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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국내 BL
· ISBN : 9791156411482
· 쪽수 : 544쪽
· 출판일 : 2019-06-21
책 소개
목차
1. Erica tetralix (크로스리브드 헤더) 1
2. Erica tetralix (크로스리브드 헤더) 2
3. Erica tetralix (크로스리브드 헤더) 3
4. Erica cinerea (벨 헤더) 1
5. Erica cinerea (벨 헤더) 2
6. Erica cinerea (벨 헤더) 3
7. Erica cinerea (벨 헤더) 4
8. Calluna vulgaris (링 헤더) 1
저자소개
책속에서
집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어른들뿐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 역시 수준이 맞지 않는다면서 나를 놀이상대로 껴 주지 않았다. 당시 내가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바깥사람들이란 가정교사가 전부였는데, 권위주의적인 그 알파들은 누나의 어릴 적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새로운 점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들 앞에서 나는 매사 시큰둥했다.
다섯 살이었던 나는 원래라면 친목을 목적으로 수준이 비슷한 상위 계층 자제끼리 모여 교육을 받아야 했으나, 앞서 말한 적이 있다시피 이르게 발현해 외출이 금지된 상태였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보석이 손 안에 들어왔을 때 뽐내며 내세우는 것보다 잃을까 봐 겁을 내며 꽁꽁 감춰 두는 게 보편적인 반응이다. 지나치게 특별했던 내가 바로 그런 보석이었고 그 결과, 당사자인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지독한 과보호로 이어졌다.
고립된 환경 속에서 나는 무료한 나날들을 쌓아 올리던 참이었다. 언제까지고 칙칙할 것 같았던 분위기는 색다른 감정에 매료된 즉시 다양한 빛깔로 물들었다.
작은 얼굴. 마른 팔다리. 검게 그을린 피부. 까만 콩 같은 게…….
태어나 처음 만나 본 내 또래의 남자애였다. 응당 호기심이 쏠렸다.
내가 나타나면 벽이나 기둥 사이를 막론하고 우선 숨고 보는 짓이 웃겼다. 어떻게든 내 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려 가며 피하는 것 역시 재밌었다. 내 집에서 얹혀사는 주제에 나와 별로 마주 대하기 싫은 티가 역력했지만 걔가 보이면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근처까지 다가가 야, 하고 꼭 알은척을 해 댔다. 그럴 때마다 흠칫흠칫 떨리던 걔의 어깨가 인상 깊었다.
“이름, 뭐야?”
좁은 틈새에 숨어든 걔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현우.”
“이름이 두 글자야?”
“아니……. 세 글자.”
“다른 하나는 뭔데?”
“백.”
그걸 끝으로 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네 이름은 뭐냐며, 이어져야 할 질문을 기다리면서 내 고개는 점점 뒤로 꺾였다. 신장 차이로 내가 걔를 올려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멀뚱멀뚱. 그러고 있길 한참이다. 감기듯 걔의 눈꺼풀이 아래로 똑 떨어졌다. 바닥에 뭐가 있는 건가 싶어 덩달아 발밑을 살피던 나는 곧 속았단 억울함에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은 무척이나 긴 걔의 속눈썹에 완벽히 사로잡혔다. 숱이 많은 걔의 속눈썹은 유난히 까맣고 짙었다.
“나는, 성제이.”
내 이름은 진짜 예쁜 이름이었는데 내가 이름을 말해 줬음에도 걔는 예쁘단 칭찬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만 뾰로통해졌다.
앞을 가로막은 채 내가 자꾸만 쳐다보고 있자 난감한 기색으로 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었다. 방금 전까지 마른 나뭇잎처럼 버석거렸던 걔의 입술은 침이 묻어 촉촉해졌다. 짓씹는 게 습관인지 걔의 입술은 처음 봤을 때부터 핏빛이 돌 정도로 붉고 헐어 있는 상태였다. 아릴 것 같았다.
내 시선은 속눈썹 다음으로 걔의 입술에 처박혀 꼼짝하지 못했다. 가급적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젤리 같잖아. 젤리 같으니까 말랑말랑하겠지?
어수룩하게 음미했던 속눈썹과 달리 필히 부드러울 거란 확신이 들면서 나는 걔의 입술을 만져 보고 싶어졌다. 고작 다섯 살이라서 바람도 소박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내 나이가 다섯 살이 아닌 열다섯 살이었다면 걔의 입술을 빨아 보고 싶단 욕구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