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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끓는점

탐욕의 끓는점

잔향기 (지은이)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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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끓는점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탐욕의 끓는점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4651
· 쪽수 : 432쪽
· 출판일 : 2021-03-19

책 소개

잔향기 장편소설.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린 서세하.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윤혁을 버려야만 했다. 10년 간 한결같이 자신만을 사랑해 준 남자, 정윤혁을.

목차

프롤로그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외전 1
외전 2

저자소개

잔향기 (지은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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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신부가 사라졌다.

버진로드 위 신부의 입장을 환영하는 클래식 운율은 동일한 구간이 반복되고 있다. Time to say goodbye. 전율이 흐르는 듯한 이 배경음악은 인생 최고의 순간을 예술로 남기는 데 부족함이 없으리라. 물론, 어디까지나 신부가 나타나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하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을 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 입구의 조명 아래 그녀의 부재는 너무도 명확했다. 신부가 등장하지 않으니 무려 두 번의 하이라이트 곡조가 반복되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눈치껏 연주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연주자들의 살갗은 땀구멍마다 식은땀이 축축이 뱄다. 신부의 부재로 장내는 한층 소란해졌다. 사회자는 잠시 진행을 중단하고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신부 서세하 양이 긴장을 한 탓인지 진행에 잠시 차질이 생긴 모양입니다. 하객 여러분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한 윤혁은 눈앞이 핑글 도는 것 같았다. 선거 포스터처럼 유려했던 그의 미소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양가 부모들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저를 보고 있었다. 하객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머. 웬일이야. 신부가 안 온 거야?”
연단의 마이크를 쥔 사회자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메아리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금방 다시 식이 진행될 예정이니 하객 여러분께서는 부디 양해를…….”
허나 윤혁은 세하가 사라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도망쳤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행방을 눈치챈 이는 윤혁뿐이었다. 하객들이 그것을 눈치채기에 이 결혼은 너무도 성대하고 완벽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완벽해 보이도록 속여야만 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신랑 정윤혁 신부 서세하
오늘은 대한민국 최정상 성진 그룹의 오너 정진건 회장의 막내아들 윤혁과,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 서규명의 딸, 세하가 미래를 서약하는 날이었다. 넓은 리셉션장 로비는 결혼식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부터 사람들로 가득했다. 각종 부처의 장관, 국회의원과 기업 회장들을 비롯해 저명인사들의 하객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정 이사. 축하하네. 양가의 선남, 선녀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군.”
악수를 받아 내는 윤혁보다 양가의 아버지들이 훨씬 크게 웃었다. 이 결혼은 정 회장의 자부심이고, 대통령의 위치를 바라보고 있는 규명에겐 정치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들의 자녀인 윤혁과 세하의 결합은 서로의 집안에까지 득이 되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성대한 경사이기에, 이곳에 자리한 누구도 감히 신부가 입장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기 좋게, 세하는 그 예상을 꺾고 촌극을 연출했다.
쓰레기통에 핸드폰을 버리고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세하는 비상문을 통과해 미친 듯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녀에겐 단 1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지금이 몇 층이고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하는지 생각하거나 계산할 틈 따위 없었다. 들키지 않아야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들키지 않아야 죽지 않을 수 있으므로 미친 듯이 달려야 했다.
끈이 풀린 운동화를 신고 달려 내려가는 소리가 비상계단 내부의 적막을 깼다. 그렇게 한참 뛰어 내려가다 비상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업원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괜찮으신…….”
남자가 이 사태의 유일한 목격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하는 모자를 조금 더 깊게 눌러쓰고 묵례를 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그를 지나쳐 다시 내려갔다. 손목시계를 보니 3분밖에 남지 않았다. 무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만큼의 정신이 아니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저 숨이 턱 끝까지 찰 정도로 가쁘게 계단을 내려갈 뿐이다.
이내 비상계단의 문이 쾅, 열리고 지하 주차장의 입구가 드러났다. 세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한 번 휘청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 미리 외워 둔 구역까지 단번에 달려간 뒤, 그녀가 무사히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승합차에 탔다.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어요. 이제 모든 걸 하늘에 맡기면 됩니다.”
박 실장은 그녀를 담요로 여며 주며 당장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너무 늦은 건 아니죠?”
“제 시간 안에 도착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승합차가 미끄럽게 대로변으로 빠져나갔다. 늦지 않게 바로 인천공항으로 직행하리라. 호텔의 출입 CCTV는 박 실장 측에서 미리 손을 써 두었다. 세하가 인파를 뚫고 제시간에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모든 걸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기적에는 운이 따르듯이, 지금 이 순간 역시 하늘이 내린 뜻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녀를 향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정윤혁에게서 도망쳐야만 한다고.
“준비해 뒀던 기사는 언제 터뜨리는 건가요.”
“모두 키핑해 뒀으니 아가씨께서 안전하게 대한민국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 연달아 속보로 터질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진을 망가뜨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이겠죠.”
그녀의 이 계획된 도주는 복수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아직까지 풀지 않은 많은 선물이 남아 있다. 그 선물의 수하인은 윤혁과 성진, 그리고 제 아버지 규명이 될 테다.
박 실장이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가씨. 많이 겁이 나시죠?”
“겁나지만…… 반드시 이렇게 했어야만 했어요.”
비상계단으로 뛰어 들어가기 전, 그녀는 쓰레기통 앞에서 멈칫했었다. 조심스럽게 왼손에 끼워 둔 반지를 빼냈다. 프러포즈를 받고 나서 매일 지니고 다녔던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마지막으로 매만져 보고 그것을 힘껏 던지자 쓰레기들 사이에 반지가 처박혔다. 세하는 허탈한 표정으로 쓰레기통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후련하기만 할 뿐, 윤혁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정윤혁. 나는 더 이상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거야. 모조리 여기에 버리고 갈 거야. 언젠가 네가 그랬듯 흔적은 지우라고 있는 거니까.
마지막 분신이었던 반지를 버리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세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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