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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5849
· 쪽수 : 480쪽
· 출판일 : 2022-05-31
목차
12
13
14
3부. 드웨인 플라워
1
2
3
4
5
Epilogue (1) 다섯 번째 열병의 이름
Epilogue (2) 흔적
Epilogue (3) 가문의 이름
Epilogue (4) 보상
Epilogue (5) 그림자
Epilogue (6) 빛의 땅
Epilogue (7)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키로나가 목적지로 지정한 곳은 로하튼 백작가 인근의 야시장이었다. 제이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키로나를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드는 솜씨가 수상할 정도로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봐도 몰래 여러 번 나와 본 눈치였다.
“혹시 저 몰래…….”
“응, 젤다 데리고 자주 나왔어. 넌 보나 마나 밤공기가 차니 내가 기침을 하니 하면서 잔소리할 테니까. 근데 야시장은 처음이야. 4년 전에 너랑 한 번 갔다 온 후로.”
“공주님.”
그의 부름에도 키로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알아, 위험한 거. 근데 나도 바람 정도는 쐬어야지. 게다가 네가 지금 위험한 행동 하는 걸로 나한테 뭐라고 할 입장이야?”
“저랑 공주님은 다릅니다.”
“뭐가? 목숨의 무게가?”
제이드는 키로나가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늘 모순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누구보다 특별한 신의 후예이며 살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으면서, 정작 그 존귀한 혈통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순간이면 움직이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 목숨을 서슴없이 내놓는 쪽이었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로나는 그 침묵을 다른 쪽으로 해석한 듯 엉뚱한 말을 했다.
“장례 치러 준다는 이야기 하니까 기분 나빠? 근데 어떡해. 네 고집을 내가 아는데. 내가 아무리 말려도, 너는 결국 나가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장례식을 치러 주겠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제이드는 키로나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기세로 보아 화가 난 것도, 씁쓸한 것도, 우울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확실히 결정지은 사람처럼 얼마쯤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나를 포기하고 죄책감을 좀 내려놓으신 건가. 서운함이 느껴지기는커녕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더 이상 키로나가 그를 내보내지 않겠다 우기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때 후드를 덮어쓴 키로나가 그에게 팔짱을 꼈다. 제이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딱하게 굳은 채 고개만 간신히 숙여 키로나를 내려다보았다.
“늘 뒤에서만 따라오다가 옆으로 오니까 어색해?”
“공주님, 이건 좀…….”
“너무 연인 같지?”
제이드는 제풀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키로나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없이 제 몸 쪽으로 더 바짝 잡아당겼다.
“그냥 모른 척하고 즐겨. 공주님이 좋아해 주는 게 쉽게 찾아오는 기회인 것 같아? 이번 생이든 다음 생이든.”
키로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자신은 세상에 못 가져 본 게 별로 없다고 말할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제이드는 몇 번 키로나를 떼어 내려 애써 봤다가 포기했다. 진심이 담기지 않으니 손에 힘이 실리지도 않았다.
“별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렇지? 기적 같은 일이지?”
제이드는 흐리게 웃었다. 키로나의 물음에 대답한 게 아니었다. 의지할 데가 없는 공주님이 곁에 있는 호위에게 잠깐 정을 주는 것보다 기사가 주제를 모르고 진심으로 공주님을 탐내는 게 훨씬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사랑 아니겠나. 그러니 어려운 걸로 따지자면 그의 사랑이 더했다.
하긴 이클립스가 하는 사랑이란 게 다 그랬다. 남들도 다 하는 안온한 사랑에는 몸에 흐르는 피가 반응하지 않는 모양이지. 사랑해서는 안 되는 상대를, 사랑해서는 안 될 때, 그래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게 그들의 특기였다. 그러니 사랑에 광기가 서릴 수밖에.
“여자랑 한번 나가서 놀아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는 거야. 네가 맺힌 거 없이 저승에 갈 수 있게.”
“그게 제 장례 준비입니까?”
“후회할 일이 남으면 안 되잖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제 저를 좀 포기하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요.”
마지막이라는 말은 유혹적이었다. 그걸 핑계 삼아 뭐든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이드는 그래서 못 이기는 척 키로나를 팔에 달고 사심을 채웠다. 정말로 그가 공주의 정부라도 된 것처럼.
“오늘은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마차에 오르자마자 키로나가 그에게 선언했다.
“그러니까 너 하고 싶은 것도 말해 봐. 솔직하게.”
지난 4년간, 키로나가 솔직하게 답하라는 말에 진짜 솔직하게 답했다면 그는 진작 마론이나 마리 로웰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키로나는 그가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도 있었다. 단지 그게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일인 것뿐이지.
평소 같으면 없다고 얼버무렸을 것 같은데, ‘마지막’이라는 마법 같은 말 때문인지 그는 저도 모르게 마음 한 자락을 내보이고 말았다. 그는 키로나의 입버릇을 흉내 내어 말했다.
“세상에는 절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있긴 있다는 거네?”
“안 되는 겁니다.”
“나는 공주야. 나한테 안 되는 건 없어. 말해.”
제이드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차 창밖만 응시했다. 노을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거리에 매달린 마법등이 하나둘씩 별처럼 켜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