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예술/대중문화의 이해 > 미학/예술이론
· ISBN : 9791159018824
· 쪽수 : 158쪽
· 출판일 : 2022-04-30
목차
편집자 노트 6
역자 서문 8
들어가며
칸딘스키 회화의 발전에 관한 약간의 설명 21
바실리 칸딘스키 27
칸딘스키의 언어 32
1부: 일반 미학에 관하여
I. 서론 43
II. 삼각형의 운동 50
III. 영적 혁명 55
IV. 피라미드 70
2부: 회화에 관하여
V. 색의 심리작용 75
VI. 형태와 색의 언어 80
VII. 이론 117
VIII. 예술가와 예술작품 128
XI. 결론 132
부록 I. 산문시
- 바순 136
- 다른 138
- 눈빛과 섬광 139
- 보기 140
- 불명예 141
- S 142
- 백색 호른 143
- 언제나 같이 144
- 그러므로(Therefore) 144
부록 II. 칸딘스키 연보
영어본 2판 감사의 말 149
독일어본 초판 서문 150
독일어본 2판 서문 151
역자 후기 152
책속에서
I부
일반 미학에 관하여
I. 서론
모든 예술작품은 시대의 자녀이며, 종종 우리 정서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문화의 각 시기마다 고유의 예술이 만들어지며, 그러한 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과거의 예술원칙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은 기껏해야 사산된 태아와 유사 예술품을 생산할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살고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의 조각 원칙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형태의 유사성에는 도달할 수 있지만, 작품은 영원히 영혼이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한 모방은 원숭이의 흉내 내기와 비슷하다. 겉으로 원숭이는 인간을 닮았다. 원숭이는 코앞에 책을 들고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러나 원숭이의 행동은 진정한 의미가 없다.
그런데 예술의 형태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필요에 바탕을 둔 또 한 종류의 외적 유사성이 있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한 시대와 다른 시대 사이에 한 시대와 다른 시대 사이에 도덕적, 정신적 환경의 방향의 유사성 방향의 유사성, 처음엔 철저히 따라가다가 나중에 시야에서 놓쳐버리는 이념과 “내적 분위기”의 유사성 이념과 “내적 분위기”의 유사성이 있을 때, 그 논리적 귀결은 이전 시대의 지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 외적 형태의 부활 외적 형태의 부활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원시인들의 예술에 대한 우리의 공감과 애착, 그리고 이해의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순수예술가들(원시인들)은 작품으로 오직 내면의, 본질적 느낌을 표현하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우연의 요소는 당연히 제외되었다.
이 중요한 내적 접촉점은 상당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 오랜 기간의 유물주의(materialism)에서 막 깨어나고 있는 우리 영혼은 불신이 낳은 절망, 목적과 목표의 상실에서 오는 절망을 앓고 있다. 삶을 악하고 쓸모없는 게임으로 타락시킨 유물주의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영혼을 아직도 어둠으로 덮고 있다. 희미한 빛 하나, 거대하고 둥근 암흑의 원 안에서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다. 이 빛은 예감에 불과하다. 빛을 보는 마음은 그것은 꿈이고 주위의 어둠이 현실인지 의심하며 전율한다. 이 의심과 유물주의의 독재는 우리를 원시인들로부터 잔인하게 떼어놓는다. 우리의 영혼은 땅속에서 파낸, 흠이 있는 도자기처럼 두드렸을 때 금이 간 소리를 낸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파생적 형태의 현 원시단계는 금방 끝나게 되어 있다.
오늘날과 과거의 예술 형태들 사이의 이러한 두 종류의 닮은 점은 서로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첫 번째 닮은 점은 순전히 외적인 것으로 미래가 없다. 두 번째는 내적인 것으로 미래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한동안 영혼은 유물주의의 유혹에 거의 굴복했다가 뿌리치고 나왔으며 이제 시련과 고통으로 정화되어 일어서고 있다. 두려움, 기쁨, 슬픔 등, 이 시련의 시기에 속하는 거친 감정들은 더 이상 예술가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예술가는 아직 규정된 적 없는, 더 세련된 감정을 일깨우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가 앞으로 복잡하고 세련된 삶을 살게 될 것처럼, 그의 작품은 감수성이 예민한 관람자들에게 언어를 초월하는 고상한 감정을 선사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람자는 그런 떨림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 대신 실 용적 기능을 가진 자연의 모방(예컨대, 보통의 초상화), 어느 정도의 해석을 곁들인 자연의 직관(예를 들어, “인상주의” 회화), 또는 자연의 형태를 이용해 표현된 내적 감정(우리가 “분위기” 화라고 부르는 그림)을 찾는다. 진정한 예술작품이라면 그 형태들은 목적을 달성하고 정신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이 말은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지만, 관람자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상응하는 선율을 듣게 되는 세 번째 경우에 더 강하게 적용된다. 그런 감정의 선율은 피상적이라거나 무가치한 것일 수 없다. 그러한 그림의 정서는 관람자의 정서를 진정 깊어지게 하고 순화시킬 수 있다. 적어도 영혼이 거칠어지는 것을 막는다. 조율키가 악기의 현을 조율하듯 그런 그림들은 영혼을 조율시킨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선율의 세련화와 연장은 제한적이며, 그것으로 예술의 잠재력이 고갈되지는 않는다.
방이 여러 개인 건물(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을 상상해보자. 방마다 벽에 다양한 크기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마 수천 점에 이를 수도 있다. 그림들은 자연의 조각들(fragments)을 색으로 재현한다. 햇볕을 쬐거나 그늘에 있거나, 물을 마시거나 물속에 서 있거나 풀밭에 누워있는 동물들. 그 옆에 예수를 믿지 않는 화가가 그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있다. 그리고 꽃들, 그리고 앉아있거나, 서 있거나, 걷고 있는, 때로는 나체의 사람들, 뒤에서 가까이 당겨 그린 다 수의 나체의 여인들, 사과와 은접시들, 아무개 씨의 초상화, 석양, 분홍색 의상의 여인, 날아가는 오리, X 부인의 초상화, 날아가는 기러기, 흰옷 입은 여인, 밝은 햇빛을 드문드문 받는 그늘의 소 떼, Y 대사의 초상, 초록 의상의 여인. 이 모든 그림이 화가 명, 그림의 제목과 함께 책에 정성 들여 복제되어 있다. 사람 들은 책을 손에 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이름을 보면서 벽에서 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더 부자가 되지도 더 가난해지지도 않은 채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개인 업무를 다시 보기 위해 떠난다. 그들은 왜 왔던가? 모든 그림에는 고통과 의심, 열정과 영감의 시간 등 인생 전체가 신비롭게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