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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5160
· 쪽수 : 512쪽
책 소개
목차
21章. 궁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이 애처로운데
22章. 달은 지고 까마귀가 우니
23章. 달빛이 내려앉은 창가에 밤비는 내리고
24章. 돌아갈 곳 어디던가
25章. 상사난 想思難
저자소개
책속에서
누구를 믿고 싶은 것인가.
그동안 몇 번이고 태언에게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를 온전히 떨치지 못했던 것은 그와 함께했던 시간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의 손으로 짓밟은 과거나 다름없으나 수선에게는 유일하게 애정이 흘러넘치던 시기였다.
천대받던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보듬어 준 애정 어린 손길. 자신을 이용해 황위를 거머쥔 태언이지만, 배신의 초석으로 삼았다기에 다정의 시간은 길었다. 수선의 인생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 시간을 어떻게 송두리째 잃을 수 있을까.
이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의도된 바가 아니길 바라는 수선의 얄팍한 희망과도 같았다.
“그것을 어찌하여 묻는 것이냐.”
“저를, 반기지 않으셨다고는 하나 제 부모님이십니다. 저는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테고, 가족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남은 유품이라곤 그 쪽지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걸 달라? 이안국으로 오려거든 차라리 목숨을 끊으라는, 그 쪽지를?”
태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신랄한 말투로 물었다. 수선은 참담한 기분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젠 그 말조차도 다신 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갖고자 하는 자와 줄 수 없는 이의 소리 없는 싸움이었다.
수선의 대답에 태언은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녀에게 죽음의 아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자진을 강요했다 할지라도 수선에게는 그들이 유일한 핏줄이니. 돌아갈 곳과 뿌리를 모두 불살라 버린 자로서 할 말은 없어야 했지만 태언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쯤 그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수선의 삶이 얼마나 잔인하게 유린되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시 그때가 돌아온대도 결국 태언은 똑같은 선택을 반복할 테니 차라리 수선에게는 자신을 미워한 가족이 전쟁의 화마에 휩쓸려 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이제 더 이상 수선에게 숨기는 진실 따윈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계속 그 운명과 엮인 이들로 인해 슬픔을 곱씹게 두고 싶지 않았다. 태언은 제 감정을 갈무리하며 애써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버렸다.”
“……버려요?”
“그깟 쪽지 따위 내가 계속 갖고 있을 줄 알았더냐? 네게 보여 준 뒤 불살라 버렸다. 마지막 한 글자까지 남김없이.”
“이안국처럼 말인가요.”
실망의 빛이 완연한 수선의 허망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태언은 착잡한 심경으로 답했다.
“……그래, 이안국처럼.”
결국 평온한 시간은 두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고요히 결렬된 식사 자리를 앞두고 태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 있다간 자신이 수선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태언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 순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수선이 그를 붙잡듯 물었다.
“그 쪽지, 폐하께서는 어떻게 얻으신 건가요. 내용대로라면 본디 제가 받았어야 하는 것인데.”
태언은 열린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으며 수선을 향해 돌아섰다.
“도대체 이제 와서 왜 그걸 궁금해하는 거지?!”
“전 그저 제 가족의 끝을 조금이나마 거둬 보려고…….”
“네가 이토록 가족의 흔적을 찾는 줄 안다면 널 비웃을 자들이다. 이곳에 널 볼모로 보내고 단 한 번 안부조차 묻지 않은 이들이야. 강만 건너면 어떻게든 널 만날 수도 있었는데!”
수선을 마주한 태언의 시선은 무섭게 내려앉아 있었다. 짙은 어둠이 밴 눈매가 사납게 수선을 응시했다.
“네가 손쓸 틈도 없이 죽어 버리니 안타까워서 그런 것이냐? 똑똑히 기억해! 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네 원망만 했을 게 틀림없다. 널 죽음의 아이라 부르면서! 그런데도 그들을 끝까지 포용할 셈이냐?”
“……그들은 제 가족이지 않습니까.”
“가족, 하…… 그래. 가족이라. 네 말을 들으니 참으로 그들이 부럽구나. 나는 이토록 네 마음을 안달하는데도 안 되는데, 그들은 죽어서 네 마음에 흔적을 남겼으니!”
태언의 목소리에는 결코 자신이 넘어설 수 없는 것에 대한 허탈하고 절망적인 심경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깟 핏줄이 뭐라고, 가족이 뭐라고. 애초에 그들이 널 죽음의 아이라 낙인찍고, 방관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이 벌어졌을까?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태언은 안 될 걸 알면서도 속에 가득 들어찬 절망의 피고름을 짜내듯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네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나도 너와 함께했다. 핏줄이 통하지 않았다 하나 내가 네 가족이 될 순 없었던 것이냐.”
수선은 애타게 제게 묻는 태언을 마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언의 눈빛이 절실하였으나 수선에게는 그것조차 실망의 연속이었다. 이로써 그는 제게 주어진 해명의 기회를 완전히 잃었다.
“무슨 연유로든 폐하께서 이안국을 불사르신 순간, 저와의 모든 인연도 함께 불에 타 재가 되었으니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사이는 더 이상 돌이키기 어렵다는 것을.
냉랭한 수선의 대답을 들은 태언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어차피 수선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기꺼이 악역의 관을 쓰겠다 맹세했다. 그러니 여기서 수선이 제게 더 실망한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괴로움을 삼키는 것은 혼자로도 충분했다.
태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며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 세상에 네 가족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절대 만날 수 없어. 내가 허락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