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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65120580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2-08-11
책 소개
목차
책을 펴내며 · 4
제1장 퇴고(推敲)
의지의 계보(系譜) · 14
어떤 반칙 · 20
퇴고(推敲) · 25
회심(回心)의 반전 · 30
자연의 존재방식 · 35
모녀 · 40
알파고와 사바고(娑婆苦) · 45
불한(不汗)의 예술 · 50
녹색 면허증 · 55
제2장 첫걸음
운명이 손대지 못하는 시간들 · 60
첫걸음 · 66
생명과 생명 아닌 것 · 71
프로이트에게 빚진 사람들 · 76
유목민의 신기(神氣) · 81
지남(指南)의 돌 · 86
로댕과 코가 깨진 남자 · 93
움직이는 화폭(畫幅) · 98
자유의 두 얼굴 · 103
제3장 고궁의 담 안쪽
에덴으로의 회귀 · 110
이판사판 · 115
고궁의 담 안쪽 · 120
탈을 써야 탈을 벗지 · 125
선입견의 폭력 · 130
생각 따로 말 따로 · 135
촌스러운 질문 · 140
화계사 가는 길 · 145
그가 한국사람 된 까닭은 · 150
제4장 데자뷰의 반역
데자뷰의 반역 · 156
태양도 슬픔이 될 수 있는 땅 · 160
경박한 여행자 · 165
각광 그리고 상실 · 170
여름 산행 · 175
연금술사의 유전자 · 179
팍상한 폭포로 가는 길 · 184
룩소르에서 종묘까지 · 188
밀레니엄맨 · 193
제5장 식영(息影)의 뜰
건넌방 손님과 아버지 · 200
면죄부를 다시 읽다 · 206
아주 오래된 기억 · 211
욕망의 마지막 조건 · 216
여명(黎明)의 아우라 · 223
짝사랑의 뒷이야기 · 228
생명과 욕망 사이 · 233
식영(息影)의 뜰 · 238
쌍둥이 액자 · 243
죄진 채로 죽지 않으리 · 248
저자소개
책속에서
전혜린의 영혼을 그토록 휘어잡았던 니체도, 파스칼도 그녀의 삶을 바꿔놓지 못한 것은 인생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안정되지 않은 환경에서 겨우 4년여 동안 대학강단에서, 그리고 작품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어느 날 자신의 후배와 길을 가다가 사주 보는 사람 앞에 손을 내밀며 “내 손금에 자살할 운이 있는지 봐주세요” 하더란다. 나와 여고 동창생이던 그 후배의 전언이 지금도 안타까움으로 귓전을 맴돈다. 전혜린은 생전에 계획만 했을 뿐 수필집 한 권 묶어서 남기지 못했지만, 그녀가 바라던 삶은 학자보다는 작가였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한국의 수필가 중 그녀만큼 철학적 유전자를 지닌 여성이 또 있을까 싶다.
전혜린이 떠난 후 남은 사람들이 엮어낸 수필집들을 대할 적마다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책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은 책의 출판 연도와 책의 크기뿐이다.” 책속에 들어 있는 저자의 정신세계와 작품세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부정확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더구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 모음집’이고 보면 아나톨 프랑스의 혜안이 기우만은 아닐 듯하다. 전혜린의 수필집들을 손에 들면 출판의 시점, 작품 선정, 게재 순서, 책의 제목 등등 구석구석에서 저자의 호흡이 날아가버린 무채색의 이삭을 줍는 느낌이다.
대부분의 저자는 책 출판을 앞두고 퇴고를 거듭하면서 가장 최선의 그리고 최근의 정신적 자화상을 담게 마련인데, 전혜린이 생전에 그런 수필집 한 권 출간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부질없이 그리움이 솟는다. 학생기자 시절부터 전혜린 작가에게 원고도 청탁하고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철학과 지성에 대한 동경에서이기도 했지만 나의 성장환경에 있었던 우연한 공통점이 친화력의 밀도를 더했던 것 같다.
― 「운명이 손대지 못하는 시간들」 중에서
문학이 왜 철학가 칸트를 가까이하기 꺼려하는지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들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조금은 밝혀준 셈이다. 샌들 교수는 칸트의 자유개념이 까다롭다고 했다. 어렵다는 말 대신에 까다롭다고 한 것은 칸트철학의 ‘자유개념’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경험적인 의미와 다르다는 뜻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근원, 거기서만 누릴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칸트는 ‘도덕적 자유’라고 불렀다. 그리로 가는, 아니 가야 하는 당위의 발걸음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무조건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이며 인간에게 내재된 이성이 그 길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문학이 칸트를 경원하는 이유는 칸트의 자유개념 하나만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규칙적인 산책으로 유명한 칸트가 산책의 규칙을 어긴 적이 있었는데 루소의 『에밀』을 읽는 데에 열중하느라 그랬다고 전해진다. 『에밀』이 어떤 작품인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목소리가 찌렁찌렁 울리는 계몽주의 교육론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연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끝임없이 자신을 교육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루소의 『에밀』에 빠져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산책의 규칙을 깬 것이 실화인지 일화인지 알 수 없지만 상징하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 칸트의 ‘자유’와 루소의 ‘자연’은 표현은 달라도 온전히 포개지는 존재론적 쌍둥이다. 루소의 자연의 땅에 설 때에만 칸트의 자유를 만날 수 있음이다. 자아(自我)의 비실체성을 자각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경지가 자연의 땅이고 자유의 세계이리라.
― 「쌍둥이 액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