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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8544003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2-12-20
책 소개
목차
책을 내며 _ 시간의 단편을 엮어보고 싶었다
믿음
그것으로 되었다 / 나를 증명하는 시간 / 빚이라 하는데 왜 빛으로 들리는가! / 나도 그저 나의 길을 가고 있을 뿐 / 자리 바꿔 / 비둘기 / 나는 정의, 남들은 오지랖 / 어른 되기 / 명품은 힘이 있다 / 다행이다 / 제주도는 알고 있다 / 홍콩에서 만난 나
소망
은총 잔치 / 나를 이끄시는 분 / 예, 여기 있습니다 / 주시는 대로 / 호칭 유감 / 영웅 혹은 천사 / 장기 이식 / 코로나 검사실에서 살아남기 / 혈액 투석실 풍경 / 말, 말, 말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 사우디아라비아 병원 안과 밖 / 리야드 센트럴 병원 / 지금 나는 안녕한가?
사랑
태교 / 이렇게 돈 벌어서 뭐 하지? / 서울대를 못 간 이유 / 농사 이전 / 마늘밭 비즈니스 / 호박 이야기 / 시래기는 알고 있다 / 아버지의 농사직설 / 아버지의 여행 / 엄마와 배추 / 엄마의 200만 원 / 엄마의 웨딩 사진 / 오해 / 유전자의 힘 / 바뀐 이름
발문 _ 곽경옥 수필집 『예, 여기 있습니다』에 부쳐/ 박기옥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머리말]
살다 보니 나는 원래부터 나였는데 세상에는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내 인생 경로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고 헤어져 갔다. 그들은 나의 시간 일부를 공유했을 뿐 나는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내 시간의 단편을 한 번쯤 어설프게라도 엮어보고 싶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난 다음, 나의 존재에 대해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말이다. 쉽게 쓴 책은 있어도 쉽게 산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책 한 권에 60여 년을 살아온 내 삶을 옮겨 놓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내 책이 이름 불리어지기를 희망한다.
휴대폰을 확인하다 문자 메시지 하나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설 명절 대통령 선물 받으실 분’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뜬금없었다. 대통령이 나를 어떻게 알고 이런 일을 하겠는가! 이젠 스팸 문자가 이렇게도 오는구나. (중략)
다음 날 동료들과 설 명절 보너스 이야기를 하다가 대통령 선물 문자가 생각났다. “이야! 요즘 보이스피싱이 진화하고 있더라. 이제는 청와대까지 건드린다. 대통령 설 선물이라니 너무 웃기지 않니?” 내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청와대 사칭 투기 사건은 진부하지만 대통령 설 선물은 신선한데요.”
그러자 행정처에서 근무하는 팀장이 끼어들었다. “어, 그거 진짜입니다. 보이스피싱 아닙니다. 청와대에서 코로나 때문에 고생한 의료인들 추천해 달라는 공문이 왔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선생님이 추천되었는데 선정된 분들은 문자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중략)
찬찬히 하나하나 꺼내 보시고 대통령 편지도 읽어 보시던 아버지께서 혼잣말씀을 나지막하게 하셨다. “음, 우리 딸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이런 걸 다 받아 왔겠노.” 그 말씀을 아버지 등 뒤에서 내가 들었다. 갑자기 목이 뻣뻣해졌다. 감춰진 생채기가 확 올라왔다. 가족한테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자존심이었는데, 무장 해제되어 버렸다. 우리 아버지한테 들켜버렸다. 그 선물이 나의 피땀이라는 걸! 아, 아버지! 세상 사람 다 몰라도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청와대 선물보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더 좋았다.
- 믿음, ‘그것으로 되었다’ 중에서
아이를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돌아서니 대기실에 사람이 있건 없건 눈물이 절로 나왔다. 뛰어다니지 말걸, 아침 거르고 다니지 말걸, 잠 좀 더 잘걸, 짜증 좀 덜 낼걸. 뱃속에서 널 잘 돌봤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다. 내가 너무 멋도 모르고, 그냥 아이만 낳으면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중략)
친정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내게는 슬퍼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꾸만 내 팔을 끌어당기며 우리 부부에게 밥을 먹이려고 하셨다. “홍 서방하고 네가 밥을 먹어야 기운을 내지. 너희가 기운이 없으면 아기는 앞으로 누가 돌보겠느냐.”라고 하신다. 동산병원 담벼락을 따라 나가 지하 식당에 가서 앉았다. 아버지가 내 걱정을 할까 봐 밥상 앞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었다. 밤새 배고프다 보채는 아이를 침대에 걸어둔 ‘금식표’ 하나 때문에 공갈 젖꼭지만 빨리다가 수술실에 혼자 눕혀놓고 나왔는데 밥이 밥이겠는가? 눈물이고 미안함이다.
“한 숟가락 푹푹 떠서 먹어라.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산다. 먹어야 힘이 난다. 둘째는 네 딸이지만 아버지한테는 너도 내 딸이다. 아이가 아픈 건 네 잘못도 아니고 네 죄도 아니다. 죄 때문에 아픈 거라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죄인들이란 소리냐?”
아버지가 나의 죄책감을 눈치채셨는지 그런 말을 계속 해주셨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 그 자리를 돌아보니 그 시간은 내가 아이를 키운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엄마로 키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소망, ‘주시는 대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