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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044583
· 쪽수 : 188쪽
· 출판일 : 2025-09-30
책 소개
이름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시’라는 사건 자체이다.
한국 현대 시의 흐름을 전하는 특별 기획, 『시 보다 2025』가 출간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새로운 감각으로 시적 언어의 현재성을 가늠하고 젊은 시인들의 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기 위해 2021년 문지문학상 시 부문을 신설했다. 〈시 보다〉는 문지문학상[시] 후보작을 묶어 해마다 한 권씩 출간하는 시리즈로, 올해 다섯번째를 맞이했다.
시인(오은, 이수명, 하재연)과 문학평론가(강동호, 조연정)로 이루어진 선정위원은 2024년 5월부터 2025년 4월까지 발표된 시들을 면밀히 검토해 데뷔 10년 이하 여덟 시인의 작품을 가려 뽑았다. 올해 후보작은 구윤재, 김복희, 김선오, 문보영, 신이인, 유선혜, 이실비, 한여진(가나다순)의 작품들이다. 『시 보다 2025』에는 기발표작 4편과 시 세계 바깥의 이야기를 진솔한 언어로 풀어낸 ‘시작 노트’ 그리고 선정위원의 ‘추천의 말’을 수록하여, 시가 낯선 독자들도 접근하기 쉽도록 구성했다. 또한 독특하고 아름다운 패턴과 리듬을 형성하며 뻗어 나가는 자연 세계를 선명한 색으로 담아낸 에밀-알랭 세기(Emile-Allain Seguy)의 작품 「Prismes-31」(1931)을 이번 책 표지에 활용함으로써 생동하는 시 언어의 운동에너지를 전면에 내보이고자 했다. 독자와 시인 사이를 잇기 위한 여러 노력을 모은 이 책을 통해 시인마다 다르게 빛나는 시적 에너지를 기쁘게 만나보길 바란다.
* 문지문학상의 상세한 심사 경위와 심사평은 『문학과사회』 겨울호와 문학과지성사 웹사이트에 게재될 예정이다.
* 검토 지면: 2024년 5월~2025년 4월 내 간행된 종합문예지, 시 전문지, 웹진
〈시 보다〉 기획의 말
시의 시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던 시간 속에서 젊은 시인들과 그들의 낯선 감각을 다시 읽어준 독자들이 출현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모든 헛된 풍문을 뚫고 한국문학의 심층에서는 본 적 없는 시 쓰기와 시 읽기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었다. 〈시 보다〉는 시 쓰기의 극점에 있는 젊은 시 언어의 운동에너지만을 주목하고자 한다. 1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이 작은 축제는 선별의 작업이 아니라, 한국 시를 둘러싼 예감을 함께 나누는 문학적 우정의 자리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젊은 시인들의 이름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시’라는 사건 자체이다. 시인은 동시대가 소유한 이름이 아니라, 동시대의 감각을 발명하는 존재이다. 시는 도래할 언어의 순간에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시 보다’라는 행위는 시‘보다’ 더 고요하고 격렬한 세계를 열어준다.
선정위원 강동호 오은 이수명 조연정 하재연
* 구윤재, 「다락의 노미」 외
노미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된 노미를 모두 어려워했다 노미는 여전히 노미일 뿐인데 [……] 노미는 여전히 궁금한 게 많은 노미일 뿐인데 아무도 노미의 궁금함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노미에게 건강하라고 건강하라고 투명한 줄을 노미에게서 빼앗으며 이제 노미는 건강할 수 없는 노미구나 그렇게 노미는 상자가 된다
―「다락의 노미」 부분
‘노미’ ‘모루’ ‘노루’ ‘티피’ 등의 이름을 경유하며 생성되는 “고유한 리듬을 동력으로” 삼는 구윤재의 시는 “그 중심에 다정함”(오은)을 품고 있다. “아이였던 ‘나’와 ‘나’ 안의 아이들, ‘나’ 바깥의 아이들과 미래의 할머니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며 자라나는 장면들이 “사랑과 이해의 의지” 아래, “희고 빛나는 시의 무대 위에서”(하재연) 섬세하게 상연된다.
* 김복희, 「보조 영혼」 외
친구들 옆에도 보조 영혼이 있다
있겠지!
보조 영혼들끼리 다과상을 차려 하하 호호 웃으며
주인님과 섬기는 이와 열매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조 영혼」 부분
김복희의 시 세계에 등장하는 이물(異物)적 존재들은 “작지만 분명히 살아 있”고 “보이지 않아도 틀림없이 존재”(오은)한다는 점에서 ‘희망’과 포개어진다. 조그마하기에 부러 들여다보게 되는 ‘보조 영혼’과 ‘요정’과 ‘소인’ 들은 가볍고 소란하게 현실의 틈을 벌린다. 그들의 자취를 따라 “언제나 조금은 위축된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김복희의 시를 읽었으면 좋겠다”(조연정).
* 김선오, 「영원과 에러」 외
음표와 음표 사이에 부는 바람이 춥다.
이런 감기라면 좋겠다.
[……]
이 음악을 사랑하게 될 거다.
겨울 공터 철근 사회의 음악을.
―「영원과 에러」 부분
김선오는 특유한 시적 파인더로 외부 풍경의 픽셀들을 포착함으로써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드러내는 균열의 징후를 현대적이고도 미학적인 언어로 기록”(강동호)한다. 집요한 관찰과 상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의 “이미지-영상-서사 실험”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와 동시에 현실을 넘어서 구성될 수 있는 존재의 다차원을”(하재연) 매혹적으로 제시한다.
* 문보영, 「너에게 수상함이 없었다면 너를 좋아하기 힘들었을 거야」 외
[……] 그저 내 방에서 책상을 꺼내려는데 책상이 문보다 커서 어떻게 책상이 방으로 들어갔는지 궁금해하던 중 불현듯 친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급하게 편지를 썼다. [……] 나는 나의 책상이 복잡한 사물이었다는 사실을 책상을 뒤집어보고 나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는 내용도 편지에 추가한다.
―「너에게 수상함이 없었다면 너를 좋아하기 힘들었을 거야」 부분
얼핏 엉뚱해 보이는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서로 동떨어진 장면들을 이어 붙이는 “문보영의 말놀이”가 위트와 페이소스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세계의 비애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삶의 연습”(강동호)이기 때문이다. 무성한 말 이면의 진심을 적극적으로 들키고자 하는 그의 시는 “능청스럽고 장황한 편지”이자 “허둥지둥 고백”(조연정)이다.
* 신이인, 「새」 외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새」 부분
신이인은 “불온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세대론적 거울”(강동호)에 그간 자신이 거쳐온 허물들의 껍질과 여전히 진행형일지 모를 상흔을 비추어 본다. 끔찍함마저 기꺼이 감내하며 스스로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느껴지는 강인한 솔직함은 그가 지어 입은 “‘시’라는 옷이 보여줄 수 있는 맵찬 맵시”(오은)일 것이다.
* 유선혜, 「모텔과 인간」 외
그가 나방을 내쫓기 위해 흔드는 손과 보송보송 털이 난 나방의 몸통과 털 없이 매끈한 그의 엄지발가락과 나방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탁한 가루와 그의 턱끝에서 떨어지던 땀과 그의 아주 구체적인 몸짓이
인간에게서
인간이라서 떨어지는 미세한 가루 같아서
기침이 나올 것 같았고
―「모텔과 인간」 부분
세속의 불유쾌와 욕망과 허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텔 방 안에서, 무한하기에 공포스러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 가챠(ガチャ) 기계 앞에서 시인은 “흥분하지 않고 낮게 깔리는 문장”(이수명)으로 구체적인 삶의 세부를 예리하게 그려낸다. “정확하게 시대적이고 또 세대적”인 유선혜의 비관과 위로는 “한국 시의 현재를 짚어보게 하는 가늠자”(하재연)이다.
* 이실비, 「택시」 외
미터기처럼 뛰었다.
미친
긴
터널을 벗어날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 같은 것을 봐도 사람인가? 확신할 수 없었을 테지만. 택시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택시들과 헷갈리지 않고 그 택시를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지금도 있다.
―「택시」 부분
“가족, 성, 착취, 제도, 위계의 문제들과 부딪치면서 기이한 이미지들로 섞”이는 “이실비의 공간 모티프는”(이수명) 삶 곳곳에 끼어드는 폭력과 상실을 마치 한 편의 잔혹 동화처럼 펼쳐낸다. 시인과 함께 흔들리는 택시를 타고 둘러보는 기억의 정경은 “건조하게 읊어진 고통을 마주하는 것이 결코 극복의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을 “슬프게 환기한다”(조연정).
* 한여진,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사람은」 외
그것들을 다 모으면 집을 지을 것이다 뜨끈한 방바닥에는 고구마와 토란을 숨겨놓을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해, 물으면
아주 바싹 찰싹 꽁꽁 붙들어야지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사람은」 부분
“세상의 내력을 들여다보고 듣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씌어”(이수명)진 한여진의 시는 존재와 부재, 소멸과 재생을 시적 체험의 영역으로 데려다 놓는다. 촘촘하게 직조된 “굽이굽이 아득하고 오랜 삶과 죽음의” 서정을 따라가다 보면 “유원한 시공간”과 “반갑고 그립지만 또 동시에 무섭고 외로운 감각들”(하재연)이 눈앞에 펼쳐진다.
목차
구윤재
다락의 노미
모루와 노루
겨울은 양쪽에서 온다
티피
시작 노트 | 빛 부스러기
추천의 말
김복희
보조 영혼
요정의 마당
사람의 딸
새 입장
시작 노트 | 쓰기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추천의 말
김선오
영원과 에러
무빙 이미지―그리고 백 개의 휘어짐
픽셀들
불결한 무無
시작 노트 | 복원
추천의 말
문보영
너에게 수상함이 없었다면 너를 좋아하기 힘들었을 거야
너의 바보에서 떠나 나의 바보로 간다
그런 힘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걸
말하는 것이었는데
시작 노트 | 그들의 마음
추천의 말
신이인
새
꿈의 옷
뱀
사치
시작 노트 | 쓰는 사람
추천의 말
유선혜
모텔과 인간
모텔과 리모컨
모텔과 변기
가챠 갸루
시작 노트 | 망한 노트 견디기
추천의 말
이실비
택시
별장
귀와 종
칠
시작 노트 | 고막에서 시작되는 바느질
추천의 말
한여진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사람은
사운드트랙
작은 인간들의 무덤
환대
시작 노트 |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낮은 휘파람이 들려오는 유치원
추천의 말
기획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모르는 노루와 걷는다 모루와 노루는 아이의 이름이다 모루와 노루는 걷는데 이 걸음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음이야? [……] 주의를 환기하는 주의 사항을 이해할수록 숲은 멀어지고 그림자가 헤엄치는 숲에서 나무의 꿈을 꾸고 숲에서 멀어질수록 오랫동안 숲속에 있었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모루와 노루는 언제까지고 자라지 않을 것 같아 오래전에 끝까지 가버렸으므로
―구윤재, 「모루와 노루」 부분
[……] 희망, 혼자라면 맨몸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으나, 희망, 에밀리 디킨슨식으로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누군가는 희망, 울음소리를 반드시 알아듣게 하려고, 희망,
수화물을 따로 부치고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더 커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작은 손 작은 발의 소인들 더 작아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김복희, 「새 입장」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