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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6341321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16-03-19
책 소개
목차
1. 꽃이 되고 바람이 되어
012 봄에 기대어
015 꽃이 되고 바람이 되어
019 해후
023 까마중
030 피아노
033 떡 한입
038 내 가슴에 옹이가 되어
041 기념일
045 거짓말
049 행복한 사람
051 장마
056 궁리
060 3급 건망증
063 황토방
067 그해 가을
071 빗소리
2. 덧없음에 대하여
078 촛대 꽃 내 친구
081 낚시와 떡밥
085 C레이션
088 지키고 싶은 것
092 못 말리는 여자
095 덧없음에 대하여
099 아름다운 킬러
103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106 개미
110 물밥
114 무말랭이
118 돌아가 그 세월 속에 다시 선다면
123 배꽃 향기
3. 잊는 연습
128 못난 손
131 사랑에 대하여
135 블랙아웃(black out)
139 내 사랑
142 어머니
145 명경대
149 고개를 낮추니
153 흑장미 사연
157 잉꼬 새 짝을 만나다
161 바이오 팬티
164 산다는 건
168 잊는 연습
171 중용(中庸)
175 후회하지 않으려
179 마지막 사랑
185 살어리랏다
4.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192 약속
194 어머니의 ‘말이다’
198 서약의 허와 실
201 아내가 쓰는 남편의 군 시절 이야기
206 우리 집 삼식님
211 내려갈 때 아름다운 사람
215 물지게
220 인형의 집
223 곳간
226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230 점 하나만 찍으면
233 비둘기 집
236 깡통치마저고리
239 눈물 단상
243 다시 쓰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우리 집 거실 창문을 열면 마주 바라보이는 드넓은 과수원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과수원 자락은 온통 눈이 내려 쌓인 듯 하얀 꽃밭이다. 코끝에 날아와 앉는 배꽃 냄새에 어질어질 멀미가 난다.
내 어릴 적, 외할아버지댁 뒤뜰엔 커다란 배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배가 익어가는 가을이 오면 할아버지는 기다란 장대를 들고 나무 곁을 오락가락하였는데. 극성스런 까치 떼가 잘 익어 단내 나는 배만 찾아 부리로 구멍을 낸 뒤 쪼아 먹고는 달아나기 때문이었다. 단것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네 뒤뜰엔 커다란 단감나무도 몇 그루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유독 이 배나무를 아끼셨다.
1950년에 일어났던 동족 간의 전쟁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남긴 채 휴전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전쟁이 지나간 마을 여기저기엔 시체들이 뒹굴며 악취를 풍겼다. 외할아버지네 마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의 주도하에 곳곳에 널려있는 시체를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외할아버지가 가족 대표로 그 일에 동원이 되었다.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를 적의 눈을 피해 위험이 덜한 야밤을 틈타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푸른 달빛이 실눈을 뜨고 내려다보는 창백한 밤에 시체를 치우는 작업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부엉이조차 울지 않던 그 밤, 시체를 둘러멘 사람들의 저벅대는 발걸음 소리만 정적을 흔들 뿐이었다. 무섬증에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지만, 할아버지 또한 그 일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며 열심히 시체를 날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먼동이 트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할아버지가 메고 가던 가마니 안에서 느닷없이 ‘여보세요’ 하는 쉰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 왔다. 시체가 말을 걸어오니 얼마나 놀랐을까. 할아버지는 그만 넋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할아버지가 들은 것은 환청이었을 것이라고. 그 길로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만 할아버지는 영영 일어나 보지도 못 하시고 세상을 뜨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뒤뜰의 배나무에 배가 열리지를 않았다. 가을이면 그리도 실하게 배가 열리던 나무였는데. 이태를 두고 배가 열리지를 않자 이웃의 한 노인이 삼베를 잘라 나무에 걸어봐 주라고 하였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외할머니가 삼베를 잘라 나무에 걸어주니 다음 해부터 배가 다시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무도 저를 아끼던 주인의 죽음을 슬퍼했던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한다면 나는 반박할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엔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몇 해 후 전란으로 망가진 집을 수리하면서 배나무도 결국 베어지고 그 자리엔 우물이 들어앉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떠나고 배나무도 베어지고, 세월은 모든 것을 쓸어안고 흘러갔지만, 코끝에 맴도는 배꽃 향기가 나로 하여금 오래도록 할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 ‘배꽃 향기’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