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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8609252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1-03-26
목차
오늘도 영재는 달린다
지게차 사고
물류센터
도난
A.I.
지게차 왕
저자소개
책속에서
“지난 한 달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물류센터의 전 사원들이 모이는 전체 조회가 있는 날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센터장의 지난 달 안부를 묻는 인사로 조회가 시작됐다. 한 달만의 전 직원들과의 만남인데 처음 내뱉는 말에 그리도 할 말이 없는지. 매번 똑같은 인사말의 조회 시작이다. 물론 애써 지어보이는 듯한 센터장의 밝고 어색하게 빛나는 얼굴 표정을 덤으로 볼 수도 있었다.
평소엔 유난히도 뻣뻣했던 그의 그 허리가 반쯤이나 되려는 듯 억지로 앞으로 숙여졌다. 그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 영재는 물론 거북하다.
‘평소에나 저렇게 잘 할 것이지. 무슨 정치인도 아니고.’
영재는 속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그 앞을 마치 호위라도 하는 듯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는 관리자들을 보고 있자니 영재는 조회 시작 전 벌써부터 짜증이 밀려왔다.
“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을 보니까 저절로 힘이 나네요. 제가 이렇게 전체 조회 시간마다 우리 사원님들께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죠? 기억들 하시나요?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일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가족입니다. 여러분들이 건강하고 또 여러분들의 가정이 평온해야…….”
여기까지 들은 뒤 영재는 발길을 돌렸다.
‘그냥 올라갈 걸. 역시 괜히 왔네.’
매달 돌아오는 전체 조회 때마다 되풀이되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뭐라도 있나싶어 항상 조회 중간 즈음까지는 들어보고 발걸음을 돌리곤 했지만 오늘은 왠지 시작부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까.
-다들 불만 섞인 투정에 신 회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항상 제 자리를 지키려 발버둥 쳤다. 전자 상거래 회사로서 동종 업계 최고라는 자부심. 수억에서 수십억에 이르는 연봉과 성과급. 임원들만을 위한 온갖 사내 복지와 부수적인 혜택들. 바로 일반 사원들에게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온갖 특권들이 그들의 발목을 꽉 쥐고 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웬만한 중견 기업 이상의 임원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신 회장의 성품에 대해 소문이 나 있는지 이미 오래였다. 그리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위 임원들만의 세계에 금방 퍼져 제대로 인식이 박혀 있는 임원들에게 신 회장이 버티고 있는 회사는 늘 기피 대상 중의 하나였다. 외국물을 먹은 사람들이나 업계 소식엔 둔하지만 능력 있고 고지식한 임원들이 간혹 스카우트되었다가 신 회장과 맞닥뜨리고 난 뒤 학을 떼고 줄행랑치는 경우들이 간간이 있을 뿐이었다.
영재가 근무하고 있는 물류센터의 센터장 역시도 외국에서 스카우트 된 케이스였다. 어떠한 인맥으로 인해 스카우트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었으나 센터장은 매월 첫 주에 있는 월례 조회 때마다 본인이 미국에서 왔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며 어깨를 세우곤 했다. 원래 혀가 짧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발음도 유달리 꼬부라지게 흘리는 듯 했고 미국은 어떻다는 식의 쓸데없는 비교를 많이 해서 듣고 있는 사원들로 하여금 종종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국내의 작업 환경이나 노동 실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점을 부각시키고 접목시키려고 시도해 현장에서 일하는 사원들의 짜증을 초래하곤 했다.
-‘저런데 쓸 돈 있으면 근로자들 열악한 근무 환경이나 처우에 대해 개선을 좀 더 해 주던가.’
영재는 잠시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영재가 사는 세상은 그들의 삶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은 달랐고 다른 영역이었다. 만약 영재가 그들 중의 한 부류였다면 영재는 달리 생각하고 또 달리 행동했을까. 영재는 그것에 대한 확신 또한 없었다. 그저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의 이하의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삶일 뿐이었다.
갑자기 어딘 가에 누워있을 덕수가 생각났다. 스스로는 앉아 있을 수조차 없는…….
곧 퇴원할 것 같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쉽게 다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결국 현장 관리자들을 통해서만 간간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덕수 보상은 제대로 잘 받았는지 모르겠네…….’
덕수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왔다. 이제 마음잡고 결혼해 잘 좀 살아보겠다는 청춘인데 그런 끔찍한 사고를 내려주시니 하늘도 참 무심하다고 생각했다.
-영재는 다른 지게차 사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 휴게 시간 지게차를 잠시 충전해 놓은 곳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게차는 ‘윙’ 하는 둔탁한 충전 소리와 함께 여전히 충전이 되고 있었다. 문득 충전 단자를 지게차에서 빼내어 그 모양새를 요리조리 유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업무가 끝나면 빠르게 집에 갈 생각에 혹은 한시라도 피곤한 몸을 빨리 쉬게 해주고 싶은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급하게 충전기만 끼고 빼봤지 지금처럼 그 생김새를 세밀히 관찰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이 작고 가느다란 전기선으로 사람이 탈 수 있는 거대한 고철 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고 생각하니 그 모습이 달리 보이고 신기하기만 했다.
지게차에 올라 탄 영재는 자신이 잠들었던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일을 해 온 것처럼 태연히 움직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연하게 지게차를 운전해 나갔다. 다행히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