 번져 갔다. 그리고 숲 저편에서부터 사아아 강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을 흔들어 놓았다.
“……구나.”
언은 무심코 떠오른 말을 내뱉었지만 바람 소리에 묻혀 멀리까지 날아가지는 못했다. 그 사이 바람에 퍼져 날리던 결 좋은 머리카락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내려앉았다. 개리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언은 제지하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답지 않게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와 버린 아이를 눈치챘음에도 아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였다. 너무 방심하였다. 설마 이 어린 계집아이가 자신을 해치려 할 줄이야. 아이가 두 팔을 들어올릴 때까지만 해도 언은 뭐 하는 건가 싶어 눈만 살짝 찌푸렸다. 그 두 손이 자신의 가슴을 향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잡았어야 했다. 자신의 가슴으로 손바닥을 가져다 대려는 그 계집아이의 행동을 저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끔찍한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어, 어!”
갑자기 떠밀린 언은 균형을 잡으려 팔을 허둥지둥 흔들던 고대로 연못으로 풍덩 빠져 버렸다. 인위(人爲)로 만들어진 연못이 아니어서인지 바닥에 쌓인 오래 된 토사물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언의 몸을 급격하게 빨아 당겼다. 신은 또 언제 벗겨졌는지, 발에 닿는 불쾌하도록 야들거리는 감촉에 언은 정신이 다 없었다. 정말로 순식간에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코로 입으로 물이 쿨쿨 쏟아져 들어왔다. 숨을 쉬기 위해 버둥대던 언의 시야에 문득 자신을 밀어 빠뜨린 고 계집아이의 모습이 크게 들어왔다. 연못가에 바짝 다가와 앉아 있는 아이는 그를 내려다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아주 화사하게. 그게 언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이었다.
12세의 은(殷)나라 황태자 언, 골로 갈 뻔하다.
소서국(少西國)에 국빈(國賓)의 자격으로 참석한 언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희(舞姬)들의 춤을 보며 겨우 인상이 구겨지려는 것을 막고 있는 상태였다. 평소였다면 가뿐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주었겠지만, 이틀 전 연못 사건의 충격과 후유증이 남아 심신(心神)이 무척이나 불쾌하여 조절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앞에 놓인 음식 접시들을 몽땅 뒤집어엎고 한바탕 난리를 피워 버리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언은 화가 나면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고 아이다운 모습 그대로를 내보이며 무조건 성질을 부려 대고는 하였다. 물론 그것은 언을 낳아 주었던 황후가 병으로 임종하기 전까지였다. 그 때까지의 언은 아이였지만 그 이후로의 언은 단 한 번도 아이다운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를 지켜 주던 철벽같은 보호자가 사라졌음을 어린 나이에도 인지(認知)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감히 태자의 신분을 가진 그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의 황후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두 번째로 황후에 책립된 제 황후는 후사를 갖지 못하여 안달이 나 있었다. 겉으로는 온화한 척하였지만, 언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하여 쉬이 틈을 보이거나 잡혀 줄 언은 아니었지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언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교각(橋脚)을 지나는 언의 앞으로 은은한 달빛이 쏟아졌다. 언은 처소로 향하기 위해 서두르던 걸음을 잠시 늦추고는 난간 밖으로 상체를 내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신비스럽게 보이는 밤이었다. 아까까지의 불쾌하던 심기가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교각의 반대편에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여아(女兒)를 발견한 것은 언이 달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교각을 지나려다가 누군가 교각 한가운데에 서 있으니 어쩌지 못하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언은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교각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렇게 언이 교각을 완전히 빠져 나왔을 때야 가만히 서 있던 아이가 교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잠깐.”
무슨 생각인지 언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난 여아를 불러 세웠다.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언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아이의 뽀얀 뺨이 유난히 고와 보인다 생각하며 언은 아이의 얼굴을 뜯어보듯 살피고 있었다.
“어디서 본 적 없어?”
“네?”
“낯이 익은걸.”
언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였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는 언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눈을 깜빡이더니 곧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은의 태자 마마님이시지요?”
“역시. 어디서 보았었지?”
“아마도…… 전생에서 뵈었겠지요.”
언의 오른쪽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기분이 좋거나 나쁠 때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저는 유유예요.”
언의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하고는 교각의 반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잡으려고 생각했으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언은 그냥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달빛 사이를 달려가는 모습이 하늘의 선녀 아기처럼 고와 보였다.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언은 몸을 돌렸다. 환하게 웃던 아이의 얼굴이, 몹시도 반짝거리던 고운 눈망울이 눈앞을 스쳤다.
“배꽃 같았어.”
무심결에 중얼거린 후, 그렇게 몇 발자국 걷던 언이 갑자기 든 생각에 화들짝 놀라 멈추어 섰다. 언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뭐야, 그게. 그래 봤자 얼마 안 가 패망(敗亡)할 나라인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언은 저도 모르게 뒤돌아서서는 이미 사라진 유유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