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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8966409
· 쪽수 : 120쪽
· 출판일 : 2024-03-29
책 소개
목차
제1부
어떤 기린•13/오빠가 있다•14/저녁은 온다•15/모퉁이 돌아가면•16/소•17/우후(雨後)•18/그것이 있다•19/구중궁궐 용대리 가을 길에 화사하던 꽃뱀들이•20/못골공원•21/감자꽃•22/당신은 없고•23/밑정•24/행여나•25/첩첩•26/미망(未忘)•27/가는 줄도 모르고•28
제2부
먹다 만 토마토•31/걷어붙이다•32/얼룩말의 무늬는 반대쪽으로 달아난다•33/양파와 깁스•34/다행이다•35/가요무대•36/낮잠•38/보이저星 2호•39/공중의 계단•40/빈집•41/체위•42/개밥그릇•43/FM 91.1 MHz 뻐꾸기 소리•44/다리목 경전•45/문장이 아니었지만•46
제3부
벽의 질문법•49/릴렉스, 릴렉스•50/좁교•51/돛대도 아니 달고•52/새까맣게 꽉 들어찬 허공 이야기•53/짜라투스투라가 말했지•54/허공에 목을 걸고•55/음모•56/컴온,•57/텅 빈•58/소록도 푸른 눈•60/내 서늘 지오그래픽•61/옥봉 세한도•62/슬픔의 계보•63/가린다는 것•64/까마중•66
제4부
공터가 많아서•69/감자처럼요•70/서부탕•71/뒤를 준다는 것•72/눈 내리는 소리를 듣다•73/기왕•74/이름표•76/숙란(淑蘭)이•77/저녁•78/보따리 구음•79/시대이발관•80/흑백다방•81/미검•82/못잊어 감자•83/수국•84
제5부
친근•87/정처•88/꽃과 새•89/강명리 마을회관•90/그저•91/악수•92/그때 우리는 그랬어야 했다•94/금문교•95/모르는 거라서•96/롸져•97/내 몸에 풀이•98/만장(輓章)•99/무실장터 사노(私奴)는•100/눈빛•101/달밤•102
해설 김남호(시인, 문학평론가)•103
저자소개
책속에서
■ 해설 엿보기
김수환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그리움과 아픔이다. 이 두 기둥은 시조라는 전통의 형식으로 주춧돌을 삼고, 시인의 DNA에 각인된 리듬으로 칸을 짓는다. 지붕은 “줄줄 새는 밤”(「돛대도 아니 달고」)으로 엮어서 이었다. 이렇게 세운 그의 집은 ‘저녁’이라는 ‘시간성’이 측면을 비추고, ‘뒤쪽’이라는 ‘방향성’이 후광으로 받치면서 윤곽이 드러나긴 하지만 흐릿하다. 이 흐릿함으로 인해 그의 시는 모호하지만, 화선지 위에 떨어뜨린 먹물처럼 한없이 번져나가는 여운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실제보다 훨씬 멀리 보이는 볼록거울의 효과를 거둔다. 그의 좋은 시편들에서 종종 느끼게 되는 막막함이나 아득함은 바로 이 효과에서 기인한다.
시조라는 형식과 그리움이라는 정서의 결합은 낯설지 않다. 시조라는 형식과 아픔이라는 정서의 결합 역시 그러하다. 이런 익숙함 탓에 시조는 고리타분한 장르라는 오랜 혐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인은 이런 완고한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안간힘의 한 모습이 모호함에서 오는 모던함이다. 물론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방법론은 아니겠지만, 그의 주특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또 다른 주특기는 탄탄한 구성력에서 오는 문학적 완결성이다. 둘을 묶어서 말한다면 ‘모호한 완결성’이라는 형용모순이 되겠지만, 주지하다시피 문학의 힘은 종종 모순에서 오지 않던가.
방죽에서 정물처럼 서서 되새김질하는
소들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누우면
저녁이 긴 마음처럼 스미듯 찾아들고
문설주에는 양의 피, 문 닫는 애굽인들처럼
이제 곧 햇빛 없는 시간을 맞아야 하는
구절초 눈꺼풀에서 불안한 저녁은 오고
통성기도, 호곡 같고 숭고한 의식 같은
밤을 맞는 풀벌레들의 조급함과 비장감에도
세상의 모든 저녁이 찾아와서 눕는다
저물녘은 견디기 힘들더라는 그 사람
저녁의 전조 앞에서 어떡하나 하다가
큰 눈을 깜박이다가, 일생이 저물다가
― 「저녁은 온다」 전문
인용 시는 사랑과 휴식이 기다리는 ‘낭만적인 저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저녁은 온다’는 제목부터 긴장감을 준다. ‘저녁이 온다’와 ‘저녁은 온다’는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전자가 기다리는 것이 마침내 온다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피하고 싶은 것이 기어이 오고야 만다는 느낌이다. 이 시는 불안과 공포가 기다리는 저녁의 분위기를 묵시록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체 4연으로 짜인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조이다.
그런데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드는 의문.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지?’, ‘뭐 때문에 평생 동안 저물녘을 힘들어하지?’ 이런 의문형을 만드는 것이 바로 김수환 시의 모호함이고 모던함이다. 그리고 김수환이 ‘그리움’을 말하는 방식이다. 얼마나 그리움으로 힘들었으면 저물녘이 올 때마다 초조하고, 밤을 지새울 걱정에 “구절초 눈꺼풀”처럼 불안해하는가?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그 사람’이 관련된 어떠한 서사도 생략된 채 저녁을 맞는 정황만 묘사돼 있다. 생략된 부분을 채우는 것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이다.
어떤 낌새만으로 독자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능력은 좋은 시인의 자질이다. 이런 자질에 힘입어 그리움이라는 가장 친밀한 정서를 모호하고 묵시록적인 분위기에 담아 아주 낯설게 만듦으로써 낭만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긴장감을 획득한다. 이를 통해 시조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자칫 시를 느슨하게 만들 수도 있는 감상성(感傷性)을 지그시 눌러 문학성을 높인다. ‘모호한 완결성’이란 이런 것이다.
― 김남호(시인, 문학평론가)
1
늘씬한 다리와 딴딴한 허벅지입니다
숨 가쁜 탄력입니다 오직 지금입니다
꿈에 본 세렝게티를 돌파하는 질주입니다
2
한 손에 들어오는 미끈한 목입니다
높아만 가는 생각입니다 기다란 원망입니다
오로지 한 사람입니다 무방비 그 사람입니다
― 「어떤 기린」 전문
월요일이 나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수요일이 나를 모른다고 말한다 당신은 없고 금요일이 나더러 뭐하는 사람이냐고 한다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모두가 내게는 일요일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없고
자꾸들 그리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 「당신은 없고」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