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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6062608
· 쪽수 : 150쪽
· 출판일 : 2024-06-30
책 소개
목차
제1부
시간이 지나면
1년 후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다
글쓰기 강의 목차
오른손과 왼손
배운 사람
신발론
보수주의자 고양이
숟가락 하나
국그릇 속에 떨어진
불후의 풍경
돌탑
못
붉은 연꽃
구룡지 전설
실패를 위하여
눈가에서
귀를 접다
옷
제2부
철길
저물녘
말의 풍경
1번 출구
줄
말씨
누군가
흰 발을 보여줘!
2시 30분
사이에서
버렸다와 버려졌다 사이
빈방 고양이
벌레가 되다
일요일
사생활
동시에
반쪽
숫자에 갇히다
본색
제3부
청년의 희망
사진의 매혹
늑대
겨울밤 아파트
본적
수 백마일 떨어진 곳에서
홀로그램
연옥의 시간
도플갱어
공모자들
시민
안드로이드
낮잠
비정기적 보고서
사물통신의 세계
밤낮
오늘의 채널
팬옵티콘
건너간다는 것
제4부
하필
목의 표정
타다만 몸
귀갓길
등 뒤에서
작은 개
사인
은빛 늑대
최초의 언어
입을 열면
수제비를 끓이다
이명耳鳴
미래가 두렵다
시간의 미로
아이덴티티 카드
복도에서
어떤 귀향
죽은 친구에게서 온 편지
불귀
◆해설: 정훈(문학평론가)-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저자소개
책속에서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다
모든 안은 문을 통과해야 이른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거나 잘 못 누르면
그대로 벽이 되는 문
생각해 보니 그간 수많은 문을 통과해 왔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밤비처럼 서성이며
쾅쾅 거칠게 밀어붙이기도
힘겹게 들어가
따스한 아랫목에 손을 넣고
말기에 이른 네 슬픔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드나듦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까무룩 잊는다
활짝 열린 문은 바람에 쉬 닫힌다는 것
사람의 비밀번호는 늘 바뀐다는 사실을
익숙하게 드나들던 네 방문이 오늘은 굳게 닫혀 있다
도둑처럼 은밀하게 번호키를 눌러도
발길질하며 온몸으로 부딪쳐도
완강히 거부하는 문 앞에서 새삼 깨닫는다
충분히 열려 있다고 안심하는 순간
문은 차디찬 벽이 된다는 것
숟가락 하나
입에 혀같이 나의 구미를 맞추는 숟가락
그것이 날라다 준 음식을 씹으며
문득 생각한다
우묵하게 패인 숟가락
가문 저수지 바닥처럼 금 간 안쪽
가만히 들여다본 적 있는지
쏙 들어간 안쪽 뒤집으면 볼록하게 솟는,
어머니의 가슴 같은 그 뒷면에
찌그러진 내 얼굴 비춰본 적 있는지
그렇게 스쳐 갔을 그 누군가의 얼굴도
생각해 보았는지
진눈깨비 날리는 출출한 겨울 골목 포장마차
붉게 언 생강 같이 터진 손으로 어묵국에
숟가락 꽂아 내밀어주는
아주머니의 뜨듯한 마음 받아본 적은 있는지
숟가락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얼마나 많은
혀와 혀끝이 스쳐 지금 내 혓바닥에 와 닿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숟가락으로
때론 차고 때로는 뜨거웠을 국을 떠먹었는지
숟가락질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지
숟가락 하나로 떠올리는 무수한 국물
숟가락 하나에 담긴 낱낱의 밥알들
나를 먹여 살리는 숟가락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과연 누구를 부양한 적 있는지
하루 세끼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가
누대를 건너갈 지존의 숨줄이란 걸
수많은 입술을 스쳐 갈
목숨壽 복福
불후의 풍경
기장군 연화리, 빛바랜 바다 무늬들이 엉겨 붙은 어물전 모퉁이, 아픈 다리 지탱하느라 한쪽 다리 절, 뚝 굽혀 앉은 한 늙은 여자 물간 생선 손질하다 대뜸, 야이 웬수야 그냥 콱 뒈져 뿌지 따라오기는 와 따라오노, 산 아랫마을 뒤로 하고 차들 질주하는 길 건너로 기우뚱 리어카를 끌고 온 노인, 움푹한 두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이마의 땀을 쓱 훔치며 늙은 여자 곁에 쪼그려 앉습니다. 웬수 같은 양반 젊을 때는 애먼 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밤도망질…, 늙은 여자 가래침 칵 뱉어냅니다. 저 웬수 뒤치다꺼리하다 내가 죽겠네, 바닥에 생선을 패대기치다가 다시 주워 손질합니다. 발길 뜸한 어물전 푸념처럼 비릿한 한숨이 흘러나오고, 노인은 그녀의 곁에서 가만가만합니다. 잠시 쏴아아- 파도 소리만 높아지는 해 질 녘 고요, 이윽고 여자가 생선을 주섬주섬 거두어 안고 리어카에 탑니다. 노인도 넙치 같은 손 오므려 힘껏 리어카를 끕니다. 장딴지 힘줄 파르르 떨며 끙차, 리어카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노인, 그의 등을 밀물이 가만가만 밀어줍니다. 파도가 리어카 두 바퀴를 슬쩍 받쳐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