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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미술 이야기
· ISBN : 9791155350195
· 쪽수 : 496쪽
· 출판일 : 2014-05-10
책 소개
목차
WORK THINGS
BEAUTY ITEMS
TOYS
DINING GOODS
CLOSET
SWEETS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오차노미즈 미술학교의 1학년은 제로 워크부터 시작한다. 말 그대로 기초에서 하나씩 배워 가는 과정이다. 오전 세 시간, 점심을 먹고 또 다시 세 시간을 꼬박 그림에 매달리지만 선생님들은 직접 가르쳐 주지를 않는다. 겨우 반년 일본어를 배우고 바로 입학한 학교 유일의 유학생도 예외는 없다. 난생 처음 하는 목탄 데생과 누드 크로키, 정물 수채화 시간마다 미궁에 빠졌다. 안절부절 발만 동동거리면, 그제야 선생님은 한마디 건넨다. 「알 때까지 그려 봐!」 주변 눈치를 살피니 재료부터 틀렸다. 목탄은 굵기에 따라, 태운 장작에 따라 종류가 다르고, 목탄 심을 제거하는 작은 청소 솔이 있는가 하면 목탄선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종이 붓도 따로 있었다.
‘중략’
학교에서는 온종일 종이만 쳐다보니 띠 동갑 아래의 동기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그림은 그림대로 제일 아래 C그룹 - 똑같이 여성 누드를 그려도 이 그룹엔 우주인이 있는가 하면 입체파 여자도 등장하는데, 내가 그린 여자는 죄다 비만이었다 - 에만 머물렀다. 외롭고 고단한 일상이었다. 떠밀리듯 기숙사로 돌아올 때면 적적함에 휩싸여 환하게 불 밝힌 역 앞 슈퍼마켓에 들렀다. 어제는 음료수 코너를 훑었으니 오늘은 목욕용품을 읽을 차례다. 마음에 들면 하나씩 산다. 기준은 ‘첫 눈에 반한 것’.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세제 통은 그래픽 아트를, 붓으로 쓴 큼직한 한자는 타이포그래피를, 미끈한 다리를 드러낸 무희 샤워 젤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렇게 물건에서 디자인을 배우며 도쿄를 조금씩 알아 갔다.
시간이 흘러 2학기 스케치 수업 때 가방 속 물건을 내 식대로 그린 적이 있다. 그날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고, 선생님은 ‘스스로 알아낼 것’의 다음 단계로 ‘많이 그릴 것’을 요구하였다. 3년간 그렇게 물건을 그리며 졸업 때는 도쿄에서 산 물건들만 모아서 일러스트 포스터로 만들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은, 매일 그릴 것, 그리고 도망가지 말 것이었다. 여기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에 나온 온갖 물건들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후, 사거나 모으거나 선물로 받거나 어디선가 주워 왔거나 한 것들이다. 물건을 고르는 기준은 여전히 ‘예쁜 것’이어서 실생활에서는 쓸모없을 때도 많다. 뮤즈로 모셔 온 물건들을 이제야 하나씩 그려 가며 예전 미술학교의 원칙을 떠올렸다. 많이 그릴 것, 매일 그릴 것, 그리고 도망가지 않을 것.
-‘서문’ 중에서
나는 종이 위에 펜으로 선을 그리고 마카로 색을 채우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가끔은 붓을 들고 아크릴 물감이나 잉크로 색을 칠하기도 한다. 이런 실재의 재료들로 작업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디지털이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대체하지만 여전히 화방에 가서 미술 재료를 고르고, 펜을 들거나, 지우거나, 종이 위에 직접 그리는 것이 좋다. 같은 그림인데도, 어떤 날은 선이 괜찮고 어떤 날은 이상하게 삐뚜름하다. 정확하게 어떨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는 이런 작업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