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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5120993
· 쪽수 : 236쪽
· 출판일 : 2024-11-03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제발 훨훨 바람처럼 자유롭거라 · 5
장사꾼일기초 · 9
케이크를 품다 · 37
여자의 시간 · 71
상록객잔 · 99
머리꽃 미소 · 121
구름 속의 얼굴 · 149
딸들의 반란 · 171
상록마녀전 · 199
발문 | 욕망과 ‘유다의 창’으로 본 세상/ 신승철 · 227
저자소개
책속에서
● 세라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윤홍은 슬며시 혜준을 안았다. 혜준은 윤홍의 두 팔을 뿌리치지 않았고 윤홍의 입술이 혜준의 입술에 포개었다. 혜준은 당황하였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윤홍은 페로몬 향기를 싱그럽게 풍겼고 까칠한 턱수염이 혜준의 뺨을 스쳤다. 남자의 포근한 체온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혜준은 스르르 긴장했던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그동안의 쌓였던 외로움의 감정이 커다랗게 회오리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혜준은 감았던 눈을 살그머니 떠서 윤홍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도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만큼 진정으로 사랑해줄지 문득 혜준은 이 순간 겁이 났다. 혜준의 처지를 상세히 안다면 어떤 모습을 할까?
끌어안고 있던 윤홍의 두 팔을 풀었다. 자신감이 없었다. 윤홍은 더욱 팔에 힘을 주다가 혜준의 완강한 거부에 팔의 힘을 풀었다. 혜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남자에게 여자로 인정받는다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이 순간의 입맞춤이 얼마나 진지해질 것인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 당혹스러운 생각에 눈물이 흐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윤홍은 혜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만히 혜준을 바라보았다. 혜준은 윤홍의 눈을 피해 얼굴을 숙였다. 가슴이 두근거려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 「여자의 시간」 중에서
● 사내에서 그러한 우리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정연이었다. 정연이가 사귀었던 유부남인 과장과 결별하고, 정신적으로 갈등을 느끼며 나와 술자리를 하게 되면서, 자연 그 남자와의 관계가 들통난 것이다. 유부남이었던 과장은 부인과 이혼을 하면서 정연이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으나, 부인에게 발각이 난 후론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달려갔고, 정연이는 멍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는 늘 바쁘다며 정연이를 피했다. 나 역시 똑같은 사연은 아니지만, 유부남인 경리과장과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나는 정연이를 토닥거려주었다. 그러한 나에게 그녀는 언니처럼 가족처럼 다가왔다. 싫지는 않았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졌고 거의 연락조차도 하지 않는 나의 처지로는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나와 그 남자와 멀뚱한 시간의 공백을 어느 순간부터 정연이가 메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주 싸우기 시작했다. 때에 따라서 정연이는 그 남자가 마치 자신의 남자친구인 양, 짙은 교태와 농담을 걸었고, 그 남자 역시도 싫어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나는 가만히 웃어주지만, 속으론 얼굴이 붉어오고, 정연이도 그 남자도 미웠다. 고함이라도 질러 혼내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호호거리며 웃어야 했다. 팔짱을 끼고 매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오고, 함께 구내식당에 가고. 나는 멀찌감치 뒤따라갔다. 정연이는 흘끔 돌아보며, 뭐 해 빨리 안 오고. 그 사람과 앞질러갔다.
정연이가 그러는 행동을 왜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냐. 그러는 내 말에 그 남자는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 애에게 어떻게 그렇게 해. 그렇지 않아도 이제 겨우 웃음을 찾은 애에게. 그 남자가 하는 항변이었다. 오히려 내가 심술쟁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벌칙으로 우리 앞으로 일주일 동안 말하지 맙시다. 회식이 있었던 날 밤이었다.
― 「케이크를 품다」 중에서
● 밤이 깊었다. 술 취한 숙희의 눈에는 나이트클럽 네온 불빛만이 번쩍거리고, 오가는 행인들이 좀 전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큰길 건너 숙희의 원룸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상수를 애써 외면하고 혼자 길을 걸었다. 등 뒤에서 상수가 말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다시 열심히 살게. 헤어짐이 실감났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이 가져다주는 냉담한 용기로 마음의 응어리를 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건 당신 때문이었어요. 내가 추워서 오들오들 떨 때 당신의 미소 한번만이라도 있으면 추위가 녹았을 텐데. 당신은 냉담하고 차갑게 날 떠났어요. 당신 처자식 안위는 걱정됐어도, 나는 당신의 소모품일 뿐이었죠. 이제는 나도 철이 들어 당신만 바라보지 않아요. 나에게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이제는 있어요. 당신 떠난 후, 제가 아파야 했던 그 시간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해요. 이제 후회하지 않아요. 영철 씨의 부탁으로 충주호에 갔을 때 잉태된, 당신과 나의 자식인 민이가 내 곁에 있으니까요. 제 운명인 걸요. 이제는 제가 당신 곁을 떠나야 할 차례가 아니던가요? 언제나 싱그러운 푸름을 간직하겠다는 상록객잔에서 푸르러 싱그러운 냄새만 기억나던 당신과의 감정도 끝을 내겠어요. 마음에 맺혔던 응어리가 푸른 빛처럼 후련한 걸요. 이제 다시 새로운 푸름을 간직해야겠어요. 안녕 잘 지내요. 숙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새 한 마리 비 그친 청명한 하늘 위로 날아갔다. 지나던 한 사내가 힐끗 돌아보았다.
― 「상록객잔」 중에서