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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 ISBN : 9791160948981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22-01-07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5
1장. 숙명의 리더와 성찰의 리더: 대통령이 되기까지 13
민주주의를 갈구한 신념의 투사
시작은 패배였지만-40대 기수론, 그 찬란한 실패 15
선명한 의회주의자의 정치 투쟁 20
김대중이라는 딜레마를 넘어서 29
성찰의 길을 걸은 숙련된 현실주의자
역경이 만든 지식인형 정치인 34
비판적 현실주의자의 대안 모색 41
세 번의 패배와 한 번의 승리 48
2장. 눈앞의 지형도: 권력이 현실화되는 자리 51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가다
3당 합당-기묘하고 위험한 선택 53
내각제의 덫에 빠지다 57
완벽한 복종을 얻어내기까지 64
위기를 기회로 바꾸다
지역주의로부터 지역주의 밖으로 71
준비된 지도자 혹은 대통령병 환자 78
동료의 손을 함부로 뿌리치지 마라 84
3장.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이다: 집권 초기의 개혁 89
단호하게 결심하고 철벽같이 밀어붙이는 속도전의 대가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됩니다” 91
조선총독부 해체-민주공화국의 정통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95
공직자 재산 등록-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 103
하나회 해체 I-별들의 이전투구 108
하나회 해체 II-단칼에 베다 120
텅 빈 국고의 열쇠를 받은 후 새로운 질서를 만들다
문민정부, 환란의 전주곡을 틀다 127
한보 사태-1997년 1월의 삭풍을 누구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131
삼성 보고서가 불러온 파란 137
얼어붙은 아시아 금융 시장 143
재벌 중심의 성장과 독점의 결말 148
문민정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다 152
김대중이 이끈 변화, 김대중 정부가 주도한 변화 155
4장. 무엇을 무너뜨리고 무엇을 세울 것인가: 다음 시대를 위한 대통령의 정치술 167
과거의 비극에 정치권력이 응답하는 방법
노태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거부하다 169
반발-여소야대 국회와 두 번의 청문회 175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191
국가가 잘못을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시대를 열다 199
거절과 반대를 설득과 동의로 넘어선 햇볕정책
현실과 공상 사이에서 방향을 가리키다 208
노태우의 북방정책과 평화 공세 216
김영삼 정권기의 혼란-꺼져버린 통일의 불씨 223
베를린 선언과 남북 정상 회담-경쟁 아닌 공존의 틀을 만들다 228
5장. 세기를 넘어서 237
김영삼과 김대중의 마지막 도전 I-재벌 개혁과 노동 문제
금융실명제와 정치 개혁 239
금융실명제와 재벌 개혁 245
시드니 구상과 OECD 가입 247
정리해고제 도입 259
경제-개방과 희생 앞에서 261
김영삼과 김대중의 마지막 도전 II-한일 관계와 관료 문제
협력 외교의 전범을 쓰다 270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나아지고 있는 관료제 276
마치며 283
주 285
참고문헌 297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여야 갈등, 부정 선거, 4·19혁명 그리고 혁명의 열기 가운데 쏟아져 나온 급진적 주장과 행동들. 야당 의원 김영삼은 정권의 부정부패에 저항했고, 혁명의 열기를 의회 안으로 옮겨와서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려 했다. 의회주의자 김영삼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그는 민주공화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과 마주친다. 그의 나이 34살이던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 김영삼이 이해한 민주주의는 박정희의 정반대편에 있었다. 자유라는 가치의 절대성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적 기초. 박정희는 이 둘을 부정했다. 김영삼이 보기에 박정희의 통치는 실패했다. 자유를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은 박정희의 원칙 없는 통치는 ‘부의 불평등’, ‘황금만능주의’, ‘정경 유착’, ‘인권 유린’ 등을 초래해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_ 「민주주의를 갈구한 신념의 투사」 중에서
단식 23일째인 1983년 6월 9일에는 성명서를 통해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부활은 바로 민주주의 실현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민주주의 없이는 우리 모두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 단식 투쟁의 결과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가 결성된 것이다. 여러 야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박찬종, 김창근 등 구 여권 인사까지 함께 모여 ‘정당형 반체제 단체’인 민추협을 만들었고, 이 단체는 반독재 투쟁의 중요한 구심점이 된다. (…) 애초에 김영삼은 의회주의자. 그는 초선 이후 대통령이 될 때까지 국회를 벗어난 적이 없고, 유신 체제하의 불합리한 선거 구조에서도 국회 안에서 싸움을 이어왔다.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결국 선거에서, 국회에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이다. 국회를 벗어나 어디에서 국민을 설득하겠으며 국민은 국회 말고 무엇에 의지하여 변화를 요구하겠는가. 재야와 운동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영삼과 민추협은 총선 참여를 결정했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_ 「민주주의를 갈구한 신념의 투사」 중에서
1970년 10월 16일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기자 회견을 열고 ‘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 교류와 평화통일론’, ‘대중 경제 노선’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향토예비군 폐지,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및 교역 추진, 초중등학교의 육성회비 폐지, 사치세 신설, 학벌주의 타파, 이중곡가제 실시 등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김대중은 박정희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비전을 제시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채 6·25전쟁에서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대립과 반목을 낳는 반공주의는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 ‘문제 해결을 위한 대범한 노력이 필요하다.’ 김대중은 주변 열강을 끌어들여 다자 대화 구도를 만들고, 동시에 북한과 직접 대화를 시도하며 긴장 상태를 주체적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심지어 공산권과도 대화하고 교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야권의 입장에서도 매우 파격적인 사고였으리라. _ 「성찰의 길을 걸은 숙련된 현실주의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